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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3. 2020

영화라는 영원한 현재 안에서

<패왕별희>(1993)

<패왕별희>의 작품 포스터 © 제이앤씨미디어




패왕이 없다면 별희는 있을 수 없다. 작중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지만 별희에 해당하는 ‘우희(우미인-극중에서 장국영이 연기함.)’는 패왕의 첩이다. 그러니까 패왕에게 별희가 특별한 존재인 것이지 별희에게 패왕이 특별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만약 패왕이 별희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별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말하자면 패왕-별희라는 제목 자체가 그러한 인물 간의 주술관계를 풀이한다.


이를 패왕역의 장풍의와 별희역의 장국영에 적용해본다면 장국영은 언제나 후속으로만 남겨진다. 별희가 패왕을 버린다 하여도 별희의 삶에는 큰 지장이 없을 테다. 실제로 작중에서 장국영은 장풍의를 사랑한다. 그런 맥락에서 동성애적 사랑을 보여주는 퀴어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퀴어 영화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장국영이 남성도 여성도 아닌 별희로서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면, 장국영이 경극에 삶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메소드 연기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경극의 내용이 패왕과 첩의 관계라 하여도, 그걸 연기하는 배우까지 위계 서열을 맺을 이유는 없다. 두말할 것도 없는 소리다. 범죄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 범죄자일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장국영은 경극이 아니라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작품 안에서 대화를 통해 여러 번 언급되지만. 도입부에서 어머니에게 버려진 장국영이 경극단에 도착하게 되는 장면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기원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다. 경극에 몰두하는 장국영에게 경극 이외의 삶은 없는 듯 보인다. 조금 멀리 떨어져 본다면, 영화 밖에 있을 장국영의 모습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영화 이외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 이는 영화가 상영될 동안에만 존재하는 배우의 연기된 육체를 말해주는 가장 단명한 명제다.


극중극인 패왕별희 상연 중에, 별희가 살아 돌아온 것만 같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라. <패왕별희>의 모티브가 된 극중극 [패왕별희]는 ‘옛날 옛적에…’라는 서두로 시작된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오래전으로부터 흘러와 오늘날 여기 이곳에 도착했다. 따라서 패왕-별희가 살아 돌아왔다는 말은 그들이 세월을 거슬러왔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 부분이 극과 영화의 형태에 들어맞게 됨으로써 <패왕별희>는 공명하는 ‘장치(apparatus)’가 된다.


영화 장치는 영화를 카메라 옵스큐라의 구조를 재현하는 ‘장치’로 축약하는 단어이다. 이를테면 영화는 남성적 시선으로 설계되었고 그러므로 그 누구라도 들여다볼 때 남성적 시선을 견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은 영화 기계라는 단어에서의 ‘기계’와 다른 맥락을 지닌다. 영화 기계가 작은 세상 속의 진리를 재현하는 난쟁이의 느낌이라면, 영화 장치는 극이 상연되는 장소라는 공간 자체에도 대입될 수 있다. 오페라와 같은 무대에서의 2층 객석이 특권적 지위를 갖는 것을 생각해보라.


[패왕별희]가 기계가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객석이 아닌 무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모두 하나의 지평 위에 선다. 이곳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곳의 타임라인은 카페트처럼 앞으로의 방향에 길을 내어준다. 다르게 말해, 그런 이유로 미래는 자리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그들이 하나의 지평 위에 서 있다는 점을 통해 진실됨을 얻지 못한다. 이는 영화도 마찬가지여서, 영화가 미래를 보여준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지평 너머의 일에 속한다.


연극은 변수를 창출할 수 없다. 늘 같은 길만을 걷는다. 운동하는 물체의 속도에는 변함이 없지만, 방향을 틀 수 없다는 점이 연극 무대의 근본적인 한계로 지적된다. 그러나 무대 밖으로 나올 수는 있다. 이 대목에서 배우는 연극의 서사로부터 분리된다. 허나 그럼에도 연극이라는 한배를 탄 것에는 변함이 없어서, 어쨌거나 그곳의 시간-운동 에너지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말을 영화로 넣어본다면 영화라는 틀 안에서 작동하는 연극이라는 배우를 상정해볼 수 있다.


영화와 연극은 서로 비슷하지만, 가장 큰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상이 맺히는 질료가 다르다는 점이다. 영화의 상은 스크린에 맺히고, 연극의 상은 배우로 집약된다. 영사기가 흔들릴 때 영화는 흐릿해지지만, 배우가 흔들릴 때 연극은 보다 더 견고해진다. 또 다른 점도 있다. 첸 카이거와 같은 세대 감독인 허우 샤오시엔의 <희몽인생>은 인형극을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를 다룬다. 이 인형극은 감정 없는 배우인 ‘인형’을 다룬다는 점에서 흔들릴 일이 없으며, 그렇기에 연극이 아닌 영화의 법도를 따른다. 이는 마치 영화가 배우에게 요구하는 집약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배우는 영화 안에서 영화-기계의 일부가 되어 ‘부속품’으로 사용된다.


이 발언이 배우의 자율성을 무시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연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패왕별희]는 두 남자가 살아오는 모든 시절에서 같은 이야기, 성격을 공유한다. 연극이라는 게 본래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배우 개인의 정체성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같은 것을 연기함에도 다른 연기처럼 비추어지는 것은, 배우 자체가 맺음의 질료가 되어 관객의 시선을 난반사시키기 때문이다. 예컨대 연극에서 배우는 그 자체로 스크린의 역할을 짊어진다. 여기서 그에게 상을 투영하는 것은 ‘전통과 관습’이라는 영사기이고, 상영 도중에 영사기가 맛이 가면 흥이 깨지듯이 그들에게 전통과 관습이란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할 불문율이다.


영사란 역사로부터의 투사다. 과거에서 온 현재는, 태양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의 시차처럼, 영사기로부터 스크린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상정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패왕별희]가 설정한 역사의 짧은 단면을 엿본다. 그러나 이 단면은 영사기도 스크린도 아닌 그 중간의 전송이다. 더욱이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보았다’는 느낌 자체이다. 영사는 언제나 스크린이라는 현재로 맺음되고, 이러한 점을 간과하면 그것이 마치 과거나 미래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현재가 아니다. 그것은 관습이자 법도이다.


다시 영화-장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장치란 특정한 시야를 만인에게 보여주도록 설계된 공통의 감각, 혹은 복제이다. 물론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복제와는 거리가 있다. 허나 한 번에 한 사람만 볼 수 있더라도, 모두가 같은 것을 보았다면 그 상은 ‘복제’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은 연극에서 배우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할 단서가 된다. 연극은 매번 똑같지만 그걸 연기할 배우는 다양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복제된 상 속에도 수많은 청자가 있으며, 그것은 바로 장치를 들여다보는 배우인 것이다.


장국영이라는 사람을 논하기 전에, 문화대혁명을 대하는 인물의 태도에서 영화를 논하는 태도가 느껴지기도 한다. 작중에서, ‘경극은 인민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전통 소재에서 벗어나 계몽극으로서의 탈바꿈을 원한다. 당연히 장국영은 그에 반대하는데, 그것은 그가 영사기의 존재를 부정하지 아니하는 극장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 말했듯이 장국영에게는 영화 이외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장국영은 영사기가 있어야만 영화일 수 있다는 사람, 전통이 아니면 전통극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반면 경극의 계몽화를 꿈꾸는 이는, 영화가 영사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이 극장 밖의 영화를 논하는 게 되어도 좋겠지만, 전통과 관습이라는 측면으로 생각해 볼 때, 영화의 구성요소가 과거로부터의 현재에서만 귀인하지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찌 되었든 간에 미래라는 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공통의 형식을 공유하면서, 그럼에도 미래의 어느 형태쯤은 묘사해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아주 조심스러운 생각이 그에게는 있다.


미래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우리가 이미 보아왔던 길에 놓여있었다. 데이비드 린치처럼 평행선의 시작과 끝을 꼬아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 형태로 미래를 진행 상태로 놓거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처럼 이미지를 수없이 겹쳐 중층의 시간대를 돌출시키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 한편으로 너무 많은 가지를 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패왕별희]라는 극이 한 인물의 평생동안 재현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영화를 통해 영원한 현재를 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경극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별희가 있다면, 경극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노라 말하는 패왕이 있다. 이 주술관계는 전자에 무게가 실리며 그걸 인정한 후자의 죽음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는 게 아니라, 현재를 잃은 이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패왕별희>가 묘사하는 과거를 보며 역사의 불행을 느끼는 것은 영화에 대한 과도한 감정이입이라 할 수 있겠다. 오히려 우리는 장치를 들여다보는 행위를 통해 변화무쌍한 현재에 머무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화를 언제나, 보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어디서’라는 물음은 영혼이 안착할 자리가 없는 SF 혹은 그 이후의 세계에서 찾도록 하자. 우리는 아직 부모님이 물려주신 육체에 살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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