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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4. 2020

정신분열자의 말하기 방식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에 대해 나는 잘 모르지만, 누군가 그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메콩호텔>을 권할 것이다. 블로거 벼리님이 글에서 지적하듯 이 영화는 “정신분열자의 말하기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분열된 정신을 어떻게든 이어보려는 게 이 영화에서의 음악이다. 그런 면에서 가녀린 선율과 슬픈 리듬은 진혹곡이라기보단 수술대에 가깝다. 따라서 이는 케네디 암살 사건을 다룬 영화 <재키>에서 음악이 갖는 역할과도 동일하다. 케네디 암살 사건 중, 영부인 ‘재키’의 행적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고인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한데, 그런 슬픔을 뒤덮어 주는 게 바로 음악이다. 하지만 그 음악의 행적은 고인을 위로하는 이불이 아니라 앞서 말한 수술대의 역할을 한다. 먼저, 영화의 도입부에 케네디는 두 발의 총알을 맞는다. 첫 번째 총알은 목을 뚫고 지나가 케네디의 목소리를 제거한다. 두 번째 총알은 관자놀이를 관통하며 뇌를 터트린다. 이 글에서 적나라한 표현을 사용한 것처럼, 케네디라는 사람 중 적어도 신체만큼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나는 그가 가톨릭을 믿었기 때문에 영혼만큼은 온전하리라고 추측한다.) 그의 영부인 재키가 마주한 슬픔은 이렇게 파편화되어버린 신체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간다. 마치, <메콩호텔>이 정신분열자의 말하기 방식을 취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키>는 재키가 느끼는 슬픔이 신체의 분열이 정신분열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유발된다고 믿는 것 같다. 이는 다름 아닌 역사적 진실 때문이다. 케네디의 사망장면은 티브이 생중계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다시 말해서, 케네디라는 물질은 완전히 박살 나버렸다. 이때 티브이라는 매체는 물질은 취하되 영혼을 빼가는 방식으로 기능하므로 케네디는 n분의 1만큼 분절되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즉 ‘그들 각자의 케네디’가 성립하며, 이를 다시 하나로 취합하면 케네디라는 한 사람에 대한 여러 추모 정신이 된다. 예컨대 이를 두고 정신분열증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습은 케네디의 사망원인이 다름 아닌 ‘뇌’에 있다는 점을 보조하기도 한다. 뇌는 기억을 종합하고 다음을 제안하는 기관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뇌의 손상은 곧 그런 절차에 문제가 생김을 암시하며, 케네디의 사망은 우리가 케네디라는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 문제가 생기게 됨 또한 암시한다. 그래서 영부인 재키는 케네디의 사망 순간에 뇌 조각을 긁어모으려 했다. 뇌라는 물질이 기억을 담았다는 점에서 뇌=기억이라면, 그것은 파편화된 기억을 애써 보존하려는 덧없고도 슬픈 시도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물질과 기억을 언급해야만 한다. 베르그손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는 이 개념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음 개념인 시간으로 넘어갈 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케네디가 피격당한 첫 번째 부위가 목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때 케네디는 목소리를 잃는다. 그리고 영화에서 목소리란 이미지 없이 도래한다는 점에서 비물질적인 특성을 갖는다. 셰페르의 말을 빌려 ‘아쿠스마틱(acousmatique)’으로도 표기할 수 있는 이 개념은 영화사 최초의 발화로 알려진 <재즈 싱어>의 그것에 정확히 부합한다. 차이가 있다면 케네디는 역방향이고 알 존슨은 정방향이었다는 점이다. 알 존슨이 역사를 따라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요.”라고 말한 반면, 케네디의 역사는 총알에 피격된 순간 과거로 되감아지며 늘어난 테이프처럼 된다. 이때 늘어난 테이프의 모습이 바로 흐트러진 뇌=기억에 대응한다 할 수 있겠다. 다른 방향에서 지적하자면, 그렇게 늘어나고 흐트러진 기억을 마주하는 게 영부인 재키이고, 그래서 그녀는 영화 내내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영화는 케네디 암살 사건의 이전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며, 이는 늘어난 테이프가 아직 생생할 시절의 ‘만약’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슬픔을 준다. 


재키의 기억은 슬픔으로 인해 계속해서 흐트러져만 가는데, 그런 와중에도 음악이 꿋꿋이 살아남아 그녀를 위로한다는 점이 뇌를 긁어모으려던 재키의 시도를 완성시켜주는 듯하다. 만약 이것이 다큐멘터리였다면 음악으로 분절을 취합하려는 시도를 비겁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만, <재키>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한 드라마에 가깝고, 이는 <메콩호텔>도 마찬가지다. 분명 <메콩호텔>은 아피찻퐁의 영화 작업 중을 다룬 영화이긴 하다. 동시에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을 지녔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물질과 기억이라는 테마가 주로 신화의 형태를 한 사실을 재연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여기에서도 등장하는 태국의 전통 귀신들은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암시한다고 보는 게 정설일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암시함에도 내부적으로 파악되는 함의가 없다는 게 아피찻퐁 영화의 기묘함이다. 그의 영화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용암 강처럼 검은 표면을 지니지만, 속을 찔러보면 용암이 매섭게 흘러간다. 예컨대 물질과 기억이 일치하지 않는다. 도둑맞은 편지처럼 물질 아래로 기억이 계속 흘러간다는 게, 신체에 귀속된 뇌가 굳이 필요 없다고도 아피찻퐁의 생각을 보여준다. 


아피찻퐁은 우리의 뇌가 인테리어(Interior)에서 익스테리어(Exterior)로 확장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아피찻퐁의 설치 미술 작업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양쪽 벽에는 프로젝터로 영상을 틀어준 후, 정중앙에는 영화를 설치하는 아피찻퐁의 인스톨레이션 아트는 영화의 시공간을 양쪽으로 확장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이 효과는 보이는 그대로를 넘어 영화 안에 담긴 함축까지도 외연으로 확장한다. 기존의 영화가 프레임 안에서 홀로 사고하는 인공지능형 주체였던 반면에, 아피찻퐁의 영화는 프레임을 중심으로 외연을 끌어 모으는 익스테리어 형태를 취한다. 간명하게 비유하자면 네트워크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네트워크상에서 데이터는 수시로 오가지만 그럼에도 어느 한 곳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이 점이 저장장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데이터가 드나들 수 있게 한다. 말하자면 네트워크상에 띄워진 두뇌는 그 자체로 무언가를 저장하는 ‘장치’가 아니라, 데이터 출입을 관리하는 사무소 역할이다. 영화로 운을 옮기면 프레임은 그저 거들 뿐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보는 시각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또한 영화를 데이터 출입 사무소로 만드는 건 영화 자체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의문을 남긴다. 그러나 아피찻퐁이 시도하는 건 이 의문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확장이다. 우리가 여태까지 해왔던 물음은 영화가 기억을 담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여기에는 알랭 레네에 대한 들뢰즈의 분석이 자리한다. 들뢰즈는 레네의 영화에서 시공간의 교차를 발견했고 이것을 사무소로 칭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프레임이라는 한계는 여전히 있었고, 영화를 독해하려면 거울 나라의 앨리스처럼 거울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게 사실이다. 아피찻퐁의 작업은 영화가 바로 그 프레임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영화는 독립된 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상에 걸친 출입국 사무소와도 같다고 아피찻퐁은 말한다. 다른 나라로 향할 비행기 탑승을 위해 공항에서 검문을 거치듯이 이 세상의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다. 그러나 그 무한함은 검역에 의해 항상 제한받는다. 아마도 이것이 영화를 막연하게 가능성으로만 보는 이상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피찻퐁의 영화는 현실에 기반을 둔다. 귀신이 나오고 호랑이 나오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그들은 모두 물질에 해당하는 존재들이라는 소리다. 


그의 다른 작품인 <열대병>을 보자. 앞서 간 디지털 이미지라는 점에서 비물질적 존재를 묘사하는 것만 같지만, 그것은 무한함을 검역하려는 시도였다. 신화적 존재에 대해 무수히 떠도는 소문을 정글 속의 호랑이 하나로 귀결시키는 것은, 유령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런 기준만은 갖추자고 시민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즉 아피찻퐁 세계에서 우리는 공항 안의 대기열이다. 어떤 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사상의 여정을 떠날 예정이다. 허나 그 이전에 아피찻퐁이 제안하는 검역을 거쳐야만 한다. 거부한다면 호랑이라는 형태 하나로만 격리될 테다. 그렇다면 여기서 던져져야 할 물음 하나, 정말로 원하던 게 바로 그곳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대답은 “No.”라 할 수 있을 테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나 만들어진 <메콩호텔>은 공항에 안내방송 하나를 추가했을 뿐이다. 이 안내방송은 길을 잃은 우리에게 뚜렷한 표지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공항에 증축이 이루어졌으므로 이전보다는 더 공간이 넓어졌다는 점에 대한 정보도 제공한다. 따라서 이를 두고 동료의식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한데, 그는 혼자서만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콩호텔>은 구슬픈 노래가 영화 전체를 하나로 엮는 영화다. 우리는 이를 두고서 <재키>의 흩어진 케네디 뇌에 비유했다. 그리고 두 영화 사이의 차이는 내장형 뇌가 외장형으로 바뀌는 과정이 내재화와 외재화라는 두 가지 양식으로 달리 작동한다는 점이다. <재키>의 뇌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래서 재키는 현기증을 느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감각은 드넓은 백악관의 공간과 함께 재키의 뒤통수에 달라붙는다. 이 모습은 마치 큐브릭이 저택의 유령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샤이닝>에서 달그락거리는 꼬마 자가용의 바퀴 소리가 저택의 나머지 공간을 화면 안으로 끌어왔던 것처럼, <재키>의 음악은 산산이 조각난 재키의 슬픔을 화면 안으로 끌어온다. 이는 슬픔이 중첩되는 안개 같은 방식이 아니라 사방에서 독가스를 주입받는 슈뢰딩거의 상자와도 같다. 슈뢰딩거의 상자에서 핵심은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와 같은 양자적 상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자 안에 고양이가 ‘갇혀있다’는 공간의 상태이기도 하다. 예컨대 그런 맥락에서 <메콩호텔>은 슈뢰딩거가 지닌 삶의 가능성을 상자 밖으로 확장하려 든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메콩호텔>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건 담론의 생사가 아니라 담론의 확장이다.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와 같은 의미적 논란은 아피찻퐁에게 필요없다. 그가 보여주려는 건 시네마가 우리 세상에 열린 하나의 문이라는 점이다. 말 그대로 허브, 그는 이것이 큐비즘이 아니라 도라에몽의 ‘어디로든지 문’이라고 말한다. 


정신분열증자의 말하기 방식은 때때로 옳은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어쩌다 얻어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현인임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메콩호텔>을 두고서 정신분열증자의 말하기 방식이라고 말하는 맥락은 현인인가 아닌가를 따지지 않는다. <메콩호텔>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이곳이 갈 곳 잃은 환상인 큐비즘이 아니라, 어디로든지 향할 수 있는 문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피찻퐁이 줄곧 던져오는 디지털 시네마에 관한 물음을 정신분열증자에 동일하게 대입해볼 필요가 있다. 내장형 뇌가 외장형으로 바뀐다는 사실은 영화가 더는 프레임 하나로만 분석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함과 동시에, 우리의 사고 또한 그렇게 바뀐다는 점을 예견한다. 이를테면 인터넷상에서 문서 하나가 있을 때 그곳에는 수십 개의 하이퍼링크가 각주로 달린다. 이들은 각각 별개의 문서에 해당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프레임에 종속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의 문서를 볼 때 어떤 프레임을 취하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프레임 혹은 인사이트라고도 할 수 있을 이것을 두고 우리는 아피찻퐁의 말을 빌려 관문이라 부른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다른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여기에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한 것은, 하나의 프레임에 종속된 별개의 문서들이다. 우리는 하나를 읽으며 열을 생각하는데,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기술 발전의 공로인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조각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신체를 전제하는 정신이 신체의 분열로 인해 이미 갈 곳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게 역설적인 면이다. 옛말에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마음이 깃든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신체가 없을 때 우리는 마음을 둘 곳이 없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이 점을 영화의 프레임에 관한 이야기 테이블로 옮겨보면, 영화에서 기억과 시간은 ‘기억 없이도 시간이 독립할 수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 방식이 바로 아피찻퐁의 익스테리어 작업이라는 것이다. 영화 하나에 ‘그들 각자의 영화관’을 투영하는 시대가 티브이에 의해 분절된 케네디의 <재키>라면, 영화 하나를 두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관문으로 만드는 게 아피찻퐁의 <메콩호텔>이다. 우리는 뇌가 박살 나도 타인이 아는 자신의 모습을 크롤링하는 것으로 기억을 구축할 수 있다. 기억이 자아를 정의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곳에 살아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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