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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06. 2020

<온다>, 기술적 형상이 빚어낸 취향과 게임

<온다> 2020


<온다>의 작품 포스터 © 미디어캐슬


나카시마 데쓰야의 <온다> 


<온다>가 어떤 영화인지에 대해 정의하기란 쉬운 일이다. 나카시마 데쓰야의 이 영화는 그의 전작인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라는 이름의 연장으로 기억될 공산이 크다. 이는 한국에서 해당 작품이 인기를 끌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에 불과하지만, 그런 단순한 이유만으로 감독의 후속작에 관심을 두는 것이기에 이 추론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두 영화 사이에는 서사나 스타일 측면에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어떤 면모가 존재하지 않는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비운의 여성에 대한 세계구급 구원의 서사라면, <온다>는 세계가 지적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더 나아가면 ‘오컬트’라는 이름의 장르에 불과하다. 예컨대 두 영화는 나카시마 데쓰야의 이름으로 한데 엮이지만, 감독의 이름을 빼고 보면 일관성 없는 별개의 작품이 된다. 두 작품의 ‘세계’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뜻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온다>를 보며 <혐오스런 마츠코>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 전혀 당연하지 않은 사실이기도 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작가주의가 지향하는 게 여러 작품에 보이는 한 명의 작가였으니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는 우리가 감독의 이름 아래 ‘스타일’이라는 명목으로 공통점을 만들어내려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종의 계보, 계파라고나 할까. 따라서 우리가 <온다>에 주어진 강박을 떨쳐내는 것은 일종의 성장 서사적 면모를 보인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는 이 집안이 싫습니다.”라는 선언, 그리고 “가문이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반항이다.


저는 이 집안이 싫습니다 


나카시마 데쓰야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그의 영화는 어떤 작가적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문제 있는 인간”을 보여주는 것에 주력하는 경향이 있다. (씨네21, “<온다>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 - 문제적 인간에 끌린다”, 2020.04.02, 김성훈.) 이 발언 그대로를 믿기에는 작가 한 명의 예술적 소산이라는 말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의 ‘금발미녀’ 사랑과 같은 사례를 고려한다면 주제도, 스타일도, 세계도 아닌 ‘개인’에 대한 선호가 영화제작의 주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지지하던 <혐오스런 마츠코>에서도 확인했듯이, 그 문제 있는 인간이란 것은 ‘세계로부터 응시당할 때 비로소 문제 있는 (것으로 취급되는)’ 사람이다. 


이를 테면 히치콕의 금발미녀는 카메라에 홀로 비춰질 때 금발에 대한 어떤 아이덴티티나 연결점을 내보이지 않는다. 금발과 미녀라는 상식은 주로 카메라 안에 주인공 사내가 등장할 때야 조명되는 편이다. 말하자면 금발미녀는 그곳 세계 안에서 단독자로 존재하지 않는데, 바로 이 점이 금발미녀에 대한 히치콕의 선호를 보여주게 된다. 나카시마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문제 있는 인간이란 세계로부터 지목당할 때야 비로소 문제 있는 것으로 판명되는 사람이다. 반대로 풀이하면 지목된 이의 시점으로 진행할 때는 어떤 문제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게 “나는 문제 없어.”식의 자기긍정적 발언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영화란 본디 카메라라는 화자에 의해 이야기되는 동화라는 점이다. 숱한 동화 속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다른 시점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걸 느끼곤 한다. 계모의 시점으로 바라본 신데렐라의 모습이나, 토끼의 시선으로 바라본 거북이와의 경주와 같은 것들이다. 이런 시점의 전환에서 우리가 깨닫는 교훈은 이 세계는 주인공만을 위해 짜여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마치 인간의 인생처럼, 누구나 자기 삶에서는 주인공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그저 일개 개인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하나 있다. 가문에 관한 이야기다. 소규모로 보면 가족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 이 사례는 가문에 소속된 사람이 가문의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에 대한 강박과 그에 고뇌하는 햄릿형 인물을 묘사한다. 이때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라는 말은 가문을 위한 명을 따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가문 밖에서의 개인’이 홀로 생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가문의 명을 따르지 않는 이상 가문으로부터 내쳐지게 될 개인이 홀로 생존하기란, 무리에서 떨어진 짐승의 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마당을 나온 암닭’과 같은 이 부류의 인물들은 카메라에 포착되는 시점부터 이미 세상으로부터의 어떤 고뇌와 연루되면서도, 시선으로는 분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혐오스런 마츠코>에서 발견한 나카시마의 인물상이 바로 그랬다. 역설적이지만 카메라가 그들을 들여다봄으로써 그들은 비로소 세계 안의 단독자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단독자의 메커니즘에 관하여 


<온다>의 인물들은 철저하게 자기배반적인 성향을 갖는다. (강한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영화의 주역인 것처럼 보이는 카나(쿠로키 하루)와 히데키(츠마부키 사토시)는 물론이고 친구 다이고(아오키 무네다카)까지 모두 자신을 배신한다. 이 배신의 행위는 자신이 진짜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행위가 타인의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고, 그런 사실이 타인을 통해 자신에게로 전달될 때 벌어지는 모종의 괴리감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그들은 타인이 자신에게서 기대하는 어떤 면모를 배반한 게 아니라,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어떤 인물상을 이루었다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반당한다. 


먼저 작품 안에서 가장 처음으로 지적되는 이는 히데키이다. 영화는 히데키의 시선으로 출발해 착한 아빠라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는 곧 반박된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히데키의 시선을 대변하며, 이 시선은 카나와 히데키의 집안에 다른 인물이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간파된다. 이런 점에서 작품의 주요 무대인 히데키의 집은 진실의 방과 같은 모종의 역할을 하게 되는 듯한 면이 있다. 영화의 말머리에 가서야 눈치챌 사실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일련의 반전들이 히데키의 집에서 돌려지는 카메라의 머리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안다. 마치 선풍기와 같다고나 할까. 선풍기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그곳에는 ‘기록’이라는 카메라 본연의 행위가 따라붙는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카메라는 집안을 둘러보지만 그곳에는 ‘발견’이라는 카메라 본연의 역할이 따라붙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계적 움직임이 포착하는 현실이 과연 기계적이지 않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기계가 인간적인 면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기계적 동작이 재현하는 기계적 세계가 인간의 감정을 완전히 덮어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기계에 포착된 인간의 모습에서 어떤 감정을 찾아내는 것은 온전히 관찰자의 몫이었다. 물질 자체에는 어떤 추상이 담겨있지 않고, 관찰자에 의해 관찰 상태가 정해지는 게 기술적 재현이 낳은 질료였었다. 예컨대 이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 이를테면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게 다름 아닌 감정이라는 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기계적 조망과 인간의 감정 


기술적으로 재현된 인간이 보여지는 인터넷 공간에서 네트워크 너머의 인간을 표현하는 것은 그것을 다루는 이의 감정이입이다.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면 그건 그저 모니터 위의 점조직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카메라 너머의 인간을 표현하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감정이입이다. 감정이입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조망하게 된다. 이처럼 <온다>의 카메라 전략은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하는 식으로 관찰자적 시선을 끌어내는데, 이러한 기계적 조망 안에서 인물은 기계적 행동을 보이는 인물로 국한된다. 아마도 작중에서 히데키가 인터넷에 보이는 결혼 생활이 그것과 같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히데키는 이상적 인물이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허울뿐인 자기착각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국면이 히데키 한 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느 영화라면 서스펜스라던가 하는 이름으로 사용될 만한 이 장치는 본 영화의 주축이 되지 않는다. 그저 1부와 2부, 3부를 나누기 위한 무대 위의 가림막으로 사용될 뿐이다. 다르게 보면 이 영화가 스릴러가 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는 기술적으로 재현된 카메라임을 현실과 괴리된 시선을 통해 줄곧 말해왔었고, 어쩌면 이는 근래의 우리가 게임에서 발견하는 ‘영화적 움직임’과 유사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다시금 감정에 대한 문제를 던지는 것일 수도 있다. 


<온다>의 카메라 전략을 선풍기에 빗댄 것이 개인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수는 있다. 그러나 다르게 판단하고서는 논의를 진행할 수 없다. <온다>의 카메라 워킹이 일종의 게임 레벨링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 제공하는 스펙터클은 이것이 잘 짜인 인터렉티브 무비라는 인상을 주며, 게임 <라이프 인 더 스트레인지>처럼 우리가 그 안에 개입할 수 있다는 인상을 묘하게 풍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것은 그저 판판한 벽화(스크린)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이 벽화는 약간의 인상을 쬐면 동굴 안의 버팔로처럼 생생히 살아나 우리 앞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때 우리가 버팔로의 생생함을 보며 카메라 옵스큐라의 재현에 감탄하게 되는 것은 바깥세상에 있는 실제 버팔로를 알기 때문이며, 말하자면 이곳에서도 역시나 감정은 기술적 이미지에 대한 매개체이다. 


영매라는 마술, 혹은 기술적 리얼리즘 


다시금 <온다>로 돌아가면, 히데키가 만난 영매사는 히데키의 온라인 블로그가 악귀의 숙주라고 말하며 주체 없는 주체상을 지적한다. 여기서 주체 없는 주체상이란 히데키가 죽었음에도 여전히 업로드 되는 중인 히데키의 블로그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히데키 없는 히데키의 블로그이다. 히데키 가족이 소멸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그곳에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가상의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가상의 이미지인가? 기술적으로 재현되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인스타그램에 올리곤 하는 소소하게 부풀려진 사진들처럼 그곳에는 현실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현상과 사실들이 올려져 있다. 그리고 그 부풀려진 공간을 매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부러움과 질투, 시기와 같은 감정이다. 


이 대목에서 히치콕의 금발미녀에 대한 언급을 약간이나마 수정할 필요가 있다. 히치콕이 자신의 영화에 금발미녀를 등장시켰던 것은 순전히 자기 취향 때문이다. 어떠한 영화적 판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히치콕의 영화에서 금발 미녀를 주축으로 한 해석은 히치콕 개인의 사적 감정이라는 단어로 파훼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해석도 고유한 가치가 있다. 다만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어떤 의미체계가 되지는 못한다. 금발미녀가 히치콕의 취향이라는 말은 히치콕의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것이지 영화 내부의 어떤 연관 고리를 만들어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치콕에게 금발미녀란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것의 기술적 이미지이다. 


또한 위의 인터뷰에서 나카시마는 영화 후반의 거대한 굿 장면과 영매사 캐릭터를 통해 “자신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인식을 확실히 받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언급한 바 있다. 나카시마의 이 발언은 본래의 맥락에서 “리얼리즘적인 영화보다는 확실히 영화라고 느낄 수 있는 비(非)현실의 범주를 그려내고 싶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는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대립항을 위의 이분법에 대입할 때, 현실과 기술이라는 단어에 적용되어 비(非)현실이란 기술적 공간을 뜻하는 게 된다. 여기서 나카시마가 기술적 공간을 그려내고 싶었다는 말은 틀린 것이지만, 기술적 공간 안에서만 그려낼 수 있는 풍경이 있다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사실만큼은 지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기술적 공간 안에서 그려지는 비현실적인 것들은 현실에 없는 것이기에 우리가 아는 현실의 기준들, 이를테면 현실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 같은 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기술적 공간이 재현하는 인간상에 깊게 개입하고 공감하는 나카시마의 모습은 명백히 감정적이다. 이때의 감정적이라는 단어는 정치적인 행동을 이루어내는 감정처럼 어떤 것을 추동하는 동인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투입하지 아니하면 읽히지 않을 스크린 위의 기록들이다. 


하지만 오컬트? 


그렇지만 <온다>가 갖는 기술적 재현에 관한 애정이 영화를 오히려 더 파편화하고 분절시켜버린다는 점은 뚜렷한 단점으로 지적된다. 이 글에서 줄곧 지적해왔듯이 영화가 인물을 바라보고 조명하는 방식은 나카시마 개인의 소관에 국한되며, 이것이 정해진 경로를 지정해 게임 시뮬레이션 같은 인상을 주지만, 다르게 말하면 관객 개인이 즐길만한 요소는 철저하게 세계 내의 것으로만 제한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 이입하든 이입하지 않든 간에 관객은 감독의 장단에 맞춰주어야 한다. 놀이공원이라는 공간이 제공하는 서사적 흐름에 방문자가 어느 정도는 동조해야 하듯이, 나카시마가 진행하는 개인적 취향과 기술적 공간 안에서 진행되는 게임은 관객에게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그러니 이 법칙에 동조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어서 이곳을 떠나고만 싶을 것이다. 무섭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니 자신을 겁쟁이라고 자책할 이유는 없다. 그저 <혐오스런 마츠코>의 마츠코처럼 환히 웃어 보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이 게임은 결말에 다가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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