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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18. 2022

정해지지 않았기에 의미 있는 순간

<당신얼굴 앞에서>(2021)



“역사는 결국 두 가지 운동의 산물로서 나타난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는 역사의 참여자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로부터 과거로의 역사 기술이다.” -미하일 얌폴스키-


상옥(이혜영)이 지친듯한 표정으로 소파 위에 눕고 나면, 그 위로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표면에 깔린다. 이 목소리는 얼핏 보기에 카메라에 비치는 대상인 상옥(이혜영)이 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이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우리는 상옥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점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 영화는 상옥이 죽고 난 후에 회상의 형태를 취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작중 시점을 그려내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이 영화는 상옥의 미래를 그려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막 ‘선고’를 받은 상옥이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의 한 장면을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양쪽 다 추론에 불과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상옥의 나레이션처럼 “과거도 없고, 내일도 없고. 다만 지금 이 순간만이 천국”이라는 점이다. 


천국의 나날들


무릇 모든 영화가 그렇다지만, 홍상수의 영화를 한 편만 보고서 그에 대한 작가론을 쓸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거의 모든 해에 영화를 만들었고 이를 보고 있노라면 변화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변화’는 과정이다. 즉 변화란 무언가가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음을 바라보는 일을 뜻한다. 한편의 영화가 공개되면 다른 한편의 영화가 촬영에 들어간다는 홍상수의 작품들에서 변화는 극적인 순간이라기보다 분위기 혹은 징후에 더 가깝다. 예컨대 우리가 보는 홍상수는, 파일럿이라기보다 배의 후미에 보이는 물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계속해서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고 우리는 단지 이 배 위에 올라타 미지의 섬, ‘라프텔’을 찾아 나서는 여정에 동참하기만 할 뿐이다. 


홍상수의 26번째 영화인 <당신얼굴 앞에서>(2021)에서 대외적으로 관찰되는 특이점은, 김민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민희는 2015년에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촬영한 후로 줄곧 홍상수의 영화에 함께해왔다. 그래서 영화를 줄곧 보다 보면 김민희가 언제 나올지를 추론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김민희는 끝내 등장하지 않고서,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술자리 장면이 대신 등장한다. 그렇다면 김민희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단순한 바람 잡기에 불과해 보이지만 이 지적은 적어도 예지의 측면에서 의미 있다. 반복을 통해 작가의 인장이 새겨진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홍상수의 최근작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김민희의 등장 그 자체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김민희는 어떠한 인격이라기보다 홍상수 세계의 기호 중 하나이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우리는 안팎에 둘러진 것들을 말끔히 끊어냄과 동시에 이것을 바깥 세계와의 연결고리로 삼을 수 있다. 


홍상수의 영화가 기승전결의 측면이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 수미상관 구조를 이룬다는 점을 알고 있다면, 위의 문제 제기를 이해하기란 쉽다. 홍상수는 시작과 끝을 의도적으로 겹쳐놓음으로써 그 안의 서사를 원형으로 매듭짓는다. 이렇게 가두어진 시간은 영화의 서사를 일종의 연대기(Chronicle)로 만들며, 이 안에서 등장인물들은 신화적 세계의 주인공이 된다. 이 신화적 세계에서 ‘이야기’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서 다른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할 요령으로 직조되었다. 즉 신화는 항상 무언가를 경고하거나, 전달하기 위한 간접적인 방법이었고 이런 측면에서 홍상수의 영화는 그 흐름이 줄곧 표면에만 머무르는 감이 있었다. 이 순환의 세계에서 서사는 담론을 견인하지 않고, 담론은 서사를 조종하지 않는다. 이 둘은 모두 서로 제 갈 길을 감으로써 영화적 시간을 줄곧 표면에 미끄러지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보철이 제거된 시간은 수평적인 것에서 수직적인 것으로 나아가며 시제가 아닌 사건으로 구성되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른바 순간으로 구성된 시간,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의 태세 전환이라 하겠다. 


홍상수의 세계에서 순간은 담론과 서사, 양쪽 모두를 아우른다. 홍상수에게 순간은 서사를 구성하는 단서이기도, 담론을 엮는 고리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홍상수의 영화에 어떤 형식이 생겨남으로써 우리가 그러한 순간을 예측해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위에서 말한 김민희와 술자리의 사례를 제하고서라도 우리는 홍상수의 많은 순간을 이미 알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대화는 많은 정보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데, 이 대화에는 인물의 다음 행선지가 어디인지가 미리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 제시는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해주진 않는다. <당신얼굴>의 도입부에 상옥과 그녀의 동생 정옥(조윤희)이 나누는 대화처럼,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한다는 방향성이 있을 뿐 구체적인 장소는 정해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동의 시간은 양쪽 사이를 이어줌과 동시에 삭제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도 여행의 일부가 되는 ‘과정’이 된다.   


정옥이 좋은 꿈을 꾸었다고 자랑하자 상옥은 궁금한 듯 그녀에게 묻는다. “무슨 꿈을 꾸었니.” 그러자 정옥은 “아직 12시가 되지 않았으니 말해줄 수 없어.”라고 새침을 떤다. (어쩌면 당연한) 영화 안에서 뚜렷하게 제시되지만 정작 그 안에서 내보여지지 않는 12시라는 시간은 두 사람의 산책에서도 ‘아직’이라고만 언급될 뿐, 당최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영화는 의문스러운 12시를 뛰어넘어 곧바로 조카 승원(신석호)의 여자친구가 운영하는 분식집으로 향한다. 이제 곧 밥을 먹어야 하니 ‘조금만’ 달라고 말하는 정옥의 말을 보면 당시는 대략 12시 전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옥이 제시한 건 12시라는 시간 자체가 아니라, 12시라는 순간 이후의 시간이었으므로 이 모호한 식사 장면이 해몽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해주진 않는다. 예컨대 12시는 목적지가 아닌 과정을 시사한다(꿈은 실현되지 않았을 때 비로소 꿈으로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건 정옥의 꿈 내용이 아니라 이러한 문제제기가 만들어가는 영화 전체의 형식이다. 


영화가 문을 닫고 나서는 지점에서 상옥은 다시금 정옥의 집에서 눈을 뜬다. 전화기 너머로는 어제 나누었던 대화가 술김에 한 것이었고, 이를 없던 일로 하자며 사과하는 재원(권해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재원이 하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이 사건은 실제로 있었기 때문에 ‘없었던 것’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즉 발생의 당시에서 발생 이전으로 후퇴하자고 말하는 것에 다름없다. 그런데 발생의 이전, 순간의 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마치 12시 이후에 대한 정옥의 암시를 연상케 한다. 꿈은 말해지지 않을 때 비로소 의미 있다고 말하는 정옥에게 ‘이후’란 해명이 필요한 시간이고, 그러나 말해지지 않음으로써 줄곧 가능성을 품는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재원의 제안은 그녀가 자신의 시한부 인생을 고백하던 지난 저녁의 술자리를 없었던 것으로 만듦으로써, 다시금 그녀의 삶을 가능성으로 만든다. 다른 한편, 재원의 이 말은 영화가 보여주었던 술자리가 그저 꿈만 같은 것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상옥에게 정옥의 꿈이 ‘말해지지 않음으로써’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었다면, 마땅한 목적지 없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상옥의 하루는 ‘정해지지 않았기에’ 비로소 가치 있다. 


생각해보면 상옥은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조차 제대로 말한 적 없다. 이 점이 정옥의 꿈과 연결되는 대목일 것이다. 병에 걸림으로써 생겨나는 삶의 유한함은 일종의 도래할 시간, 아직 말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미래를 과거를 통해 회복하는 ‘순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불안해하는데, 정작 그 미래는 과거의 어느 순간들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첫 번째, 우리의 상처는 항상 과거에 있으며 이는 곧 상처의 불가역성 즉 ‘이미 결정지어진 과거’라는 점 때문이다. 이 점에서 상처는 미래의 불가역성, 즉 도래할 죽음의 필연성과 맞닿으며, 이는 흔히들 ‘기억’이라는 말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회상(Re-call)이라는 단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기억은 과거를 현재에 다시 불러오는 일을 뜻하며, 이 과정에서 과거에 접촉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접촉은 우리가 과거에로의 접근을 허용할 수 있도록 기억을 좌표화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요컨대 기억, 혹은 상처는 미래의 필요에 의해 현재로 불러내어지는 과거인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의 초반부와 후반부에 걸쳐 되풀이되는 표면 위의 나레이션은 단순히 시간의 경과에 관한 단서만을 제공하는 게 아니다. 원형의 형태를 한 이 영화에서 작중 시간은 상옥의 미래, 혹은 과거 둘 중 하나로만 집결되는 게 아니라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현장을 현재로 제시하는 효과가 있다. “지금 이 순간만이 천국”이라는 상옥의 말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 상옥은 영화의 서사가 아니라 표면에서, 등장인물도 관객도 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시간의 구분이 없다는 게 아니라 세계가 사건을 통해 시간의 지층을 나누고, 이를 다시금 주체의 주변부로 재배치한다는 뜻이다.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의 전환이라는 말은 이를 의미한다. 상옥은 스크린 안에 소속되지 않고, 이와 동시에 바깥 세계로 밀려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라는 행성의 주위를 위성처럼 돌 수 있게 된다(예를 들어, 그녀가 방문한 예전 집의 정원은 그녀에게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여러 ‘순간’의 가치란, 특정한 사물에 대한 클로즈업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세계를 기호화(파편화, 그리고 분절)하는 데 있지 않다. 홍상수에게 순간이란 이동의 과정에 있는 우리가 문득 잊고 지내던 것을 재조명하는 효과가 있다. 이를테면 자가용이나 버스, 전철을 탔을 때 이에 소모되는 시간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를 ‘죽은 시간’이라고 부르기까지 하며 이 사이 시간을 죽여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신얼굴>을 보며 우리는 다음처럼 질문해야 한다. 목적지에서 대상을 발견하는 식으로 운영되어 왔던 것이 시간의 경과 안에서 자신의 지난 삶을 발견하는 게 될 때, 이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말처럼, “"난 평생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길 바랐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회고의 형식이 꼭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될 필요는 없다. 회고엔 지향성만이 있을 뿐, 방향성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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