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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11. 2022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대한 경계

<나이트메어 앨리>(2022)



극장가에 개봉하는 영화를 보며 기묘한 생각에 잠기는 일은 꽤 흔하다. 영화가 개봉한 시기의 사회 분위기나 개인적으로 겪은 일들에 의해 영화가 달리 보이는 일 말이다. 예를 들어 <킹메이커>(2022)는 전년 12월 29일에 개봉예정이던 것이 코로나19로 한 달 미뤄졌다. 그 결과 대선시즌에 개봉한 대선을 다루는 영화가 되어 어딘지 모르게 기묘한 사회성을 얻게 되었다. 이 경우, 영화는 현실 안을 이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빙 이미지라 할만한 게 된다. 즉, 영화는 마치 유랑극단처럼 현실을 떠돌다가 어느 순간, 적절한 시기에 우리 앞에 나타나고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런데 이 적절함은 어떤 면에서 운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흐친은 운명을 두고서 “자신에게서 시작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삶을 시작하지 않으며, 삶을 가치론적으로 책임지는 주도자가 되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운명의 한 속성을 보여준다. 운명은 우리가 그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게 한다는 점에서 속박이나 구속의 속성을 띤다.   


<나이트메어 엘리>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기묘해 보이고, 그런 기묘함이 다시금 델 토로의 작품관에 맞닿는다. 먼저, 원작소설을 토대로 각색한 이 영화의 이야기는 베리만의 <나무톱밥과 금속조각>(1953)이나 오즈의 <부초>(1934)처럼 유랑극단을 소재로 했다. 이들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작품이 시작되기 전의 삶, 즉 ‘과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며 그들이 정착하는 곳조차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유랑극단이다. 유랑극단이라는 점에서 이야기에 중심 축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을 엮어주는 건 주인공의 몫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주인공(Protagonist)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가 극단에 머무르게 된 것은 자신의 의지라기보다 거대한 운명의 산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처지였고 때마침 제시된 게 유랑극단이었을 뿐이다. 이는 마치 영화가 보여주는 게 이야기의 시작이 아니라 중간에 불과하다는 점, 어떤 삶의 일부를 들여다볼 뿐이라는 점을 연상케 한다. 바흐친이 문학에서 발견한 운명이란 ‘이미 시작되어버린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유랑극단의 모습과 유사하다. 


침묵처리되어 이미지로만 제시되는 도입부의 쇼트는 이것이 주인공의 과거라는 점을 말해주면서도, 정작 사건의 주된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이 이미지는 영화 전체로 볼 때 영화의 바깥에 자리한 것으로, 운명을 불러모은 영화 외의 사건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영화라는 매체의 기능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인서트 쇼트는 분명 칼라일(브래들리 쿠퍼)이 작중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이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기에 작중 이전에 있었던 일로 여겨진다. 즉 이 ‘사건’은 칼라일이 자기 삶에서 주도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만약 그가 주도자였다면 평생을 함께하게 될 재능인 독심술은 극단 내에서 우연히 맞닥뜨려지지 않았을 테다. 운명이라는 말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에게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불가피하고, 또 가혹하다. 마찬가지로 칼라일이 사람들에게 독심술을 가하는 방식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자신에게 귀결되도록’ 한다는 점에서 가혹하다. 그래서 몰리(루니 마라)는 칼라일의 방식에 반대를 표하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에 따른 반향 또한 받아 마땅할 이유는 없다. 독심술사로 성공한 칼라일이 심령술의 영역에 손을 뻗을 때 이야기를 나누는 노신사의 모습이 이를 말해준다. 전쟁으로 인해 아들을 잃은 노신사에게 유사-심령술을 행하는 칼라일은 노인으로 하여금 그것이 자신의 선택임을 지적하고, 그에 따른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아마 칼라일은 책임을 져야만 그 고통이 끝날 수 있다고, 나에게서 시작된 건 나에게로 끝나야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의 아들이 죽은 건 운명이었다. 운명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결과물을 마주하는 일이며, 노인은 아들에게 전장에 가서 죽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전쟁의 승패가 전략의 산물이라면 인간의 생사는 운명의 산물이며, 아들의 죽음은 노인이 선택한 결과물이 아니었기에 그는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칼라일이 노인의 아들이 죽은 이유를 노인에게 묻고 이를 귀책사유로 지정할 때, 그것은 이제 더는 운명이 아니게 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게 자기 선택의 결과물이 됨으로써, 자신에게 귀결되었던 다른 것들은 사방으로 흩어져버린다. 


운명이 아니라면 슬퍼할 이유도 없다. 아들에 대한 애도는 끝났다. 허나 아들과 자신을 이어주었던 고리가 바로 그 애도라는 점에서, 이후의 삶은 선택되지 않은 미래로 흘러간다. 예컨대 운명은 속박의 일종이기도 하나, 바꾸어 말해 삶을 탄탄하게 고정해주는 동아줄과도 같다. 운명을 벗어난 인간은 삶을 주도할 수 있지만 역으로 그 운명에 정면으로 승부를 겨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잔혹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들을 잃은 노부부는 자살을 택하고야 만다. 정확히 말해 아내가 남편을 죽임으로써 책임을 물리고, 그에 대한 연대책임으로 자신을 죽인다. 이른바 살해 후 자살로 칭해지는 이 사건에서 우리는 인간이 운명에 저항하는 한 가지 방법을 알게 된다. 첫 번째는 자신을 운명에 속박되도록 하는 지점을 살해하는 것이다. 이후 운명에서 풀려난 자신은 그런 운명에 동조했던 자신에 연대책임을 물리고, 그를 죽임으로써 비로소 자유를 맞이한다. 두 번째는 운명에 속박되는 일을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항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마주하고 바르게 맞서 싸우라는 뜻이다. 


영화의 첫 장면이 제시하듯이, 칼라일은 거대한 운명의 한가운데 있기보다는 그 자신의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기인을 대하는 위치에서 자신을 기인으로 대해야 하는 위치로 전락하는 칼라일의 삶은 어떤 면에서 극적인 운명, 문학의 한 알레고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자기 고백으로 드러나는 진실은 극단에서 삶 내내, 그러니까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인서트 쇼트 이후) 영화가 시작된 이후로 자신은 내내 아버지의 그늘에 삼켜 살아왔다는 점이었다. 즉 칼라일에게 삶의 중심축은 아버지였으며, 그런 아버지를 살해한 후 시작된 삶은 늘 그 시점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불과했다. 칼라일이 자신이 머무는 호텔에서 잠시 예전 극단 사람들을 만났을 때 지나(토니 콜렛)가 스쳐 지나가듯 말했던 경고는 칼라일의 이런 태도를 지적한다. 지나는 칼라일에게 타로를 통해 점을 봤다고 말하면서 심령술은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 심령술은 어떤 면에서 칼라일이 아버지의 유령에 속박되어 있음을, 이미 시작되어버린 것을 지적하는 일은 ‘예지’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주어진 운명을 내다보는 일은 엄밀히 말해 예지라 볼 수 없다. 삶의 다음 단계가 정해져 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되진 않을 것이다. 운명은 사람을 계속해서 나아가게만 할 뿐, 자기 삶의 주도자가 되게끔 해주진 않는다. 만약 운명 안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는 부분적으로 제시된 진실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 환영을 겪고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지나가 쇼에서 보여주는 것은 마술의 일종이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마술사로 칭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을 쇼호스트로 여기며 그러한 쇼의 법칙, 보여주는 것 이상을 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이는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이는 정신분석가 리터(케이트 블란쳇)와 칼라일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칼라일이 리터를 도발한 후로 맺어진 관계가 칼라일을 나락을 빠트리는 일을 떠올려보자. 겉으로 보여지는 것 이상을 간섭했던 칼라일은 리터의 원한을 산다. 그녀는 누구보다 ‘보여지는 것’에 대해 잘 알지만, 자신의 치부를 건드린 칼라일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운다. 


정신분석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이것이 사이비 취급을 받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 곱지 않은 시선은 정신분석이 환자가 보여주는 것 사이에 분석가의 환상을 투영한다는 점에서 귀인한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에 대한 평가도 그와 비슷했다는 점이다. 영화는 개개인에게 환상을 보여주는 매체로 인식되었고 그에 대한 정신치료의 효과도 부각되었다. 그렇다면 리터와 칼라일의 관계에서 영화 매체의 면모를 떠올리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리타처럼 말이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칼라일이 도망친 기인을 찾으러 어트랙션에 진입하는 장면이 있는데, 어떤 면에서 이는 거닝이 말하던 어트랙션 영화를 연상케 한다. 현실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환상에 빠진 존재인 기인을 발견한 칼라일은 그에게서 공격당한다. 말하자면 칼라일은 환상에게 공격당하는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거닝이 영화의 반대파들에게 ‘어트랙션’이라는 단서를 제공하면서 반박했던 대목이기도 하다. 영화는 관객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단지 영화의 일부로 전락해버리는 관객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칼라일이 마지막에 가서야 기인으로 전락해버리는 일은 그러한 흡수(absorption)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정신분석가가 경계해야 하는 건 자신의 욕망을 내담자에게서 발견하는 일이라고 한다. 자신의 욕망이 자신에게서 발견되지 않고 타인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면 이제 그것은 환상이 된다. 칼라일이 독심술을 대하는 태도는 그런 점에서 우수 정신분석가의 표본인 것처럼 보인다. 정신분석가는 타인의 외부에 서 있으면서도 그 안으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 즉 분석가는 세계의 외부와 내부가 맞닿는 신체의 경계, 표면에 머물러야 하며 만약 선을 넘게 될 경우에는 내부에 갇히는 상황, ‘광인’이 된다. 그러니 정신분석가란 큰 틀에서 보았을 때 타로점을 보던 지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들 사이에서 환상을 발견하고 또 그걸 응용하는 일은 기인(Geek)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말하자면 말라일이 독심술을 넘어 강령술과 같은 영역에 손을 대기 시작할 때, 그는 단순한 비평가를 넘어 필리아의 영역에 빠져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현대에 와서 다소 특이한 사람을 일컫는 말 정도로 의미가 약화되었지만, 작중 배경이 1940년대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기인이라는 말은 실질적으로 광인이라는 말을 대체한다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푸코가 광인을 두고서 배에 빗대었던 점을 떠올려보자. 이 광인들은 현실을 구성하는 사실 사이에 자리 잡지 못하고 그 사이의 환상으로 자리 잡은, 결코 현실의 영역에 들어와서는 안 될 것들이다. 즉 환상은 현실에 보여지는 것들 사이를 채우는 물질이자 과정이지만, 그렇기에 현실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작중 광인의 역할은 사람들의 그런 환상을 채워주는 것이었던 셈이다. 칼라일이 지나와 그의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들을 꽤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나는 자신이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위로해주는 일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넘어야 할 선을 넘지 않는다. 그녀의 타로가 말해주듯, 운명이라는 건 예지의 영역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속하니 말이다. 바꾸어 말해 이 ‘보여지는 것’은 드러냄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생성의 영역에 있지 않다. 


타로점 솜씨를 보면 어쩌면 그녀에게 정말로 초능력이 있었는지도 모를 노릇이지만, 중요한 건 사실 여부가 아니다. 타로점이 말해주는 사실은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점이며 이는 대상에 관한 외적 정보를 모호하게 뭉뚱그림으로써 개개인의 마음에 덫을 놓는 독심술의 원리에 부합한다. 독심술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을 단서 삼는 것이지 아예 없는 정보를 만들어내진 않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아예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토대로 환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개연성을 얻는다. 지나가 칼라일에게 말해준 것은 바로 이 작가정신, ‘개연성’을 잃게 될 때 이야기는 환상으로 변모한다는 점이다. 영화 초반에 칼라일에게 독심술을 가르칠 때 지나가 하는 말을 보면 그녀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나는 사람들의 겉모습을 통해서만 그 속내를 유추해야지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상을 파악하려 들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 선을 넘는 순간 쇼호스트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게 아닌, 새로 만들어내는 환영술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즉 독심술을 구성하는 원리는 크게 두 가지다. 1)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2) 하지만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게끔 한다. 자신의 신체를 옥죄는 광인의 슬픔은 자신에게 세계가 거짓된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과 그런 세계 사이에서 자기만의 진실을 발견해낸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환영이 스스로에게 거짓을 강요할 때, 주체는 정신분열을 겪고서 기인의 처지로 추락하고야 만다. 요컨대 아버지를 닮기 싫어하던 아들이 술을 마시고, 어느덧 아버지를 닮아가는 과정에는 오이디푸스라는 신화적 운명만이 있는 게 아니다. 정해진 운명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는 영화 속 이야기에는 보여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려던 이의 실패가 담겨있다. 혹자는 운명이라는 말에 개연성이란 적용될 수 없다고 비판할지도 모르지만, 개연성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자신에게 보여지는 상황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자신에게서 시작되지 않은 것”에 해당한다. 그러니 어쩌면 <나이트메어>는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대한 경계, 비평이든 삶이든 어디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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