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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04. 2022

파친코의 데드 크로스 라인이 의미하는 것


각본가 수 휴에 따르면, 추후 반응이 좋으면 차기 시즌이 제작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점을 감안하여, 본문의 <파친코>는 시즌1의 전반부를 다루고 있음을 명시해둔다. 


<파친코>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 듯 보인다. 하나는 선자가 삶을 살아오며 겪은 근현대 한국이고, 다른 하나는 선자의 후손들(아들 모자수와 손자 솔로몬)이 겪는 일본 사회의 일들이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이 두 개의 파트는 따로 분리해 볼 수 없을 만큼 면밀히 엮인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선자의 행적을 보여주는 [파트1]은 노년의 선자(윤여정)와 유년기의 선자(김민하)를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파친코>의 이야기에 방점을 찍는다. 이 방점은 <파친코>가 선자에서 시작해 선자에서 끝나리라는 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공간을 독자에게 제시함과 동시에, 이 공간이 언젠가는 끝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파트1]의 마지막인 4화에서 현재의 선자가 먹는 쌀밥은 과거의 선자가 먹는 쌀밥과 오버랩된다. 이 오버랩은 표면적으로 과거 파트와 현재 파트를 한 자리에 겹쳐볼 수 있게 하는 응축의 지점으로 작동하지만, 한편으로는 1화에서 4화에 걸친 [파트1]의 여정을 터트리는 폭로의 장이기도 하다. 이전 화에서 땅을 팔라고 설득하러 간 솔로몬(진하)이 선자와 함께 집주인과 식사를 하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선자가 쌀 맛이 다르다고 감탄하자 집주인은 이 쌀의 출처가 한국임을 말해준다. 그녀는 “자라고 나란 곳이 다른 쌀은 확실히 맛이 다르다”고 말하면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솔로몬을 타박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농경 사회의 주식이었던 쌀과 그런 쌀을 주식으로 먹지 못했던 처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집주인이 지적하듯, 식민지 조선에서 쌀은 주요 관리 품목으로 지정되어 함부로 소비하거나 반출할 수 없는 공물이었다. 이는 즉 쌀이 ‘가난’과 ‘지배’라는 두 개의 축이 교차하는 방점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자신의 처우를 마음대로 소비하지도, 그러한 처지에서 반출되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삶엔 발전이 없어 보이며, <파친코>의 두 갈래 이야기는 이러한 두 개 축을 서로 담당하는 듯 보인다. 


가난하면서도 지배당하지 않는 이가 있는 한편, 지배하면서도 가난에 처한 이가 있을 수 있다. 현재 파트라고 할 수 있는 노년기의 선자와 그녀의 아들과 손자는 가난에서 벗어났지만 과거의 기억에 지배당한 상태다. 솔로몬이 계약을 두고 벌이는 대화에서도 언급되듯, 솔로몬은 선자에게 “과거는 잊어버려도 좋지 않으냐.”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 이제 막 일본이 미국을 경제적으로 앞지르리라는 점이 풍문처럼 떠도는 시대에 솔로몬의 말은 미래를 구상하는 발전적 사고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 과거 파트라고 할 수 있는 [파트1]의 이야기는 가난하지만 아직 무언가에 지배당하지는 않은 순수로 구성되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이미 지배당한 상태이기에 그런 환경 위에서 꿈꾸는 순수는 사실상의 비자유로 풀이된다. 4화에서 선자가 그녀의 남편 이삭(노상현)을 만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기 전, 이들의 결혼 소식을 들은 동네 친구들이 빨래터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친구 A가 자신도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가고 싶다는 말을 하자 친구 B가 분위기에 물을 끼얹으며 답한다. “아무것도 없는 네 수준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밖에 못 만난다. 애를 낳아 산다고 해도 물려줄 수 있는 건 가난밖에 없다.” 이들의 발언에서 우리는 가난에 대한 대물림의 의식이 실질적으로는 그러한 의식으로부터의 지배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에겐 부잣집의 사람들처럼 정해진 혼사, 성공 가도의 앞길 같은 게 없지만 오히려 바로 그 점이 비애감을 낳는다. 자신의 삶을 제약하는 것은 개개인이 처한 환경이나 의지가 아닌, 그보다 더 큰 방향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빨래터에서의 대화를 보면 그녀들은 자신의 삶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예측은 그들에게 주어진 세계가 너무나 열려있기에 되려 그들을 속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너무나 속박되어 있기에 주어진 세계에서 길을 잃게 하는 동조의식을 통해 작동한다. 


바로 이 점이 [파트1]을 가르는 데드 크로스 라인이다. 일본이 미국을 경제적으로 앞지르리라는 점이 기정사실이었던(하지만 실현되지 못한) 1980년대에 솔로몬의 말은 성공신화를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를 잊고 현재에 몰두하자는 말은 현재를 성실히 하는 게 곧 미래로 가는 발판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1930년대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굳건해지던 시기였으며, 현재를 성실히 사는 일은 미래를 가정해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요약하자면 <파친코>의 과거와 현재는 각기 다른 방향의 미래를 바라본다. 식민지 조선에서 현재를 산다(living)는 게 과거를 사는(buying) 일이었다면, 현대 일본에서 현재를 산다(buying)는 건 미래를 사는(living) 일이었다. 이 드라마의 [파트1]이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두 개 방향의 시선과 그 시선이 가로지르는 데드 크로스 라인이다. 젊은 선자와 노년의 선자를 두 방향에서 보여주던 드라마는 4화에서 정확하게 둘 사이를 가로지른다. 쌀을 두고 오버랩되는 양측의 서사는 계약이 진행되는 솔로몬의 직장 회의실로 이어진다. 집주인이 아들과 딸을 데리고 참석한 자리에서 은행 간부들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환대한다. 그러나 회사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그녀는 계약서에 서명하기를 뜸들이다가 솔로몬에게 한국말로 묻는다. 솔로몬이 그 물음에 답하자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며, 밖에서 대기하던 샴페인 잔은 끝내 회의장에 올라오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10억 엔이라는 미래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종의 클리나멘이다. 바로 이 대목에 <파친코>의 데드 크로스 라인이 갖는 의미가 있다. 이 클리나멘은 산다는 것에 저항해보려는 움직임이다. 빨래터에서 여인들이 나누던 미래, 혹은 해방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식민지 조선에서의 삶 말이다.  


선자는 한수를 외면하고 이삭과 결혼한다. 그러자 한수(이민호)는 선자를 따로 불러 조용히 말한다. “오늘 이날을 후회하게 될 거야. 일본에서의 삶은 상상도 못할 만큼 고달플 테니까.” 한수의 이 말은 그 자신이 진정으로 고달픈 삶을 겪었다는 점에서 진정성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성공을 위해 결혼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한 장면을 구성하기도 한다. 정해진 미래에 저항하는 방법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일이라는 점이 그렇다. 한수는 아니지만, 친일파의 대표적인 논리 중 하나가 “이미 망한 나라에서 국적은 사치일 뿐이다.”라는 점이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한수가 선자의 선택을 ‘갑갑하다’고 표현하는 일은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느냐.”라는 책임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과거가 이미 망해버렸는데 어찌 그에 목을 매느냐.”라는 보다 현실적인 맥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산다는 것에의 저항은 어떤 의미에서 갑갑한 것일 수도 있다. 역사 속 인물의 연대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국제시장>의 사례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이들 영화가 그려내는 역사가 인물에게 하나의 거대한 숙명으로 다가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시간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터전이기도 하며, 이 무대 위를 살아가는 개개인에게 과거란 바로 그러한 점에서 현재이기도 하다. 이 맥락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바로 삶에 대한 저항이다. 선자의 어머니가 누누이 강조하는 여자 아닌 아내, 엄마의 역할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개인적 측면에서 정해진 미래, 즉 ‘과거’로서 구축된 현재였다면 이런 상황은 식민지 조선이 처한 것과도 유사하다. 자이니치를 다루는 이 드라마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모든 상황에서 그들 입장에 선행한다고 말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선자의 선택은 전근대적 가치관에 얽매인다기보다는 뿌리 없이는 가지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지는 뿌리가 될 수 있지만, 가지는 뿌리가 없으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본 오사카로 가서도 그녀는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에 대한 증거로 선자는 노년이 된 현재에도 여전히 한국어를 하며, 손자인 솔로몬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쳤다. 한편으로, 그녀의 자식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이름을 지녔음에도 외부의 시선은 그들을 여전한 한국인으로 바라본다. 아무리 일본 사회에 동화된다 한들 한국인의 피가 섞인 이상 그들은 일본인이 될 수 없다. 물론 이 논제가 이민 사회에 대한 하나의 부정적 관점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체성의 형성은 내부 세계의 형성이 아니라 외부 세계로부터의 배척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런 부정은 틀린 것이다. 아이가 주체 개념을 깨닫는 일이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으로 인식할 무렵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은 일본 사회로부터의 차별을 통해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자이니치는 민족이나 국적이라기보다는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젠더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이런 상황은 여자로서, 또는 주체로서 선자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로 살아가야만 하는 선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선자는 자신(주체)을 잃어야만 하는 처지와 자신(국적)을 잃지 말아야 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해있다. 선자는 어머니가 됨으로써 과거의 자신이 속해있던 한국과 이별해야만 한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지켜내야 하며, 안타깝게도 이 명령은 어머니가 강조했던 여자의 삶에 후행하는 듯 보인다. 집주인이 선자를 두고서 솔로몬에게 말한 ‘풍파’는 이런 모순을 뜻한다. 여자의 삶과 한국인의 삶은 하나로 이어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거나, 그만큼 힘들다고 보는 게 옳을 테다. 그러므로 선자의 삶이 이주민 1세대가 아닌, 여자의 삶에서 바라보아지는 것은 해석의 도리상 큰 문제가 없다. 어떤 면에서 선자가 자녀와 손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반사되어 올 지면이 필요해서였을 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개개인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게 과거이자 현재인 삶의 터전이라면 이들이 낯선 나라로 이주했을 때 그동안의 삶은 여전히 유효한가? 만약 우리가 뿌리에 중점을 둔다면 이주라는 상황은 화분의 분갈이처럼 뿌리를 온전히 유지하는 게 중요한 처신이 된다. 반면 그것이 일종의 리좀이라면 주체가 마주한 세계는 역으로 그들 자신의 뿌리로 형성될 수 있다. 작중에서 이런 사실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은 유골함을 안고 고국에 도착한 선자가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오사카로 떠나는 과거 장면과 한국에 도착한 현재 장면을 나란히 배열할 때, 우리는 과거에는 울지 않던 선자가 현재에는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편집 구도상 마치 선자가 그동안에 있었던 울음을 모두 터트리는 듯 보이는 이 장면은 그곳이 바로 육지와 바다가 맞닿는 곳임을 상기하게끔 한다. 육지와 바다 사이에는 경계가 있고, 이 경계에 서 있는 정체성이 바로 선자의 위치라고 가정해보면 우리는 파도가 밀어내는 경계가 과연 어디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파도는 육지 방향으로 밀려나는 것일까, 아니면 육지를 바다로 밀어내는 것일까? 이는 자신의 자녀가 아님에도 선자를 받아들인 이삭의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민족 개념이 혈연을 따른다는 점을 떠올려볼 때, 자신의 혈연이 아님에도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이삭의 태도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주체일 뿐인 나 자신을 긍정하는 일처럼 보인다. 이런 이삭의 태도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선자가 바닷가에서 터트린 눈물이 고향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르게 행동한다.” 선자의 눈물은 그러한 모순을 통해 작동하던 삶의 원리가 붕괴하는 데드 크로스 라인의 순간을 보여준다. 선자는 자신의 모습을 낯선 것으로 재발견해야만 그러한 과거에 자신을 포함시킬 수 있었다. 


선자에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자신의 노년기와 그에 따른 죽음과의 밀접한 관계에만 관계뿐만 아니라 그러한 횡단의 순간 전체를 자극하는 트라우마적 기제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트1]의 해당 쇼트는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를 부분적으로 연상케 하는 면이 있는데, 여기에만 집중하면 <파친코>는 이민자의 삶에만 국한되어 버린다. 제목인 파친코를 보면 자이니치 소재를 중심으로 다룬다는 걸 잘 알 수 있기에 이민자의 삶에 중점을 두는 것도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파트1]을 보면 <파친코>의 이야기에는 데드 크로스 라인이라는 대하락의 순간이 담겨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4화에서 드라마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선상 노래 장면, 회사 밖으로 뛰쳐나와 밴드 앞을 서성이는 솔로몬의 모습 등은 배치상으로나 이야기상으로나 모두 폭발적이다. 1.2.3.7화와 4.5.6.8화가 각각 코고 나다와 저스틴 전으로 나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4화의 불균질함은 감독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추측해볼 수도 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런 분배의 이유는 이야기상으로 해당 감독을 배치하는 게 더 맞거나, 혹은 촬영분량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4화는 [파트1]을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그동안의 이야기가 폭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한 이 드라마는 한편의 균일한 농도를 지닌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여러 화에 걸쳐 그 시간의 무게를 짊어졌다는 점에서 이미 그 불균질함에 대한 합당함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이 시각으로 보면 4화의 불균질한 이야기 밀도는 재일교포 3세대에 해당하는 솔로몬의 안정된 삶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폭발하는 서사는 이야기에 저항하는 것, 클리나멘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데드 크로스 라인은 대공황이 아닌 대폭발의 순간일 것이다. 폭발은 불확정성이 질서를 이어가는 하나의 사건이자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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