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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7. 2022

이건 영화가 아니라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콜럼버스>(2018)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더 멋지게 느껴지는 영화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소위 ‘일상’이라 말하는 것들을 다루는 이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 그 자체로 장르를 이룬 것 같기도 하다. 이른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장르. 이는 일반적으로 영화가 이야기를 만들고, 끌어가는 과정에서 줄곧 사건을 구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다. 그런데 사건이란 무엇인가? 문학에서 사건이라는 것은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기폭제에 해당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건이 없다는 말은 이야기가 없거나 혹은 뚜렷한 형태로 관측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진 재미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진다. 


그러나 영화 매체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릴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문학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모두 의도적인 반면, 영화에서의 사건이란 의도적이지 않은 포착의 순간이거나 혹은 그런 듯 보이게 하는 촬영 기술이다. 결국 영화에서의 사건이란 항상 무언가에만 의존하지는 않은 상태로 벌어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콜럼버스>는 “이건 영화가 아니라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만약 영화라면 의도적이지 않게 사건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아니기에, 이들이 마주한 사건은 다분히 의도적인 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위의 대사는 “괜찮을 거다.”라는 뉘앙스로 읽히기보단 “인과가 있고, 그 책임이 마땅히 자신에게 있다”는 점에 더 가깝다. 


코고 나다의 <콜럼버스>에 관한 내 생각은, 그가 오즈 야스지로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오마주가 사건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영화들 사이의 유사한 몇몇 쇼트를 지적하는 것이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케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의 거주지는 오즈의 <안녕하세요>에서 아이들이 거주하는 집터와 주변 장소를 닮았다. 그리고 이 오마주는 ‘안녕하세요’라는 소통의 시도가 거주구역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에 사용된다. 영화에서 케이시는 고독한 삶을 보내지만, 거주구를 벗어나 진(존 조)을 만나러 가면서 비로소 소통의 물꼬를 튼다. 다른 한편으로는 책상 위에 올려진 물병이라던가 하는 대목도 오즈의 정경에 관한 오마주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짧은 지적들보다 훨씬 중요하고 유효하게 말해져야 하는 건, 오즈 영화의 건축물에 관한 지적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콜럼버스>는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들은 아들이 콜럼버스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플롯은 오즈 영화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부모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오즈의 영화에는 극의 시작부터 누군가가 죽는 것이 묘사된 바가 없다. 그래서 플롯으로 오즈를 연상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무리이거나 혹은 너무 오즈에 치중된 해석이다. 되려 <콜럼버스>에는 오즈의 영화에서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몇몇 건축과 그에 따른 응용의 방식이 더 잘 드러난다. 이를 지적하기 위해 나는 <콜럼버스>의 결말지점부터 몇몇 장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처음으로, 영화의 거의 끝자락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진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는 카메라 사용이 있다. 이 구도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을 가져온 것이며, 두 영화의 차이는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남았다는 점, 하지만 여기서는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남았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유의미하게 적은 걸 떠올려본다면 우리는 <동경 이야기>에서 부부간의 동반자 구도가 <콜럼버스>에서 부자관계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쇼트의 전 지점에서는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에서 묘사된 장례식장의 굴뚝을 끌고 왔다는 점이다. <고하야가>는 말썽꾸러기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일을 다뤘고, 이 갑작스러움은 갈색풍의 벽돌로 세워진 건축 구조물을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는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콜럼버스>도 그와 같은 구도를 쓴다. 


<고하야가>에 담긴 이야기는 오즈의 중~후기 영화에서 자식을 떠나보내는 몇몇 슬픔들에 관한 구도를 다른 방식으로 가져온 것이다. 아버지가 갑자기 죽고, 장례식을 하는 걸로 끝나는 이 영화는 부모에 대한 애틋함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오즈의 통속극과는 다르다. 오즈의 예외적 영화로 취급되는 <동경의 황혼>에서도 묘사되는 가족관계는 <고하야가>에서 그냥 생략되고야 만다. 그렇다면 오즈는 <고하야가>에서 무엇을 노린 걸까. <고하야가>는 슬픔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아무런 일도 없었기에 재미없는 게 일상이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관계 또한 일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코고 나다의 오즈에 관한 이해도가 높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알 수 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관계는 오즈의 초기 무성영화 리메이크작 <부초>에서 발견된다. 이를 언급하기 전에 <콜럼버스>에서 진이 창밖을 바라보는 구도 이전의 필로우 숏 중, 빨간 배색을 한 현수교를 논하고 싶다. 영화에서 이 현수교는 초반부에 진이 콜럼버스로 건너올 때 한번, 진이 케이시를 만나기 전에 멀리 보이는 전경으로 한번 제시된다. 즉 이 현수교는 진이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온다는 점에서 경계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문턱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구도의 상징물이 <부초>에도 있다. <부초>는 유랑극단으로 떠돌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을 찾아오는 이야기다. 그를 삼촌으로 알고 있던 아들은 아버지의 정체를 알고 충격에 휩싸인다. 이때, 두 사람이 낚시를 하며 친해지던 과정에서 보여지던 등대는 그 등대를 바라볼 수 있는 집 안에 놓인 맥주병에 등치된다. 



밖에서는 커보이다가 안에서는 작아 보이는 것. 이 원근감의 사용은 오히려 아버지의 집에 해당하는 콜럼버스에 들어왔을 때 되려 아버지를 더 잘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모습을 묘사한다. 코고 나다의 이런 묘사는 <부초>에서 오즈가 등대와 맥주병의 등치를 통해 밖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이를 토대로 안과 밖을 교환하는 방법론과 거진 유사해 보인다. 아니, 유사하다기보다는 오마주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부초>는 거리문제에 있어서 같은 위치에서 인물의 성격만 바뀔 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리버스 쇼트로도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마주하고 싶었던 사람이 정작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아들의 다음 행동은 무엇이 될 것인가. 이를 위해 오즈는 맥주병 옆으로 등대를 배치한다. 오즈 특유의 원근감이 발휘되는 이 쇼트는 멀리 있는 것이 가까이 있는 것과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쇼트와 리버스 쇼트 간의 거리감을 지워버린다. 


그런데 거리가 없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평면적인 세계에선 이야기라던가 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일상만이 늘어질 뿐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 가족관계는 평면적이기에 일상이 될 수 있기도 하다. 오즈가 정경을 통해 관계를 말하는 이 방식은 <콜럼버스>가 구체적으로 가족 관계를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이 될 수 있다. 평면은 배경이 곧 표면이 된다는 점에서 인물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지 않는 방법론이다. 그래서 평면은 구태여 무언가를 말하거나 혹은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공간 안에서 이미 인물의 관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평면이라는 말의 사용은 다소 불분명하다고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 경우, 평면이라는 용어는 영화에서 주된 시선의 흐름이 세로 폭이 아니라 가로 폭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회화적 혹은 조형적이라는 말과 유사한 맥락임을 지적해두고 싶다. 


우리가 알다시피 오즈 영화에서 가로폭은 카메라의 주된 사용법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코고 나다에 오즈 야스지로를 끌고 오고 싶지는 않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몇몇 이들이 지적하듯 ‘타티’적이라 할 수 있는 건축의 사용이다. 먼저, 건축은 도시의 풍경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형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하자. 건축은 그 설계 목적에 따라 사람들의 삶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도심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점유하는 구성원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건축은 가족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목적과 위치를 닮았다. 가령 아버지란 아버지의 의무를 다하는 과정에서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관계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제하더라도 딱 잘라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데, 무엇보다 건축의 핵심 주제는 거기에 발이 달렸진 않다는 점에 있다.


쉽게 말해 건축물은 한번 지어진 이상 다른 곳으로 이동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건축을 배경 삼을 때, 이동하는 건 그 안의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 오즈 영화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바로 이러한 건축을 통해 집의 구조를 관객에게 상기시키고, 이를 다시금 가족의 고정된 위치를 말해주는 데 사용된다는 점이었다. 마찬가지로 <콜럼버스>의 첫 장면에서 케이시, 중반에서 진이 건축물의 공간 사이를 거닐 때 카메라는 인물이 아니라 건축물에 더 집중한다. 여기서 카메라는 변하지 않는 것 안에서 변해갈 수 있는 것을 포착하고 있고, 이러한 카메라의 사용법은 가족이라는 관계가 그렇게 재미있지만은 않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해준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아무런 일도 아니라서, 되려 영화가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세간에는 오즈가 유언으로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말했다는 풍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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