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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03. 2022

종(구)속을 돌파하는 여러 번역의 방법

<헤어질 결심>(2022)



<헤어질 결심>을 두고 히치콕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남자가 낯선 여자를 만나 파멸에 이르면서도 사랑을 한다는 것. <현기증>의 주된 내러티브이면서도 ‘안개’라는 묘한 기후를 공유하는 두 영화 사이에서 우리는 로맨스를 본다. 하지만 이 인용은 정당한 것일까. 이런 인용에서 유독 언급되지 않는 건 안개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다. 히치콕의 <현기증>의 중요한 대목, 안개가 나타나며 여인의 정체성이 탈바꿈하는 중요한 장면을 단지 ‘안개’라는 외견만으로 끌고 와버린다면, 이는 꽤 속상한 일이다. <헤어질 결심>에서 안개라는 말은 메타포라기보단 말 그대로의 직언에 가깝기 때문이다. ‘안개’라는 건 온도의 높낮이 차에 따라 벌어지는 수증기의 응결 현상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안개는 겉으로 보기에 흐릿해서 그 형체가 없는 것 같지만, 갖고 있던 열에너지를 공기 중으로 빼앗기면서 자신의 형체를 더 단단한 밀도로 바꾼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단단한 외견을 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가령 <현기증>의 무대인 샌프란시스코는 ‘안개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안개에 최적화된 지형을 갖고 있다. 태평양 중앙에서 불어오는 따듯하고 습한 공기가 차가운 온도의 캘리포니아 바다를 만나 형성된 이 안개는 금문교와 같은 지형에 신비로움을 더한다. 다른 한편, <헤어질 결심>의 무대로 설정된 가상의 도시 이포는 부산과 인접했다는 점에서, 원전이 지어진 도시라는 점에서 고리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불륜이 일어나는 도시라는 점에서 그렇게 설정되어야만 했겠지만, 원전 주변에 안개가 자욱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만큼은 결코 가상이 아니다. 원전은 많은 양의 냉각수를 요구하고,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온도 차는 소위 말하는 물보라 ‘안개’를 형성한다. 그래서 아무런 맥락 없이 등장해오는 <현기증>의 안개보다는 이포의 그것이 더 현실적이다. 허나 한편으로는 이포의 안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기후라는 점을 지적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기후,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이 각각 산과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산과 바다는 지형적으로 만들어내는 기후가 각각 다르다. 산에서의 안개는 습한 바람이 산에 올라가던 중에 식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반면 바다에서의 안개는 바다 방향에서의 습한 바람이 비교적 낮은 온도의 육지에 닿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를 토대로 서래를 ‘낮은 온도’로, 해준을 ‘높은 온도’로 규정한다면 서래가 말하는 사랑은 응결 현상에 가깝게 보인다. 사랑은 처음부터 공기 중에 존재하지만 그 형체를 드러내려면 어떤 형태로든 기후를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렇다면 해준이 자신을 두고서 ‘붕괴’되어가는 중이라고 말했던 게 왜 서래에게 매력적인 수사였는지를 떠올리기란 쉽다. 안개가 붕괴를 드러내는 어떤 기후적 배경이라면 안개라는 것은 결국 해준의 아내가 말하듯 ‘우울하고 삭막한’ 환경이라는 점에서 지양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해준은 서래를 만나 우울하고 삭막해졌고, 사랑은 응결되었으며, 서래는 제 형체를 잃어가는 해준을 위해 다시금 바다로 돌아간다. 이른바 육풍에서 해풍으로, 이 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열역학적이다.


열역학 제2법칙, <헤어질 결심>의 안개는 단순한 인용이라기보다는 무대적 조형에 더 가깝다. 뮤지컬 같은 연극 무대에서 사용되는 짧은 폭죽이나 물보라 안개처럼 말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안개가 자연환경이라면 이포의 안개는 인간이 만들어낸 환경이다. 어쩌면 이 부분이야말로 <헤어질 결심>의 내러티브에 관한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서래는 해준이 자신을 두고서 했던 ‘붕괴’라는 단어에 꽂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그녀는 휴대전화에서 붕괴라는 단어의 한국어 뜻을 검색해본다. 이때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단어의 뜻은 해준 스스로가 자신을 성실한 형사에서 도덕적으로 해이한 사람으로 정의하는 데 사용된다. 헌데 해준이 잘못된 번역으로 서래의 말을 오역했던 것처럼, 서래가 해준의 이 말을 오역할 가능성은 없는 걸까. 오역이라는 말에는 문맥이 잘못 전달된다는 점에서 붕괴라는 단어의 뜻이 부분적으로 담겨있다. 전달하는 과정에서, 원본이 무너지고 깨어진다는 뜻이다.


원전은 핵분열이라는 붕괴의 힘을 사용한다.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원전 주위의 안개가 기본적으로 붕괴 과정에서 발산되는 열로 물을 끓일 때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붕괴는 단순한 감정표현에만 불과한 건 아니다. 만약 서래가 해준의 붕괴로 인해 그의 사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면, 이는 곧 붕괴의 과정이 사랑이라는 열을 발산한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감정의 근원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제 형체를 무너트림으로써 발산하는 과정에 있다. 그래서 이는 벤야민이 말하는 번역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영화에서 ‘마음’이라는 말을 ‘심장’으로 오역한 번역기의 사례를 떠올려보자. 해준은 서래의 이 말을 듣고서 심장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서래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단일한 뜻을 찾아 헤매지만 정작 마음이라는 말은 심장으로 오역되고야 만다. 그렇다면 여기서 ‘단일’하다는 말은 뜻이 하나라는 게 아니라, 그 뜻이 가진 형체가 하나라는 점에서 다양한 문맥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빌론 신화에 따르면 언어는 최초에 단일했지만 후에 하나를 뜻하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고 한다. 헌데 단일한 사랑이란 있을 수 있을까. 사랑을 표현하는 간접적인 방식 중에 썸이라는 게 왜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번역은 서로의 문맥을 맞대어 비교해보는 일로도 생각된다. 수사라는 행위가 늘 언어의 정확한 지점을 건드려야 한다면, 수사를 사용하는 일은 언어의 주변부를 서성여야만 가능하고, 그런데 또 그게 독자들에게 통한다. 그렇다면 오역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일 또한, 전혀 이상한 게 아닐 것이다. 그리고 사랑 또한 다양한 뜻을 내포한다면, <헤어질 결심>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은 전달의 한 방법일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번역이라는 장치는 서로 다른 이들의 언어를 나타내는 와중에 그런 번역의 불가능성을 말한다(한창욱).


서래는 해준을 사랑하기 위해 사랑한다는 말의 속뜻을 숨기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숨기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는지도 숨긴다. 가령 해준이 서래를 사랑하는 방식이 자신을 붕괴시키는 것이라면, 서래가 해준을 사랑하는 방식도 자신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서로가 자신의 신념, 혹은 구성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 중요하게 나온다. 해준에게는 젠틀한 삶을 제공해주는 것들, 구두라던가 애플워치라던가 하는 구성품들이 2부로 가면 운동화와 일반시계로 바뀐다. 이런 표현에서 우리는 해준이 말하는 붕괴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런데 1부에서 2부로 영화가 진행될 때 해준은 아내가 거주하는 안개가 자욱한 도시로 돌아온다. 원래 일하던 곳과 별반 다르지 않게 바다가 보이는 지역이지만 이곳은 유독 안개로 자욱하다. 그리고 이는 위에서 말했듯이 이곳이 핵분열을 하는 장소라서, 다시 말하자면 ‘붕괴’를 통한 ‘사랑’을 발산하는 장소이기 때문이


하지만 이 경우, 사랑은 열에너지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사랑은 필연적으로 식어갈 수밖에 없으며 그 에너지의 총량이 비슷해 보일 수는 있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꺼질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는 다시금 자연환경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시나리오상에서 1부와 2부로 나뉘어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2부는 1부에서 13개월이 지난 어느 날을 배경으로 한다. 바꾸어 말하면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고, 그래서 이들이 다시 마주했을 때 복장은 크게 변한 게 없다. 같은 이유로 두 도시에서 안개는 계절과 같은 환경에 따른 영향 없이, 무대를 강조하는 효과로만 남을 수 있다. 바꾸어 말해 1부와 2부 사이에서 바뀐 건 계절이 아니라 배경이고, ‘안개’는 그런 배경을 통해 이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안개는 지열의 고저차를 통해 열에너지가 허공에 흩뿌려짐에 따라 싸늘히 식어가고, 붕괴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안갯속에서 <헤어질 결심>이란 단순한 사랑 이상의 무언가와의 이별을 뜻한다. 두 남녀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더 큰 무언가에 종속되어있고, 사랑은 이러한 종(구)속을 돌파하는 여러 번역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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