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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08. 2022

영화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탑건: 매버릭>



2023년도 한국의 최저임금은 9,620원대로 결정되었다. 그와 동시에 2022년도의 극장가는 영화푯값을 15,000원으로 인상했다. 1시간 30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영화 값이 된 셈인데, 공교롭게도 이는 영화의 표준 상영 시간과 동일하다. 그래서 문득 든 생각은 “어쩌면 영화는 일하는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는 일이 하나의 노동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가정해보자. 일하기에 바쁜 이들이 자신의 남은 시간을 영화관에서 보낼 확률은 적어질 것이다. 영화를 예술이 아니라 남는 시간을 때울 무언가로만 여길 때, 영화는 삶의 바깥으로 밀려나고야 만다.

더군다나 영화가 예전처럼 저렴한 문화생활이 아니게 된다면, 혹은 주변인과의 대화를 위해 영화를 ‘본다’는 원초적인 행동을 수행하기 위함이라면, 영화관에 가는 일은 점점 더 줄어들 테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 짧게 커팅된 요약본만으로도 이야기에 참여하는 일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최저임금에서 연상해볼 때, 영화에도 특이점이란 게 도래한 것은 아닐까. 흔히들 기술적 특이점이 도래하면 인간은 노동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들 말한다. 헌데 영화적 시간이 노동의 시간이 동일하다면 특이점의 도래란 “영화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언젠가는.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송경원의 말처럼 <탑건>의 이 문장은 현재에 대한 강한 긍정을 내포하는 듯 보인다. 지금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언젠가’라는 말은 개인이 가진 고민을 미래로 밀어두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모든 고민을 미래로 밀어두고 나면 자연스레 현재는 즐길만한 게 된다. 하지만 이 말은 그와 정반대의 효과를 갖기도 한다. 우리가 ‘언젠가’를 선언하고 나면 그게 언제인지를 모르기에 삶의 모든 경우를 사로잡히고야 만다. 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젠가’란 개인의 한계를 지정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능력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시간적인 무언가에 관해서다.

가령 정성일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의 서문에서 ‘언젠가’의 경우를 다음처럼 밝힌다. “무엇보다도 내가 두려워한 것은 책을 낼 때 무언가 그 자리에 머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송경원이 지적했듯이 이 ‘언젠가’는 바로 그렇기에 현재를 영원의 범주에 넣는 효과가 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말은 바꾸어 말해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점 말이다. 그래서 매버릭의 ‘언젠가’는 그가 만년 대령이라는 사실과 맞물려 하나의 영원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톰 크루즈가 늙든 말든, <탑건>의 매버릭은 스크린에 머무를 것이다.

‘언젠가’라는 말이 떠나야 할 시기를 흩트려놓는다면, 우리는 프리즈 프레임과 같은 몇몇 효과들의 용례를 떠올릴 수 있을 테다. 이런 정지 효과는 대개 언젠가라는 말에 대한 두 가지 반응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첫 번째는 저항이다. 시간을 멈추면 그 언젠가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두 번째는 순응이다. 정지된 화면을 바로 그 언젠가로 지정할 때 영화는 기억되기에 적절한 지점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순간이야말로 영화라 부를 법한 게 아닐까. 언젠가 세상이 영화가 된다면, ‘언젠가’란 현재를 즐길만한 것으로 만들거나, 혹은 도래하지 않을 현재를 만들 것이다.

둘 중에서는 후자에 더 무게를 실어주고 싶다. 도래하지 않을 현재라는 말은 부분적으로는 잠재태, 대략적으로는 청춘의 이미지를 그린다. 그리고 청춘의 특징 중 하나는 모든 것이 과잉 결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직 겪어본 게 없어 개인의 경험치가 없지만, 바로 그 덕분에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있는 나이. 사람들이 청춘을 탐내는 이유는 기성의 경험을 갖고서 ‘그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그런데 점점 더 모호해지는 현대 영화의 모습이 바로 이런 청춘처럼 보인다면, 그건 착각일까? 디지털 시네마에는 컴퓨터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김병규는 「탑건: 매버릭 이미지의 죽음」이라고 적절히 지적한다. 하룬 파로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 글에서 유효한 건 영화의 초반에 간략히 언급되는 무인기의 시대, 전쟁과 게임이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되어버리는 시대다. 군의 장성들은 매버릭에게 “무인기는 먹지도, 자지도, 싸지도, 명령 불복종을 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매버릭은 ‘언젠가’라는 표현을 쓴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만 당장은 아니라는 말. 이 장면에서 매버릭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지만 적어도 무인기를 인간의 한계에 견주지는 않는다. 그 말인즉슨 무인기는 인간의 ‘언젠가’가 아니라는 소리다.

김병규는 <탑건>이 전쟁의 이미지 안에 드리운 인간의 (플라톤식) 그림자라고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탑건>은 ‘언젠가’가 인간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이는 언젠가 극장이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관객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될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전체가 매버릭의 주마등에 불과하다는 생각, 이는 정성일이 그러했듯 세상이 영화가 되었다고 할만한 낭만이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탑건>은 오히려 자신의 위치를 스크린에 구획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점점 더 영화가 모호해지는 와중에 왜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아야 하는지에 관한 명쾌한 답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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