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Sep 14. 2022

영화를 본다는 건 추락을 경험하는 것

<놉>(2022)


<놉>을 보며 그렇게까지 고평가될 영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 말해 이는 감독의 전작을 알고 있기에 내린 평가였다. 사회를 향한 목소리가 단순한 영화에의 헌신이 되어버린 것이 실망스러웠다. 적어도 전작이라면 그 자체로 스펙터클화된 정치적 표면들에 관한 언급일 수 있을 이 표현들은 <놉>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놉>에 후한 평가를 했고, 나는 그에 의구심을 품었다. 조던 필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정작 조던 필을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평가를 하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되면 결국 조던 필의 영화가 아니어도 별 상관없는 게 아닌가? 영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중견 감독들이 거쳐 가는 당연한 의례라고는 하지만, 그런 의례에 후한 평을 내리는 건 어떤 면에서 주례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한국의 평론계는 스펙터클이라는 말만 운운할 뿐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았다. 영화가 너무 해석 위주로 돌아간다고 느껴서였을까? <놉>은 어떤 점에서 현대 사회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한편으로는 영화 매체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여태까지 너무 많이 봐 온, 굳이 조던 필일 이유가 없는 영화이기에 이런 주제에서 조던 필을 언급하는 모습은 광고 전단에서나 볼 법한 무의미한 수사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말대로라면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에도 할 말이 없어야 했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의 스타일이긴 하지만 굳이 박찬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론계는 <헤어질 결심>을 논하는 일에 열광했다. 그 열기는 <기생충>만은 못했지만 적어도 많은 인터뷰이의 입에서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좋았다’라는 말을 꺼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아이러니한 건 그런 공식 지면에서 나오지 않은 말들이 블로그와 유튜브 같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는 점이다. 즉, 평론계는 그들이 동의하는 해석적 풍부함을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평소 해석놀이쯤으로 치부하던 것에 동참하는 걸 꺼렸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평론계는 그들 자신의 뿌리에 히치콕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정작 영화 해석에는 매몰찬 경향이 있어 보였다. 이들은 이 영화가 해석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조던 필이라는 작가의 이름에 몰두해버렸다. 마치 모든 영화가 작가의 영화인 것처럼, 그리고 그런 작가 칭호가 불러온 나비효과를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던 중 카이에 뒤 시네마는 9월의 스타로 조던 필을 선정했다. 한달 여 간의 긴 침묵을 깬 결과는 <놉>의 만점이었고, 이런 상황은 곧바로 별점을 냈던 한국의 상황을 뒤따르는 것처럼 보여서 <놉>에 이견을 달긴 힘들어졌다. 


이제 <놉>은 국내외 모두로 인정받은 영화가 되었고, 이 영화에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는 일은 상당한 모험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던 중 카이에의 마르코스 우잘이 9월 특집호 소개로 쓴 을 읽게 되었다. 우잘은 주프(스티븐 연)가 자신의 방 안에 전시해둔 옛 드라마의 신발을 지적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정지 상태’에서 의미를 나타내는 기호라고 말한다. 각자가 부여한 의미가 아니라 주프가 단독적으로 부여한 것, 바꾸어 말해 해석의 유동성이 자리하지 않는 곳이라고 말이다. 이른바, 그곳에는 신발이 하늘을 향해있다는-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하늘을 우뚝 향해 있는 이 신발은 우리가 영화에서 발견하는 상승의 이미지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 하늘은 영화가 자체적으로 지정한 사실이기에 다른 해석의 기준점이 되어줄 수 있다. 


이러한 기준 설정은 영화가 결국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한 주장을 파훼한다. 해석이라는 건 주장이 뚜렷하지 않을 때 벌어지는 파장 같은 것이므로, 영화의 공백에 관한 회피 수단이 되기 일수인데, 공백이라는 건 방향성의 부재, 즉 하나로 응결되지 않는 기호를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 뚜렷한 기준 설정이 있을 경우 공백은 탐사 되지 않는 지도의 나머지를 뜻하는 전장의 안개가 된다. 그래서 우잘이 지적한 이 중요한 대목을 보며 김병규가 <탑건: 매버릭>에 대해 쓴 글을 떠올렸다. 김병규는 <매버릭>의 상승 장면이 매버릭의 꿈을 보여준다고 말하면서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로 영화의 안팎을 분리해낸다: 기체가 상승하며 좁아지는 시야는 한 점으로 응축되는 방향성과 그에 수반하는 블랙아웃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 블랙아웃은 추락의 이미지, 영화 전체에 산포하는 어둠이다. 


<매버릭>의 사례를 <놉>에 적용해본다면, 영화에서 하늘은 일종의 방향성이자 내부를 향한 드리운 꿈에 가깝다. 그리고 이 꿈은 추락의 공포, 파악되지 않는 꿈의 나머지 영역을 동반한다. 가령 UFO를 닮은 생명체인 진 자켓의 눈이 초기 카메라 장치처럼 생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진 자켓과 눈을 마주치는 행위는 그러한 카메라에 영혼을 빼앗긴다고 믿었던 19세기의 미신을 연상케 한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통해 꿈을 포착하고 싶어했지만, 이는 그러한 카메라에 삶 나머지 부분을 빼앗겨 버린다는 점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매버릭의 전투기 운전에서 블랙아웃이 가리켰던 사실도 그랬다. 만약 블랙아웃이 영화의 나머지 장면을 전부 꿈이라 말한다면,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현실의 배후에 자리한다는 꿈의 형식에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꿈이란 영화가 끝나면서 비로소 드러나므로, 영화를 보는 중엔 여전한 무의식이다. 


영화를 보는 중엔 그것이 영화인지를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가 꿈이라고 말할 때 영화를 보며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꿈은 깨어나서야만 비로소 기억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매버릭의 비행은 자신의 한계에 접촉하는 행위이면서도 삶의 나머지 부분을 가리는 효과가 있었다. 매버릭은 카메라를 마주하면서 삶의 방향을 찾았지만, 한편으로는 삶의 나머지 부분을 빼앗긴 것이었다. 이 맥락에서 <놉>에서 해석을 종용하는 행위는 영화를 보는 하나의 관점이 된다. 정확히 말해 이 관점은 영화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수면에 떠오르는 관람의 행위에 가깝다. 고전적으로 영화를 본다는 게 조종석에 앉아 눈앞의 사방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오늘날의 영화는 관람 후에 수면으로 올라오고 바로 이때 영화의 내용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꿈이 되어버린다. 


영화를 본다는 건 꿈을 꾸는 일이라기보단 그 추락을 경험하고자 하는 일이 되진 않을까. 해석은 대상이 아니라 과정이고, 그 의미의 절차를 밟는 것엔 한계가 있다는 것. 무엇보다 해석의 과정은 눈앞의 영화를 따라간다기보단, 그 과정에서 보이는 것의 나머지 부분을 우리 곁에 드러낸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렇다면 <놉>에서 가장 확고한 기준인 하늘을 생각해볼 때, 우리가 멍하니 올려다보는 하늘은 스펙터클적 이미지에 대한 응시라기보다 거대한 추락의 공동을 내포한 것일 수도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진 자켓을 보지만, 이를 토대로 진행되는 영화란 그것 이외의 의식을 허용치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위에서 아래의 시점을 보여줄 때만, 진 자켓을 통해서만 관객이 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다. 진 자켓이 지상에 내려오면 전자기기 등이 꺼지고, 영화관의 불빛도 동시에 끝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