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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04. 2022

사랑이 경계를 세우는 것에 관한 감정이라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모나드는 그 자체로 주어의 모든 술어를 포함하며 그의 술어들은 광범위한 충족이유들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 이 때문에 살아있는 거울인 모나드에 생생하게 비추면 비출수록 존재의 흔적으로서 우주의 주름이 드러난다." -라이프니츠-


모두와 연결되기 위한 조건은 역설적으로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속을 비워야 그 안에 무언가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말씀 같은 이 문장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같은 시대라면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초연결 시대에 우리가 왜 SNS를 하며 고독감을 느끼겠는가? 이는 “모두와 연결됐지만, 그게 나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게 해버리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연결에 관한 영화이면서 고독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빌런의 탄생 계기는 고독 때문이고, 그런 고독이 결국에는 빌런의 자기살해 행위로까지 나아간다. 빌런의 설명을 따르자면 자신은 이미 모든 차원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끝냈기 때문에 더는 무언가가 될 수 없고, 자신은 더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 없으니 자신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권리인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이 영화에서 고독은 단순한 인간관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 영화에서 고독은 부인(denial)의 결과에 가깝다. 무언가를 ‘선택’해서가 아니라 선택하지 못한 결과물이 하나의 우주가 된다고 말하는 이 영화의 방법론은 주어진 현실을 바꾸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또 하나의 가능성이 생겨난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빌런이 보여주는 기막힌 현실조작 능력은 사실 ‘작금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 전혀 없는 현실을 지어내는 게 아니다. 이 영화는 ‘가짜’라거나 환상에 가깝기보단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적인 면에 그친다. 손이 소시지가 되는 세계나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아 인물이 돌이 되는 세계가 있긴 하지만 이런 것들 모두가 이곳에서는 핍진하고 또 그래서 개연적이다. 


그렇다면 핍진성이란 무엇인가? 충분히 사실일 법한 일을 뜻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면 그런 세계 안에서 통용되는 법칙들에 따라 사실일 법한 일의 정도는 달라진다. 영화가 묘사하는 모녀간의 갈등이 모종의 충돌 이미지로 은유되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세계는 직접적으로 충돌하며 이 과정에서 이야기는 하나로 통합되어야만 한다는 점 말이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세계가 있기에 그들은 주인공이 되고 또 이야기를 쓴다. 허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할 때 이들 이야기는 하나로 섞이지 못하고, 핍진함은 지켜지되 개연성은 망가진다. 자신에게는 말이 되는 것이 세간에선 얼마든지 틀렸을 수 있다. 쉽게 말해 ‘절대’라는 말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며 절대적인 무언가를 택할 때 이야기와 운명은 단 하나로 고정되고야 만다.


그렇지만 운명이 단 하나로 고정된다는 말은 바꾸어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바로 지금-여기라는 뜻이기도 할 테다. ‘존재’란 하나일 뿐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존재가 바로 부인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다중우주라 부르는 모든 게 바로 그러한 존재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는 고유하며, 다중우주는 이를 부인하고 탈락시켜 무로 돌리는 과정이다. 베이글의 모양에서 0(Zero)를 연상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따르면 이런 해석은 충분히 일리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런 해석을 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의지를 논하는 이 영화에서 모녀관계는 항상 좋지 않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전적 조합에서도 알 수 있듯, 모녀관계는 유전자를 확실히 공유하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운명도 그렇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녀관계는 유전적으로 확실히 DNA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운명으로 연결된 관계다. 생물학적인 면에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그들의 어머니와 어머니로 줄곧 연결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해 모든 다중우주에서 둘의 관계가 같은 운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사람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연결되어서다. 알파 유니버스의 사람들은 심우주계의 가장자리에 갈수록 운명의 상관관계가 낮아진다고 말하지만, 에블린 왕(양자경)과 조이 왕(스테파니 수)은 오히려 모녀이기에 가장자리를 걸을 수밖에 없고, 또 그래서 대척점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에블린이 결혼을 하지 않은 세계선이라면 그곳에 조이가 있을 수는 없다. 조이의 탄생도 결국 확률적이지만, 에블린과 남편의 관계여야만 개연성이 있다. 그러니까 사실 같은 유전자라도 아이의 외모는 확률적으로 재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부터 이들의 관계는 이미 유일하다. 


그렇다면 둘의 관계는 왜 가장자리이자 대척점인가. 부모와 자식은 유전적으로 같은 계보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은 부모의 결과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론인 건 아니다(결과론이 부정된다는 소리다). 자식은 어떻게 해서든 부모와 거리를 두어야만 자아를 키울 수 있고, 또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부모자식 관계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의 키포인트가 되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그 빌런, 조이는 에블린이 자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유일한 사람이기에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녀가 그토록 조이를 찾아 헤맸던 이유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여 종국에는 둘이 아닌 하나로 있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부모와 자녀는 명백히 다른 존재이자 운명에 속한다고 말하면서 딸의 처지에 이입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되려 딸을 구해낸다. 


가령 할아버지에게 딸이 레즈비언이라고 떳떳하게 밝히지 않는 에블린의 모습처럼 이들에게 현실이 존재하는 방식은 부인이다. 에블린이 미국에 이민을 온 건 부모님에게서 부인당해서였고 다시금 이는 그녀에게 부인에 관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녀는 구체적인 무언가로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는 딸의 여자친구를 친한 친구로 돌려 말하는 것에서부터, 남편이 이혼서류를 내밀면서까지 솔직해지자고 말하는 일에 연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민자 2세대로서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가르침 받은 조이에게 현실은 ‘~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의 탈락이자, 인정받지 못한다는 부인이었다. 에블린은 조이를 사랑하더라도 이를 드러내는 방식에서 그런 ‘사실’을 부인했고, 조이는 이 부분을 라깡의 편지처럼 도달하지 못하는 무언가로 이해했다. 그래서 조이는 역설적으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집착했던 것이다. 


가령 그녀가 사물이나 사람을 만질 때 나타나고 뒤바뀌는 것은 생성이나 교체라기보단 탈락에 가까워 보인다. 신적인 능력으로 따지자면 무언가를 태어나게 하는 것보단 늙어가게 하는 것에 가까우며, 그 점에서 그녀는 “필연적 존재”다. 그녀는 온갖 다중우주에서 자신의 삶을 보았고, 가능성을 확인했으며, 그렇기에 더는 될 수 있는 게 없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소진되었다. 그녀는 모든 것에 연결된 대가로 그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었으며, 이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죽음뿐이었다. 그러나 들뢰즈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인간”을 두고서 “그렇기에 무엇이든 가능한 인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차이, 반복, 차이, 반복, 이러한 연쇄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파형은 하나의 예측이 되어 이른바 삶의 궤도를 고정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러한 고정이 바로 우리가 운명이라 부르는 강제력이다. 


조이가 착각했던 것은 이런 운명의 위상학적 위치였던 것 같다. 조이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마치 네트워크와도 같은 평면을 가정했고, 그렇기에 세상 어디에서도 ‘나’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세상에서 주체는 물 위의 꽃가루처럼 보이지 않는 불안에 줄곧 휘둘리면서 좌표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 다중우주란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과정에서 분기하는 여러 선택지이며, 이는 곧 우리가 운명을 하나의 중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력은 신체가 가장자리로 떠나지 않도록 자신을 붙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이전의 선택지로 돌아가는 건 평면의 타임라인에서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는 부유의 정도를 따져야 한다는 점에서 주체의 균열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며 초연결을 떠올린 것은 이런 의미에서였다. ‘갑자기’라는 사이가 삭제되면서 균열을 모르게 되는 일. 


이 영화가 다루는 다중우주는 개인의 선택이 자아낸 여러 운명들의 확률론이면서, 그와 동시에 여러 확률이 하나로 수렴되는 운명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운명은 되려 우리가 너무 빨리 연산하기에 닥쳐온 것이다. 너무 빠른 연산은 우리가 그들과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가장자리이자 대척점에 서 있게끔 한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이 모녀관계는 가족이기에 초연결되었고 서로에 관해 모든 걸 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몰랐다. 다른 한편 김곡은 『관종의 시대』에서 “혐오는 경계가 허물어지는 데에 대한 감정이라면,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장소는 거꾸로 모든 혐오가 허용되는 장소라는 뜻”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을 영화에 그대로 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이 경계를 세우는 것에 관한 감정이라면, ‘나’의 위치를 구획할 때 우리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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