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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20. 2022

억누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게 된다

<유레카>(2000)


“억누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게 된다.”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는 억누르지 않음과 인간에 관한 하나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리고 이 고리는 영화가 왜 인간적이지 않는지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가령 우리가 영화를 기계의 시선이라는 의미에서 탈인간화의 맥락으로 파악할 때, 그것은 인간의 면이 아니라는 점에서의 무의식을 드러나는 장치가 된다. 이 무의식이 바로 우리가 ‘영화’에서의 실재라고 말하는 현실세계의 잉여분인 것이다. 허나 반대로 보면 이는 우리가 현실에서 억누르는 걸 드러내는 게 바로 영화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영화는 현실의 잉여분이라는 점에서 넘쳐 흐르는 현실성을 가졌으며 그게 바로 우리가 ‘영화 같음’이라고 표현하는 감정의 정체다. 영화 같다는 말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린 +극의 감정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를 볼 때 항상 과잉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 맥락에서 <유레카>는 인간으로 남으려면 억눌러야 한다고 말하며 “영화-되기(being)”의 자리에 남고자 한다. 


이 논리를 따르면 <유레카>는 세간의 해석처럼 무언가가 벌어지고 난 이후의 삶을 그리는 것보다는 “무언가가 벌어지기 전”을 다루는 것에 더 가깝다. 물론 <유레카>는 납치 사건으로 시작해 이후 사건의 여파를 겪는 중의 인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본 영화의 밀레니엄에 편승하는 듯 보이는 게 사실이다. 종말론을 말하는 밀레니엄의 영화들은 “현실은 추악하다”고 말하면서 되려 그런 과거로 다시 돌아가려 했다는 점에 그 아이러니가 있었다. 특히 <환상의 빛>(1995)과 같은 영화를 보면 그 발화의 방법이 항상 어떠한 사건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밀레니엄은 단순히 분위기가 아니라 특정한 시점을 말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이 특정한 ‘시점’이야말로 돌아간다/갈 수 없다라는 두 가지 단락을 형성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와이 마코토(야쿠쇼 코지)가 타무라 나오키(미야자키 마사루)에게 말하듯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건 “여기서 빙글빙글 돌래?”라고 묻는 일이다. 언제까지 그런 이야기 안에 갇혀 있을 것인지라는 물음말이다. 


조일남 평론가는 「끝점을 상상하기」라는 단문에서 “영화 비평이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풀어놓는 일과도 다름없다”고 언급하며 “영화 속 세계가 바깥으로 발산하는 감각 경험”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 감각 경험은 영화가 세계를 향해 열림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점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곧 세계로 존속하는 하나의 이해 방식이다. 영화를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방식이 아니라 안에서 밖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이해할 때, 현실은 영화의 기준으로 볼 때 무언가가 막 벌어져야 할 무대이며 그런 의미에서의 ‘이후’이다. 그 말인즉슨 <유레카>는 집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는 중의 ‘이전’을 자신의 위치삼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집 안에 머무르는가. 그건 바로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말은 아주 정직하게 용례 그대로 사용된다. 만약 영화가 감정을 제하고 기계적이고 건조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인간의 시선은 주관을 품은 채 세상을 특정한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하나의 해석으로 작동한다. 


그렇다. <유레카>에는 한 가지 해석의 논리가 흐른다. 마코토가 나오키에게 “억눌러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영화의 맥락 상 원점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와 연결되어있다. 그러나 이 원점은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게 아니라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미로를 헤쳐나온 지점이라는 점에서 조력자의 존재 없이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라는 건 수미상관의 구조를 채택함에 따라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오는 회귀의 형태를 띄곤 하는데, 그런 회귀는 삶을 다시 사는 것이라기보단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없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때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은 스스로의 억눌림에 의해 방지되며 그 이유는 그가 조력자의 존재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즉,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의 억눌림이 바로 영화의 주요 흐름이며 이는 영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영화는 인물 사이에 관계를 만드는 일을 억누르면서 이전에 머무르고자 한다.


가령 영화의 1시간 42분쯤에 마코토가 옛 인연을 마주하며 “왜 집을 나갔냐”는 물음에 답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되돌리려 생각해서 집을 나갔고, 하지만 결국 어딜 가도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어.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고나 할까. 어딜 가도 그저 계속될 뿐이야.”

“되돌린다니. 틀린 말이야. 마코짱은 도망간 거야.”


 그녀의 지적이 적확하게 가리키는 지점은 원래대로라면 마코토가 자신의 도움을 받아 헤쳐나왔어야 할 제자리다. 수미상관의 관점에서라면 그 사이에 흐르고 진행된 이야기가 이 시간을 구성하겠지만, 마코토는 그져 도망치기만 했을 뿐 누구에게도 조력을 구하지 않았으며 마땅히 원점을 원하지도 않았다. 마코토가 타무라 남매에게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민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테다. 유미코(고쿠쇼 사유리)가 마코토에게 공감을 표하며 “당신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삶이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대목은 마코토가 남매에게 손을 내민 이유가 일종의 조력자가 되기 위함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범인과 마주한 현장에 갇혀버린 남매의 시간이 일종의 미궁과도 같다면, 그런 미궁에서 빠져나올 때 필요한 조력자가 바로 마코토다. 바꾸어 말해 남매의 시간이 집 안에 갇혀 바깥을 바라보는 쪽이라면, 마코토의 행동은 이미 자신이 걸었던 길을 다시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 마코토에게 남매의 시간은 ‘아직 되돌릴 수 있다’고 여겨지는 쪽에 있어서다.


영화 속 세계. 이들이 겪은 비현실적인 사건이 영화라면, 그런 트라우마에 갇힌 이들의 모습은 영화 속 세계다. 인간을 두고서 하나의 세계에 빗대는 단자론의 맥락은 영화 속 세계라는 말이 인간의 기억으로 치환되게끔 해준다. 그리고 영화 속 세계가 바깥으로 발산하는 경험은 기억의 미궁을 나가는 게 상황을 되돌리는 게 아니라 다시금 원점을 되돌아오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그런 미궁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녀의 지적은 문제를 회피했다는 점에서의 도망이 아니라 미궁이 있다는 사실로부터의 도망이다. 미궁이 있다는 사실에서 도망치는 건 그들의 삶의 터전인 집에서 도망치는 일과도 같다. 즉 되돌리려 생각해서 도망쳤지만 어딜 가도 그에 벗어날 수 없으며 매번 출발점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그래서 이 도망은 이미 마코토가 나오키의 살인 행각을 알고 있었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이미 버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마코토는 나오키의 살인을 알았으며 따라서 이 여행은 그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형사의 말처럼 도망의 성격은 아니다. 


“더 이상 아무도 죽지 않을 거예요.”라고 마코토가 형사에게 말할 때, 이 둘의 대화는 크게 두 갈래로 해석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 마코토가 이미 나오키의 살인을 알고 있었다는 점. 두 번째는 형사가 그의 말을 마코토의 살인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살인자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다는 지적에서 우리는 형사가 마코토를 살인자로 이해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처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마코토의 해당 발언은 이들 사이에 공유되는 진의를 미궁에 빠지게끔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장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마코토의 생각에 형사가 개입함으로써 그가 한 명의 조력자가 되며, 이제 이들의 삶은 본격적인 선회를 시작한다. 버스를 마치 이동형 집처럼 꾸며놓은 이들의 모습을 두고서 ‘집을 나갔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면 완전한 움직임 안에 있는 버스에 출발점 따윈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버스는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 주차장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다시금 이곳에 돌아올 것을 서약한다. 하지만 이는 사건을 되돌리고자 함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과거에서 도망치기 위함이다. 


이미 결정된 과거란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현실의 잔상이라는 점에서 도망칠 수 있는 무엇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실시간으로 도와줄 누군가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아직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직 되돌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이들 조력자의 조언이며, 아리아드네의 실은 단지 어디로 가야 할지 뿐만이 아니라 얼마나 되돌아가야 하는지도 말해준다. 이 점에서 <유레카>는 어느 한쪽만이 주인공인 영화는 아니다. “타인만을 위해 사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마토코가 받아들이는 방식은 “자기일 수 있는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은 가능한가”이며 이를 위해 그는 집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유폐해야만 했다. 기억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으니 미궁 속 깊은 곳에 기억을 보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영화를 제거해야만 했고 또 그에서 도망쳐야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화는 결정된 과거가 되어야만 했고 바로 그래야만 현실은 단단함을 기반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억누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게 된다고 말하는 일은 억누르면 인간이 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이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이라는 말은 영화의 반대편에서 해방의 욕구를 쉴 새 없이 내뿜을 테다. 나오키가 마코토에게 “왜 죽여서는 안 되나요.”라고 물을 때 우리는 영화가 좀 전까지 되뇌던 마코토의 같은 혼잣말이 기적처럼 이어지는 발견을 한다.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게도, 자신의 집을 제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세상 모두를 배제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영화 속 세계가 세계를 향해 발산하는 이 감각은 무참한 살의, 혹은 그에 준하는 자기 살해의 방식인 셈이다. 많은 사람이 자살을 두고서 삶에서 도망치는 일로 규정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자신을 살해할 수 없는 이가 택하는 건 많은 경우에 세상을 살해하는 일이다. 세상을 해치는 것으로 대신하는 이 감각이 바로 도망이고, 이는 곧 무언가를 되돌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의 발산이다. 헌데 문제는 우리가 이를 두고서 원점으로 파악한다는 점에 있다. 모든 게 헛수고가 되는 지점으로 말이다.


그러나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은 그동안의 여정을 무색하게 하는 게 아니다. <유레카>를 바라보는 시선 중 가장 주요하게 여겨지는 ‘이후’에 대해 짚어보자. 이후를 살아가는 게 두려워서 이후를 살해하는 일은 충분히 있을 법하다. 이때 우리는 이후로 나아가길 거부하는 걸 두고서 도망친다고 표현할 수 있다. 헌데 도망친다는 표현은 그것이 특정한 기준점을 둘 때만 가능한 것으로, 기억이 특정 시점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무언가에서 도망친다고 표현하는 건 무색해진다. 이는 오히려 이야기가 밖으로 발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에 더 가까운데, 왜냐하면 그들이 이야기를 간직할 때 현실은 여전한 영화에 머무르며 이는 그들로 하여금 부족한 현실을 잊을 만큼의 과잉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코토는 자신이 깨달은 사실에 관해 한 가지 의견이 있었고, 그게 바로 도망이다. 세상 사람들의 의견과는 달리 마코토에게 도망은 과거를 잊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위치감각을 붕괴시키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자리를 허무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존재는 세상 어디에나 있게 되며 “더 이상 죽는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아키히코(사이토 요이치로)가 경찰에 신변이 구속된 나오키를 두고서 “그 녀석도 그곳이 더 행복할 거야.”라고 말할 때 마코토는 강한 거부 의사를 내비친다. 그러면서 그는 “그 녀석은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거야.”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마코토가 나오키를 두고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녀석”으로 파악했다고도 볼 수 있고 또는 ‘다시 돌아온다’라는 점에서 미궁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들에게 미궁이란 스스로 자신의 일부를 가둬놓은 것으로, 밀레니엄 영화가 단순히 이전과 이후로 특정 시점을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유레카>가 기억에 접근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유레카>는 특정 시점을 가둬놓는 식으로 있던 일은 없던 것처럼 돌아가지만, 정작 존재는 그런 미궁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회귀의 성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존재는 자신이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를 고뇌하며 세상을 영화로 만들지만, 어쨌거나 이들의 삶은 다시금 현실에서 이어져야만 한다. 그 점에서 마코토의 일갈은 아키히코를 향한 것이자 자신에게도, 혹은 영화 속 세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드는 궁금증은 억누르면 인간이 되는 것인지에 관한 단순한 물음이다. 영화는 자신을 억누르면 인간적이 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는 억누르는 것을 통해 자신을 보다 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무언가를 억지로 억누르는 듯이 행동하는 근래 일본 영화에 적용된다. 자신을 애써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영화들에서 발견되는 현상은 기억을 마치 가장 깊은 중력이 작용하는 자리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들 영화에서는 도망쳐야만 비로소 제자리에 머물 수 있고 이 점은 회복의 불가능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차이를 단순히 시대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겠지만 만약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영화’라는 말은 한 가지 생각의 지점을 남긴다. 영화는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기계 장치일까? 아니면 현실이 넘쳐 흐른 곳이 바로 영화이고 오히려 우리네 현실이야말로 늘 부족함에 허덕이는 원점인 걸까? 다시 말해서 영화를 현실의 친구라 가정했을 때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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