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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25. 2022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세계와 만나는 방식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2022)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은 영화의 초점이 양쪽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델토로’의 피노키오이면서 델토로가 만든 ‘피노키오’이기도 하다는 것. 따라서 이 영화는 어느 한 쪽으로 해석되거나 할 이유가 없으며 되려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거론하는 게 더 옳다. 이 글에서 나는 전자를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델토로와 피노키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가장 처음으로 말해야 할 건 고유명이다. 우리가 고유명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이 이미 존재하는 것과 매칭되는 드러냄인지, 아니면 존재를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점에서의 매개인지를 구분해야 하는데. 적어도 이는 델토로의 작품과 피노키오라는 고전 사이를 잇는데 유용한 개념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델토로가 크리쳐를 상상하고 소환하는 방식은 피노키오와 같은 고전적 존재가 여러 매체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변용되는지에 관한 물음과 엇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여러 매체에서 피노키오를 변용하는 방식은 거진 프랑켄슈타인 설화와 맞닿은 듯 보이는데, 아마도 이는 피노키오가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귀인하는 것일 테다. 그리스에서의 피그말리온처럼 무언가를 만들어 그에 숨을 부여하는 일은 인간의 창조적인 측면을 강조함과 동시에 피조물 입장에서의 인간 자신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이른바, 신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피조물이라는 주제는 쉽게 선택하고 응용하기 쉬운 것이었다. 이를 따르자면 피노키오는 실의에 빠진 무언가를 대체하는 무언가로서 그러나 원본을 대체할 수는 없는 한계를 지닌다. 달리 말해서 피노키오는 원본을 대체할 수 없기에 바로 그 자신이 하나의 원본으로도 기능한다는 점이 이 논의의 핵심이다. 고유명이라는 말이 어떠한 존재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 선택에 동참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특정한 선택을 하는 존재를 일컬어 피노키오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피노키오는 선택한다. 피노키오 동화에서도 그렇지만 이야기는 인물에게 부여되는 시련에 불과할 뿐이며 진정으로 살펴보아야 할 건 인물의 내적 성장담이다. 왜냐하면 창조물은 이미 창조된 순간부터 그 자신의 외견이 완성된 채이므로 가능한 건 내적 성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내적 성장은 외견과 맞물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유명에 관한 탐구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피노키오는 피노키오라 불리는 것을 줄곧 따라가면서 그곳에 이르는 길을 개척하고, 이 점에서 인간성을 획득한다. 이 전제는 스필버그의 <A.I>와 같은 변용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며 델토로의 경우도 그렇다. 피노키오 이야기의 대전제는 원본을 대체하지 못하는 복제품이며 여기서 복제가 물려받은 것은 외모가 아니라 이름이다. 주요한 건 역시나 이름의 자리인데, 이름의 자리가 비워진 상황에서 이미 퇴화해버린 구성을 다른 곳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재현하는 게 바로 피노키오 이야기의 진행이다. 


 그러니까 피노키오란 특정한 선택으로 절멸의 무대를 되살리는 한 가지 방법론으로도 볼 수 있겠다. <피노키오>에서 델토로의 이야기 방식이 그렇게 보인다. 피노키오라는 고유명이 대체 불가능의 자리를 대체 불가한 것으로 남겨둔다는 점에서, 혹은 처음부터 대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애초에 회복의 서사는 될 수 없다. 단적으로 영화에서 귀뚜라미의 집으로 묘사된 피노키오의 몸통 속 구멍은 양철 나무꾼의 비어버린 심장을 연상케함과 동시에 피노키오라는 존재의 질료적 고유함을 설명한다. 나무는 느리더라도 성장하는 생명이나 잘려버린 나무는 형태가 변할 뿐 더는 성장하진 않는다. 즉 피노키오는 애초에 성장의 가능성이 거세되었으며 어쩌면 이 점이 ‘죽어버린 아들’의 모습에 관한 영구재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구적이라는 말은 영원을 가리키지 않는다. 영원은 무시간성을 동반하므로 바라보는 주체가 늙거나 병드는 이상 영원은 성립할 수 없다.  


이것이 델토로의 피노키오인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델토로의 영화에서 성장하지 않는다고 여겨질 만한 피조물은 거진 상처받는다. 특히 델토로 영화의 특징은 ‘피조물’이라는 대상의 정의가 우리가 크리쳐라 부르는 괴생물 말고도 세상에 있는 그대로 내쳐진 존재로 확장된다는 점인데. 이는 델토로가 밝힌 <악마의 등뼈>(1995), <판의 미로>(2005), <피노키오>(2022) 삼부작에서 인물이 처한 시대적 배경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앞의 두 영화가 스페인 내전을 다루면서 보다 깊은 현실의 장막으로 들어간다면, <피노키오>는 그 전제가 피노키오이면서 애니메이션인 만큼 1차 세계대전이라는 모호한 입지를 취한다. 세 영화 사이에는 파시스트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파시스트는 영화의 직접적인 악당이 되기보단 시대 묘사를 위해 등장하는 한 가지 오브제에 가까우며, 마찬가지로 그런 설정이 주체에 영향을 주진 못한다. 헌데 그렇다면 파시스트라는 설정이 ‘피조물’과 연결되는 대목은 어떤 것일까? 


파시스트를 두고서 어떠한 선택을 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저 시대가 낳은 인물상으로 파악할 때, 그는 신적 처벌 아래 존재하는 한 마리 동물이 될 수 있다. 델토로의 영화를 피조물이라는 주제로 파악한다면 괴수를 디자인하는 일은 그런 인간들이 어떻게 디자인되었는지를 묻는 것과도 같다는 점에서 그 출현의 위치를 파악하기란 쉽다. 쉽게 말해 우리가 <피노키오>에서 보아야 할 건 피노키오의 등장만큼이나 파시스트라는 시대적 배경이 등장해오는 이유이다. 왜 델토로는 다시금 <피노키오>를 말하며 1차 세계대전으로 무대를 바꾸었을까. 먼저 영화에 등장하는 극단을 언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나무톱밥과 금속조각>(1953)에서 유량극단이 어떠한 시대적 위치를 담보한다고 가정했을 때, 델토로의 <피노키오>에서도 극단은 단순한 원작 재현 그 이하인 것만은 아닌 듯 보인다. 유랑극단이라는 단체는 적어도 어떤 대상과 사건의 출현을 작품 내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델토로는 <피노키오>의 제작 과정에서 주요 악당으로 나오는 인물을 현재의 극단주로 바꾸었는데, 델토로의 이 선택은 단지 인물의 인상과 이미지를 바꾸는 것에만 그치는 듯 보이나 그만큼 극단을 묘사하는 데에 공들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영화의 중간에 파시스트의 무대에 끌려가는 플롯이 있기는 하지만 이 플롯은 바다괴물에 삼켜진 할아버지와의 재회를 위해 준비된 무대에 가까우며, 더 나아가서는 영화가 시작된 지점인 아들의 죽음을 피노키오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아들이 죽은 것이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면 피노키오가 무언가를 위해 죽는 것도 아무런 이유가 없어야 한다는 이 말은 전쟁이 낳은 두 가지 극단을 영화 안에 부여하면서, 피조물의 지위를 만들어진 피해자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아들로 바꾼다. 델토로가 피노키오라는 고유명을 활용하는 것은 이 부분으로, 고유명이 이미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파시스트라는 시대적 인물상이라면 존재를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이 피노키오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델토로와 피노키오 간의 차이점에 대해 말해보자. 델토로와 피노키오 간의 결정적인 차이, 델토로가 피노키오를 한 명의 피조물로 선택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시대에 그를 귀속시키려함이 아니다. 피노키오라는 고유명이 수면에 오르기까진 많은 상황이 요구되는데 그런 와중으로 세계대전이 선택되었으리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가령 세계대전의 상황이 필연적이었다고 보는 역사의 운명론에서 고유명이라는 말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든 갈등이 터져 나온 사건이었을 뿐, 중요한 건 세계정세이며 그런 정세는 어떤 방향이든 수면에 드러났으리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그리고 이 관점은 피노키오라는 피조물을 아들을 잃고 나서 만든 아들의 기막힌 대체물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존재에 관한 방향성을 거진 항상 존재해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즉 피노키오라는 고유명은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지 어떠한 세계의 근사한 대리물은 아닌 셈이다. 


다시 한번 반복해보자면 피노키오는 결코 근사한 대리물이 될 수는 없다. 델토로는 이 영화를 전쟁의 참상을 드러낸다거나 피노키오 설화의 변주로써 제작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델토로와 피노키오 모두가 한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결과이며 델토로의 방향성이 피노키오와 합치된 결과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명으로 기능한다. 델토로의 <피노키오>는 기존에 있던 설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이미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혹은 아들의 이름을 계승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존재의 방향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피노키오>의 델토로가 스탑모션으로 제작된 이유는 그것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형극처럼 완전한 창조가 아니라 늘 배후의 무언가와 연결되었다는 점을 암시하기 위함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피노키오>가 어떤 것에 의해 조종받는 상태라는 뜻이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끝에 <피노키오>가 자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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