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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25. 2022

바깥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탑>(2022)



홍상수의 <탑>(2022)을 보며 떠올린 것은 그의 영화가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먼저 영화의 제작 환경에 대해 언급해두고 싶다. 


Q: 판데믹 시대의 영화들의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 

A: 판데믹 시대의 영화는 판데믹을 언급하고 싶지 않아 한다. 


쉽게 말해 영화 안에서 판데믹 상황임을 알리는 외적 표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한다. 그에 대한 증거로 판데믹 기간에 촬영된 많은 영화들이 인물에 마스크를 씌우지 않으며 또한 관련된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는 영화가 시대적 배경에 얽히는 일을 방지하려는 목적이기도 하나, 무엇보다도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오랜 세월 후에도 현재성을 지니고자 함일 것이다. ‘판데믹’이란 아주 분명하게 존재하기에 아주 확고하게 소거되어야만 했던 시대적 배경인 셈이다. 그런데 <탑>에는 이것이 판데믹 상황임을 알리는 대사가 티브이 뉴스에 나오며, 이 점을 통해 영화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장면이 없음에도) 판데믹 시기라는 상황적 지표를 얻는다. 따라서 이 대사는 한 가지 의문점을 남기는데 그건 바로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표지가 내적으로는 암묵적인 전제와 옹호를 얻는 중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실내 촬영이 이루어진 이 영화가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는 건 몹시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인물은 외부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며 이는 결국 의도된 상황이라고밖엔 볼 수 없다. 


이쯤에서 제기해볼 수 있는 문제는 홍상수가 이 영화를 ‘거리두기 해제’ 이후로 배경 삼는 중이라는 점이다. 권해효가 흘깃 쳐다보는 티브이 뉴스에서는 코로나가 다시 확산세에 접어들었다는 멘트가 나온다. 이 멘트는 판데믹 시기에 주기적으로 돌아왔지만, 만약 거리두기 이후의 시점이라 가정할 때 이 시점은 집단면역을 향해가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와는 하등 관계없어 보이는 이 추론은 영화 외적인 면에서 크게 두 가지 흥밋거리를 던져준다. 첫 번째, 어느 순간부터 홍상수의 영화는 실내에서 머무르는 경향이 있고 판데믹이 이런 경향을 심화했다는 점. 두 번째, 판데믹에 촬영된 다른 영화들과의 내외적인 기술적 차이에 관해서다. 전자에 관해서는 <풀잎들>(2018)년부터 이런 경향이 있었다고 소개할 수 있겠지만 영화가 더욱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2020년 2월~3월에 촬영한 <인트로덕션>(2021)이며, 영화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소설가의 영화>(2022)의 경우는 판데믹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마스크 착용을 통해 그 여파를 간접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마스크가 코로나바이러스를 암시하지 않는 것일 가능성은 없을까? 무엇보다 <소설가의 영화>는 외부로 산책을 다니는 장면이 나오므로 마스크 촬영이 사실상 강제였으리라고 감안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소설가의 영화>에서 김민희가 촬영한 영화는 인물이 마스크를 촬영하지 않은 채이며, 이는 곧 ‘영화는 특정한 시대상을 겉으로 드러내선 안 된다’는 암묵적인 법칙이 그에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헌데 그렇다면, <소설가의 영화>가 취하는 영화 속 영화 구성은 코로나 판데믹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지만은 않다. 어쩌면 <소설가의 영화>에서 홍상수가 보여주려던 건 현실의 영화와 영화의 현실이 서로 다른 차원으로 공존한다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 다시금 <탑>으로 돌아와 판데믹을 말해보자. <탑>에서 암시되는 거리두기 해제의 상황은 그 정책적인 배경을 모르더라도 있어야 할 것의 부재로 읽히기 쉽다. 이 영화에는 ‘마스크’라는 것이 의도적인 외면을 겪으며,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는 판데믹의 한복판을 정주행한다. 


외면에 대해 말해보자. <탑>에서 외면이라는 단어를 불러내는 심리란 이것이 실내극이라해서 ‘감금’의 처지로 이해되어야 할 게 아닌, 창밖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뜻이다. 판데믹을 살아가지만 정작 그 안에서는 바깥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 홍상수의 실내극은 그 작법에 있어 세계 안을 주행하지만 바깥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가령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2021)는 판데믹 시기에 촬영해 많은 고초를 겪었으며 하마구치는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짧게 마스크 한 장을 보여줬다. 이는 영화가 묘사하는 터널의 이미지처럼 영화 자체가 하나의 출구전략을 사용했다는 점을 의미하며, 그 출구의 끝은 판데믹이라는 하나의 외부로 설정되었다는 점을 뜻한다. <탑>도 마찬가지다. <탑>에서 홍상수가 4개의 층계를 지닌 건물 하나를 영화의 주 무대로 설정할 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외부는 그 맥락상 창밖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인물이 대화 중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때 그들은 다시 돌아올 일이 없으며, 실제로 대화는 창밖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자는 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이미지에서 착안하면 <탑>은 그 자체로 거대한 자동차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언급해서이기도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자동차와 그 장면에서 나누는 대화 덕분이다. 이 영화에서 외부 장면은 대개 자동차의 등장과 탈락과 결부되는 때가 잦으며 심지어는 이를 통해 인물의 행방이 교차하기도 한다. 이는 <탑>의 네 가지 층계가 서로 다른 세계로 얽혀있음을 보여주는 장치기도 하지만 그것이 하필 자동차인 이유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바로 이 여지가 자동차라는 세계가 독립적인 공간으로 자리한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탑>에서 자동차를 타러 가거나 혹은 타고 오는 인물들에겐 공통적으로 영화의 내러티브 안에서 사라져버린다는 특징이 있다. 말그대로 자동차는 운송수단으로서 사용되며 이것은 영화의 안뿐만 아니라 그 내러티브 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자동차를 파악할 때 중요한 건 이것이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라 <탑>의 네 가지 층계를 오갈 수 있는 하나의 독립 공간처럼 작동한다는 점일 테다. 


결국 그 운동의 방향에 있어서만 다를 뿐, <탑>의 자동차는 일종의 엘리베이터처럼 동작한다. 엘리베이터가 어느 층에도 속하지 않지만 어느 층에도 속할 수 있는 공간이듯, <탑>의 자동차는 항상 바깥이 있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그 자신이 독립적인 공간으로 남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자동차가 가후쿠만이 홀로 설 수 있는 극장이라는 점에서 창밖을 연기의 무대로 만들었다면, <탑>의 자동차는 이들 인물이 극에 소속되지 않으면서 건물 전체가 영화의 공간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장치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를 말하는 힌트가 티브이에 나지막이 들려오는 판데믹의 보고 사항이라는 점이다. 홍상수를 한국적 맥락에 놓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곳이 한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보고는 바깥과 내부를 서로 분리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우리는 안과 밖을 논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잡는다. 헌데 홍상수가 <탑>의 건물을 골조로 안과 밖을 분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바로 통로가 필요해서다. 영화에 관해 멀티버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몇몇 필자들의 의견처럼 층계를 이으려면 통로가 필요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마지막 장면에 판데믹이 언급된 것은 현실에 출구를 내려 한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울 만한 결말이었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탑>의 판데믹은 설사 그것이 별 생각 없었더라도 <탑>이라는 공간의 신비성을 해치는 듯 여겨진다. 허나 적어도 홍상수에게 공간의 신비성은 <북촌방향>처럼 수평적 지리에 의존했지 수직으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또는 <극장전>이나 <소설가의 영화>처럼 극장에서 영화인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일궈낸 신비성은 일방통행에 가까운 것이었다. 반면 <탑>은 그 이동의 방향이 수직이므로 어느 한 쪽으로 통행하지 않으며, ‘4층’이라는 표현처럼 내려가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영화는 항상 자동차를 외부 공간으로 열어둔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자동차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형태의 지면 위에 올라있고 영화 자체의 이야기는 4개의 층으로 올라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판데믹이라는 단서를 통해 열려있는 출구는 건물의 밖이 아니라 건물의 안쪽으로 나있다. <탑>의 안팎이 허물어지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클라인병 구조를 통해서다. 


다시금 <드라이브 마이 카>로 돌아와서 자동차가 사라지는 지점을 언급해두고 싶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이후의 삶에서 출구전략으로 자동차라는 무대를 사용한다면, 4개의 층을 두고서 자동차를 들여오는 방식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 <탑>은 바깥을 바라보는 일에서 출구로서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홍상수의 ‘바깥’을 추론하는 일은 미지수다. 언제부턴가 홍상수의 영화는 <그 후>의 자동차 안에서 김민희가 창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혹은 <풀잎들>의 카페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것처럼, <당신 얼굴 앞에서>의 도입부가 아파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강변호텔>에서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눈 내린 풍경처럼,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지만 단지 바깥이라는 방향만으로 무언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끌어내기란 어렵다. 다만 이러한 시선의 동선이 다시금 영화가 진행되는 내부로 들어와 바깥을 내부로 이을 때, 우리는 홍상수의 바깥에서 영화의 안으로 끌려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확실히 <탑>은 그런 의미에서 경계를 허무는 영화이며 <북촌방향> 이후 가장 확실한 홍상수의 무대 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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