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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13. 2023

버리는 것보다 더 많은 기억을 안고 간다고 말하는

<아마겟돈 타임>(2022)


플로리다에 가면 모든 현실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이들이 있다. 아마 그 이유는 플로리다가 미국에서 가장 낮은 중력을 지닌 장소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플로리다의 케이프 커내버럴에 자리한 케네디 우주센터는 미국에서 중력의 밀도가 가장 낮은 장소이고 그래서 발사에 최적화됐다. 바꾸어 말해 이곳은 그나마 미국을 가장 잘 벗어나기 쉬운 장소이자, 지구의 법칙이 약해지는 곳이다. 이 영화에서 죠니(제일린 웹)와 폴(뱅크스 레페타)이 함께 가려는 게 플로리다인 건 그 때문이 아닐까. 두 사람이 서로 같은 장소를 지목하는 건, 그들이 서로 이해관계여서가 아니라 낮은 중력이 필요한 이들이어서였을 테다. 발사에 최적화된 이 장소는 평범한 삶보다는 비교적 ‘나은’ 가능성을 보여줄 테니까. 영화에서 여러 대사로 재차 강조되는 현실의 문제란 이들이 삶의 터전에 얼마나 잘 녹아들 수 있을지였다. 그리고 삶에 녹아든다는 건 자신을 버리고 현실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 죠니를 대하는 세상의 태도는 이 대목에서 다음 두 갈래로 나뉜다. 


죠니의 외할아버지가 “세상에 험난한 일이 많겠지만 그런대로 살아간다”고 말한다면, 죠니가 새로 전학 간 학교의 단상에서는 “세상에 험난한 일이 많겠지만 작은 시련에 그칠 뿐”이라고 말한다. 둘 다 비슷한 말이지만 전자가 이민자의 높이에서 바라본다면 후자는 아메리칸의 높이에서 바라본다는 차이가 있다. 죠니가 유대인식 이름을 숨기고서 입학한 이 학교가 이름을 감춰 전형적인 아메리칸 되기를 요구한다면, 죠니에게 주어진 숙제는 그렇게 무거운 현실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다. 죠니가 사회를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에 녹아드는 법은 자신을 숙이는 일뿐이다. 즉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는 점에서 높은 중력을 지닌다. 헌데 다인종이 섞이고 구닥다리 건물에 아이들을 ‘방치’하는 공교육을 비난하는 게 세련된 교육으로 사회지도층을 양성하는 사립학교의 학비를 대신할 수 있을까. 바꾸어 표현하자면 사회지도층이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건 단지 돈이나 물질만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척’ 등의 계급의식인 게 아닐까. 


가령 이 영화는 시작점에서부터 티브이 화면으로 레이건의 당선을 확실시한다. 시대적 배경을 말해주는 설정 쇼트지만 영화의 마지막이 레이건 당선 소식이라는 점에서, 본편의 이야기는 레이건 바로 직전이라는 점으로 이해된다. 요컨대 영화가 그리는 것은 어떠한 순간이자 ‘때’로, 죠니의 어머니(앤 해서웨이)가 말하듯 “우리에게도 때가 올 거야.”라고 말해지는 이 순간에서 우리는 케이프 커내버럴의 중력을 떠올린다: 커내버럴은 지구를 벗어나기에 최적화된 장소이며, 섬세한 우주발사를 위해 마련된 무대이다. 마찬가지로 두 아이에게 우주센터란 그들을 잡아끄는 현실에서 벗어나면서도, 좀 더 자신을 구체화하는 무대이다. 이때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게 기름의 밀도가 높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밀도가 더 높다는 건, 중력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자 그만큼의 유동성을 잃는 것이기도 하다. 밀도가 적으면 표면에 올라 이리저리 부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유는 다른 물질과 섞이지 않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차별화의 요소를 지닌다. 


차별화는 차이화와는 확실히 다르다. 차이화가 서서히 분화의 과정을 거친다면 차별화는 상대방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서 우주선의 원리에 가까운 건 차별화다. 그 점에서 중력이 가벼워지는 장소란 계급상승의 욕구로도 볼 여지가 있다. 우주선은 지구를 떠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지구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자신을 상승시키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센터가 자리한 커내버럴은 변하지 않는 현실을 발판삼아 더 높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상승욕을 보여준다. 이 경우 현실은 더욱 변하기 힘든 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물질의 밀도가 자신보다 더 견고해야만 비로소 자신이 표면에 떠오를 수 있으니 말이다. 요컨대 타인과의 분리가 더 견고해야만, 세계의 법칙이 더 견고해야만 비로소 내가 사회지도층이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 전반에서 카메라의 전지적 시점으로 나타난다. 예외적인 한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는 전적으로 죠니의 시점을 따르는데, 이는 영화가 갖는 회고적인 면이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 예외적인 한 장면은 폴이 병든 할머니의 곁을 지키면서, 전면으로는 거울 안의 모습이 바깥의 폴을 바라보고 카메라는 문턱에 걸쳐 이들 모두를 지켜보는 장면이다. 벨라스케스의 회화를 떠오르게 하는 이 묘사는 아주 확실하게 영화의 이중반영을 보여준다. 죠니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폴은 죠니의 삶에서 등장해오는 조연에 불과하지만, 영화가 죠니의 시선을 벗어나 세계의 바깥에서 이를 진입해 올 때 그곳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바깥’이 존재한다. 이는 카메라가 묘사했던 두 세계의 밀도가 사실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서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일 수밖에 없다. 이른바 죠니의 어머니가 가리키는 ‘때’로서, 커내비럴의 중력을 향해가는 죠니의 전환점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반대편에는 외할아버지(앤서니 홉킨스)의 죽음 이전에 제시된 손자와의 만남이 있다. 뼈암에 걸려 죽음이 예고된 상황에서 할아버지는 손자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로켓을 택한다. 비록 학습용 키트에 불과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비상의 현장은 할아버지가 손자의 꿈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당대의 로켓 기술이 추진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손자의 로켓을 바라보는 과정 이후로 탈락되는 외할아버지의 존재가 영화에서 내러티브 변화의 동인이 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죠니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신이 외할아버지처럼 가정을 잘 꾸려갈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이는 죠니의 가문이 유대인 이민자라는 점에서, 세대를 거듭했음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 점에서 죠니의 외할아버지는 현실을 잘 헤쳐나갔고 외할아버지가 죽은 현재에 들어선 부부가 그 몫을 대신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때 남겨진 이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계속해서 외할아버지를 기리는 게 아니라 그들의 몫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민자라는 정체성이 갖는 특유의 운동성이면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갖는 이합집산의 면모이다. 이들 가족은 할아버지의 역할과 삶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그런 삶을 줄곧 연장하면서 더 나은 현실 혹은 상위의 세계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는 부부가 죠니에 바라는 단 하나의 역할이기도 하고, 자신들 또한 그렇게 버려질 준비가 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로켓을 위로 보내면서 버려지는 추진체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로켓 발사 중계에서 우리가 보는 건 선두이지 선미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마겟돈 타임>은 버려진 기억을 응집하는 하나의 중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다지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영화가 제임스 그레이의 유년기에 기댄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레이건 직전이라는 특정 때를 설정한 이 영화가 기억의 저장고처럼 보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또한 영화가 그 자신을 들어가고 나오는 형식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밀폐공간으로 여겨지는 내러티브가 꿈들을 유폐하고 있으리라는 추측은 합당하다. 쉽게 말해 이 영화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들에 관한 영화로서, 제임스 그레이의 중력에 관한 영화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영화에 대해 사유하는 몇몇 지점들이 현실의 표면에 부유하는 꿈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는 우리에게 중력이 악화되는 커내버럴이 될 수 있다. 결국 이 영화에 제기되는 몇몇 논란은 그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붕괴의 입장에서 합리화된다. 


그런 점에서 <아마겟돈>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벌새>이다. 많은 면에서 두 영화는 유사한 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작가의 유년기를 그린다거나 어린 자신을 내세워 특정 친구와 함께하다 연이 끊기고, 자신을 도와주는 어른의 갑작스러운 죽음 등. 특히 <벌새>의 유의 깊은 장면 중 하나인 트램펄린은 주체의 입장에서 중력을 이겨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위아래로의 움직임은 어떤 정체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유대인과 같은 속성, 또는 늘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이민자로 이해될 구석이 있다. 트램펄린의 탄성은 일시적인 무중력 상태를 만들어주며 그 과정에서 주체는 자신을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를 벗어나 있을 수 있다. 물론 트램펄린과 로켓은 지구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비유이다. 전자가 여전히 지구에 남는다면 후자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점을 고려하면 <아마겟돈 타임>은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이면서도, 반대로 그렇게 완전하기에 오히려 하나의 디딤돌이 되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고통을 견뎌내면서 버려야 할 건 관계가 아니라 단지 모든 세계일 뿐이다. 요컨대 <아마겟돈>은 그런 측면에서 되려 완전성을 헤치는 과정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기억의 완전함은 변형 불가능성이거나 혹은 접근 불가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억에 출입구를 내지 않으면 그건 결국 삶을 위해 소모되는 추진체에 불과하다. 제임스 그레이에게 <아마겟돈>이 어떠한 순간을 묘사하는 게 되어야만 했던 건 그런 이유가 아닐까. 이야기를 구성함에 있어 그 출발점과 결말점이 달라야만 한다는 게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면, 그 전개 과정에서 벌어지는 탈락은 인물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자신의 기억을 다시 쓰는 방법은 이야기에 구멍을 내고, 그 시작과 결말 사이에서 무엇을 꺼트릴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영화가 백인으로서 흑인의 처지를 이용했을 뿐이라는 비판은 되려 무너지는 세계로 고찰되어야 마땅하다. 영화 스스로가 말하듯, “색깔이 어떻든 간에 중요한 건 바로 그 아이”라는 점인 것이다. 


자기 삶의 처지를 벗어나려는 이들에게는 자신을 잡아두는 중력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였다고 보아도 좋다. 제임스 그레이의 <아마겟돈>은 제목처럼 멸망의 순간을 다루면서, 그런 멸망이 유년기의 끝이 아니라 어떠한 순간이 일어나고 닫히는 일을 가리키게끔 한다. 이를 따르자면 세계가 무너진다는 감각은 결국 무수히 많은 순간 중의 하나일 뿐이며 반대로 그런 순간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른바, 지속은 순간의 연속이고 점과 선과 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 언젠가 비릴리오는 탈출속도에 관한 글을 쓰면서 우주선의 원리는 중력을 상쇄하는 추진력을 바탕으로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렇다면 <아마겟돈>은 “우리가 버리는 것보다 더 많은 기억을 안고 간다고 말하는” 부류의 영화다. 예컨대 이 생각의 연장선에서 영화는 세상을 살기 위해 내딛는 도움창이라 할 수 있다. <벌새>의 트램펄린이 소득 없이 돌아오는 귀환이거나 중력에 사로잡힌 절망이 아닌 것처럼, <아마겟돈>의 부유는 분리와 결합 사이의 미묘한 층계를 건드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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