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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25. 2023

풀려남과 마주함 사이

<파벨만스>(2023)

“여기에는 악당이 전혀 없습니다. 

단순히 선택만이 있을 뿐이며, 누구에게 상처를 주든 간에 

우리는 그런 선택을 하는 악당이 아닙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어린 새미(가브리엘 라벨)는 부모와 극장에 간다. 그 안에는 한 사내가 철로에 마주한 열차에 보내는 경고가 있고, 이내 영화는 열차의 충돌 장면을 보여주면서 새미에게 시각적 충격을 안겨준다. <파벨만스>의 도입부에 놓인 이 장면은 앞으로의 여정이 그러한 폭발의 순간이 될 것임을 보여준다. 가령 고다르는 영화를 두고서 “갑작스레 폭발하는 것이자, 그런 갑작스러움 속에 들어가 그 상태로 지속해야 하는 것.”라고 말한다. 영화를 폭발에 빗댄 이 묘사는 영화가 결말을 묘사하는 것을 어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지적하는데, 왜냐하면 ‘영화’란 그러한 폭발의 ‘이후’가 아니라 순간을 지속시킨다는 점에서 폭발의 순간을 결론점에 두고 그 이전까지를 재생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는 그가 프루스트의 소설을 두고서 ‘기억을 되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결부되어, ‘영화’를 무언가 기억을 담는 매개체가 아니라 그러한 기억의 끝자락에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게끔 한다. 말하자면 고다르에게 영화는 폭발이지만 그와 동시에 수복이었던 셈이다. 이를 따라 우리는 영화의 도입부를 두고서, 이 장면 이전에 새미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폭발을 마주한 그 순간에야 비로소 새미는 ‘자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따르자면 이 영화는 조각난 걸 다시 하나로 잇는 이야기지 어떠한 성장담은 아니다. 오히려 다시 떠올려서, 마지막 조각을 맞출 때 비로소 폭발의 순간에 자리한 ‘현재의 나’가 자리한다는 의미에서의 회고록에 더 가깝다. 


그런데 고다르 사유의 핵심은 무엇보다 이를 ‘해방’으로 표현한다는 점에 있다. “말하는 행위가 자동적으로 이끌지 않는 무언가”라고 말하는 그는 영화를 이미지의 조합이나 표면, 혹은 음악의 흐드러짐으로 파악한다. 카벨의 말처럼 영화가 자동적으로 꿈을 생산하는 기계라면, 이 기계는 상상하는 것일 뿐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전진에서 풀려나는 무언가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고다르가 말하는 ‘폭발’은 영화가 기억을 담고 있다고 말하거나 어떠한 상상적 구현물이라고 보는 게 아닌,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그동안 접근하지 못했던 구역이 해금된다고 말하는 것에 가깝다. 이를 따라 우리는 <파벨만스>를 단순한 회고록이라기보다는 <레디 플레이어 원>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게임의 서사에서 주인공은 능력을 개발하고 성장하는 주체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본래 갖고 있던 걸 되찾음으로써 마지막에 가서는 진정한 자신이 되는 회귀물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고다르도 “영화는 회귀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되찾은 시간에서 시작했고, 잃어버린 시간으로 끝낸다.”라고 말한다. <파벨만스>는 이러한 양측의 작업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작업이며, 영화에서도 두 가지 면이 잘 드러난다. 개중 전자는 새미의 어머니가 사랑에 빠지는 일을 의도적으로 편집한 것이며, 후자는 새미를 괴롭히던 친구를 영화가 있는 그대로 보여준 일이다. 전자가 현실이 보여주지 않는 걸 드러냈다면, 후자는 드러낼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즉 이들은 무언가를 되찾았고 또 그래서 잃어버렸다. 


이러한 면에서 고다르가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를 비판했던 것은 유의깊다. 고다르는 비판의 이유를 ‘잘못되고 그릇된 재현, 즉 헛된 것’으로 이야기하는데 이는 스필버그가 <파벨만스>에서 저지른 자신의 과오를 정확히 지적하기 때문이다. 고다르가 말하는 ‘헛되도다’의 의미란 어떤 다른 의미라기보단 있는 그대로 허튼일을 한 것에 관한다. 예를 들어 새미가 어머니를 위한 영화를 편집하지 않았더라면 그 안에서 어떠한 현실이 재현될 이유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새미가 친구들을 위한 영화를 편집하지 않았더라면 그 안에서 어떠한 현실이 재현될 이유는 없었다. 즉 여기서 영화는 꿈과 현실을 잇는 징검다리라기보다는 현실에 의해 드러나는 꿈 정도로 취급되면서, 차라리 현실을 ‘목격’하고 ‘재현’하지 않았더라면 꿈으로의 회귀는 벌어지지 않았으리라고 말해지는 ‘만약의 근원’이다. 예컨대 새미의 영화작업은 그 시작점에서 우리가 바라본 것과 같은 부류의 충돌이었던 셈이다. 이 충돌은 어떠한 탄생의 순간이 아니라 지난 삶을 돌아보며 현실을 재발굴하는 의미에서의 회귀, 되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잃어버렸다는 감각에만 더 몰두하게 하는 결여적 상상력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상상계를 상징계에 덮어씌우는 작업이다. 특히 새미의 졸업영화에서 그의 피사체가 된 친구가 말했던 “너는 내가 다가설 수 없는 나 자신을 만들었고 그렇게 남들을 속였다.”는 말을 떠올리면 이를 이해하기란 쉽다. 만약 영화가 꿈이라면, 그 영화는 부풀려져 현실을 감싸서는 안 됐다. 기본적으로 이는 격리를 전제하므로 그렇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극장이라는 추상적 공간에서 스크린에 투사되는 형태로 묘사되는 격리를 요구한다. 전통적인 장치 관념을 벗어나서도 영화는 자기만의 세계에 관객을 초대하기 위한 전제로 세계관으로의 격리를 요구하며, 이는 곧 관객이 영화의 법칙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점을 뜻했다. 그런데 문제는 격리는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특정 순간을 기준으로 재현이 끊겨버린다는 점이다. 바꾸어 말해 ‘격리’란 ‘순간’의 다른 판본과도 같아서 새미가 어린 시절에 목격한 충돌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새미가 극장에서 열차의 충돌 장면을 목격하자 새미의 어머니가 ‘카메라’를 통해 현실을 격리하자고 말했던 대목을 떠올려보자. “새미. 현실은 쉽게 망쳐지니까 현실을 촬영해서 여러 번 반복해볼 수 있는 꿈으로 만들어두자.” 새미의 어머니는 음악가로서 예술이 꿈을 형용하는 방식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다르의 말처럼 음악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면 어머니의 관점은 그러한 꿈이 바로 현실에 우선한다고 보는 것이니 말이다. 이는 새미의 아버지가 현실에서 꿈을 발명하는 천재라는 점과 반대되면서, 어머니가 새미의 꿈을 지지하는 것에 반해 아버지가 영화를 취미쯤으로 치부하는 면으로 나타난다. 이 상반된 관점 모두가 새미의 유전자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꿈의 초월적 권위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음악이 디제시스에 포함되지 않는 것처럼 꿈이 모든 것을 초월해 존재한다면, 그 꿈은 ‘바깥(디제시스)’을 암시하거나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어쿠스메트로)’을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앞서 말했듯 <파벨만스>가 스필버그의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해방의 일종이라면, 그것은 현재 삶의 대안으로서 ‘바깥’으로 기능하는 것이거나 혹은 자기만이 서술할 수 있는 사적인 면모라는 점에서의 작가 시점일 수도 있다. 특히 전자의 경우 이미 벌어졌던 일을 다시 서술하는 것은 오히려 꿈에서 현실을 풀려나게 한다는 점에서 다시금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영화는 ‘바깥’이 된다. 말하자면 이때의 영화는 대안적 과거 만들기의 일환으로 사유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고다르의 비판점은 다시금 생각의 여지를 갖는다: <쉰들러 리스트>에 대한 비판이 보여주지 말아야 했던 걸 보여주려는 시도에 가해졌다는 걸 떠올리면, 이 비판은 영화에서 새미가 만들었던 ‘영화 만들기 행위’에 제대로 부합한다. 또한 후자의 관점에서 이 영화가 스필버그의 회고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영화 만들기 행위는 감독으로서 자신에게 가해졌던 몇몇 비판에 대한 응답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굳이 보여주었다는 이 비판은 당사자와 현장의 멈춰버린 기억이 특정한 순간이자 이전의 연장된 형태로 현실에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쉽사리 들여와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의 ‘바깥’에 머무르면서, 상상계의 대안적 과거 만들기가 아니라 상징계의 결핍과 그에 따른 윤리 의식으로의 회귀에 가닿았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윤리’라는 건 딱히 쇼아의 경우처럼 희생적이고 거룩하게만 다가올 것만은 아니기도 하다. 다만 그러한 윤리가 생각보다 일상에 밀접하다는 점은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새미가 물려받은 두 가지 재능 중, 수학적 사고와 기술적 논리로 무장한 아버지의 면은 소위 테크니션이라 부르는 ‘기술자’의 면모를 강조한다. 평소 스필버그는 자신의 작업을 기술자라고 비판하는 일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시네아스트라는 칭호를 받기를 거부한 바 있는데, 사실 이 논리는 자신은 영화를 위해 봉사할 뿐이라는 고다르와의 유사점이 있기도 하다. 사운드가 영화 이미지의 시녀라고 말했던 관점에 반대해 사운드가 바로 영화 이미지를 지배하고, 결정한다고 말하는 고다르에게 꿈은 현실의 총괄 이사회이며 현실은 꿈을 위해 얌전히 봉사하는 시녀이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꿈이 시작되는 곳인 현실은 단순히 카메라를 통해 ‘말한다’라는 개념에서의 감독이 자동적으로 해낼 수 없는 ‘해방’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해방의 역할로만 주어진 이 현실은 어쩔 수 없는 운명, 풀려남과 마주함 사이의 그 불가분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마주하기에 풀려나는 것인지 아니면 풀려나기에 마주하는 게 있는 것인지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새미의 고민이 시작된다. 새미가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했던 건 가족을 위해 어머니의 사랑을 함구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영화에서 불필요한 곁가지를 편집해 더 매끄러운 진행을 담보하는 것이었을까.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사적 자아와 분리할 수 없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파벨만스>의 문법을 따르자면 현실은 꿈의 시녀라고 표현하는 게 더 옳을 듯하다. 말하자면 그 현실은 꿈을 풀려나게 하기 위해 요구되는 완고함의 결론인 것이다. 


고다르가 ‘헛되다’고 말한 대목은 바로 그러한 완고함을 지적한다. 현실은 어떤 고정장치가 있을 때만 비로소 꿈을 풀려나게 할 수 있다. 스필버그는 자신이 영화를 통해 현실을 믿는다고 말한 바 있고, 여기서 진실은 영화가 그렇게 한 게 아니라 반대로 꿈이 현실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더욱 공공연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즉 감독은 그런 의미에서의 리얼리스트다. 감독은 현실을 믿기 때문에 카메라를 드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없으면 현실이 관측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카메라를 든다. 이런 점을 의식하며 새미의 행적을 따라가면 영화가 보여주는 내적 갈등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새미는 그곳에 카메라가 있기에 카메라를 드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마땅히 찍어야 할 대상이 있기에 카메라를 드는 것도 아니다. 새미의 작업은 철저하게 일상과 비일상, 그러니까 우리가 소위 ‘꿈’이라 말하는 세계를 자신에게서 끄집어내기 위한 명상의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과학이 세계의 원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여러 관측의 도구를 이용하는 것처럼 예술이 세계의 원리로 꿈을 드러내는 방식도 관측의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는 어떠한 재현이라기보다 감독 개인이 특정 세계의 원리를 관측하여 사건으로 발굴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이 발견은 포착의 순간이 나이프의 투입으로 이어지는 부류의 폭발이 아니라, 인식의 선형성에 파열을 일으키는 벤야민식의 폭주기차로 보아야 한다. 새미에게 카메라는 폭발이 아니기에 폭력이 아니며 선형이기에 단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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