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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09. 2022

베이비박스의 문은 안으로 열린다

<브로커>(2022)


고레에다의 근작 <브로커>를 보고 나서 읽었던 글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건 ‘더 가디언’지의 리뷰였다.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는 베이비 박스를 두고서 ‘한국적 현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베이비 박스란 게 중세 유럽에도 있었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한국적’이라 표현하는 대목은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 말인즉 “보편적인 현상에 대한 한국적인 변형”이라는 대목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가령 <브로커>에서 난반사되는 주제의식 중 하나인 낙태에 대해 말해보자. <브로커>에서 소영(이지은)은 아이를 낳고 버리는 게 낳기도 전에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죄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 말은 그녀의 뒤를 쫓는 여성청소년과 형사 수진(배두나)이 “아이를 버리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못 박았던 것에 대한 정면 반박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논쟁은 꽤 평범하지만 영화가 무게를 두는 건 후자로, 고레에다는 동수(강동원)라는 캐릭터를 통해 소영의 행동에 설득력을 부여하고자 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부모’에 관한 동수의 경험담이 소영의 행동에 겹쳐짐으로써 영화는 소영에 무게를 실어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설득이 그동안의 논리를 와해시켜버린다는 점에 있다. 영화에서 수진이 잘 지적하듯, 낙태라는 행동은 윤리적 접근 이전에 미혼모 등에 관한 제도 정비를 요구한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낙태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은 눈물과 모성애가 아닌 법치와 복지의 영역에서 다뤄져야만 했다.


우리가 고레에다에 실망해야 한다면 이 대목을 지적하는 게 응당 옳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동안 고레에다의 영화는 소위 말하는 ‘아버지의 법’이 아니라 ‘바깥’ 아버지의 법에 좌지우지되었으니 말이다. 잘 알다시피 아버지의 법이란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아버지 아래의 사회에 받아들여질 준비를 하라”고 말하는 자크 라깡의 주장이다. 그리고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법치란 바로 그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만약 어머니의 품을 두고서 가족의 원초적인 기능이라 볼 수 있다면, ‘법’을 실행하는 일은 그러한 원초적인 지점과 타협하고서 바깥세상에 나가는 걸 뜻한다. 그러니까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주제가 되는 건 ‘홀로서기’, ‘타협’, ‘성장’과 같은 주제이고 이를 지적하려면 언제나 바깥 세계의 법을 끌고 와야만 했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영화의 사회적인 면이라던가 동시대성이라던가 하는 게 성립했던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브로커>는 어떤가. <브로커>는 모성애만 있을 뿐 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선명히 드리운 그늘을 애써 모른 체하고 있다. <브로커>에서 소영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투입된 남편 살해와 미망인의 추적담은 ‘미혼모’가 아닌 ‘범죄피해자 구제’ 카테고리로 연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동수의 “그냥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설득되어버린다”는 미숙한 봉합으로 연결되고야 만다.


이 미숙한 봉합이 바로 ‘신파’라는 눈물과 모성애, 한국적 현상이라 할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베이비 박스에 아이가 들어가는 순간, 아기를 버려야만 했던 부모의 사연은 사라지고 아기가 버려진다는 결과만이 남는 게 베이비 박스기에. 이른바 과정은 삭제되고 결과만이 남는다는 법칙이 영화의 내용에 결합할 때, 아이를 인신매매하는 브로커 일당의 여정은 그냥 악당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영화의 도입부를 생각하면 소영은 아이를 베이비 박스에 넣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베이비 박스에 넣어지지 않았다는 건 그 자신의 사연이 박스 밖에서, 즉 아버지의 법안으로 들어가는 걸 원치 않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 아이를 박스 안에 넣는 건 되려 그런 법안에서 활동해야 할 경찰이다. 경찰의 함정수사를 위해 이용된 이 아이는 그녀의 말에 따르면 ‘바깥에 그대로 방치되었다면 진작에 죽었’겠다만 잘 생각하면 구출된 후에도 계속해서 ‘바깥’에 방치되어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영이 했던 말을 이 대목에도 그대로 돌려줄 수 있지 않을까. 박스에 넣기도 전에 방치되는 아이와 박스에 넣어졌음에도 방치되는 아이의 관계에서 후자에 더 큰 죄를 물리는 일은 언뜻 보았을 때 법안의 일로 보이지만, 사실은 사연에 강하게 의존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 사연을 시연하는 역할을 상현(송강호)에게 맡긴다. 그들의 낡은 자동차는 ‘사연 있어 보이는 여자’인 소영에게 고백의 시간을 선사하기 위해 달린다.


여기서 초점은 신파라는 장르가 한국적 맥락이 있다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법 제도의 안에서만 움직이려 하는 영화의 수동적인 태도에 있다. 이 앞에서는 여성청소년과의 두 형사가 살인 용의자를 긴급체포하지 않는다는 알 수 없는 전개도,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영화 마지막의 입양 부부의 다짐도 무기력해진다. 세세한 것까지 파고들면 영화라는 기적의 이름이 무색해지고야 말겠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베이비 박스를 언급한 이상, 우리는 그러한 환상이 오가는 틈입으로서의 ‘영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앞서 나는 베이비 박스의 안팎을 법이 작용하는 구역, 혹은 그게 교류하는 하나의 통로로 규정했는데 사실 영화라는 매체의 기능이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현상과 현실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영화’란 사람들의 현실 인식과 응시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보여주곤 한다는 걸 우리는 고레에다에게서 잘 봐왔다. 그의 <세 번째 살인>에서 취조실 격벽에 겹쳐지는 양측의 얼굴 이미지 등을 떠올려보자. 고레에다는 (법) 안 사람과 바깥사람을 대비하면서 이를 토대로 출구전략을 모색하는 사람이었고, ‘가족’이라는 건 사실 그걸 표현하기 위한 형식일 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고레에다는 가족이라는 집단이 갖는 성격이 영화 매체의 구성과 유사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가족은 여러 다양한 것들에서 파생되는 자신을 지칭하는 그룹이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그런 방식으로 현실에 엮이고 그렇기에 현실은 늘 영화에게 아버지가 된다.


쉽게 말해 가족이라는 집단은 자신을 좌표화할 수 있는 다른 지표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현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지적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론인 셈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브로커>의 문제는 그 아버지의 법도와 동일할 테다. 정신분석을 끌고 올 생각이라기보단 이 관계를 통해 우리가 ‘한국적’이라는 말을 돌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다. 가령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시대적 흐름에 빗대어져 왔다는 점을 고려해보자. 군부정권에서 독재타도를 외치는 일은 아버지에 들고 서는 일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호통에 집을 뛰쳐나가는 자식이 있기도 했다. 이는 소위 말하는 가부장제로 설명될 수 있지만, 이러한 제도 안에서 자연스레 파생되어 실행되는 행동 양식은 오히려 그 자신의 배경이 되는 사회적 현실을 주연 인물의 감정이나 관계를 통해 자연스레 내보인다. 마찬가지로 <브로커>에서도 현실에 관한 문제는 분명 있다. 이 현실은 베이비 박스라는 출입구를 통해 영화 안으로 들어와 입양이라는 형태로 수입되어 오길 간청한다. 하지만 소영이 베이비 박스 밖에 내려놓은 아이가 두 형사의 인위적인 손길을 통해 박스 안으로 들어갈 때, 영화가 내보일 수 있는 기적의 힘이란 초장부터 모두 상실되고야 만다. 이 개연은 말 그대로 그 자신의 성질을 잃어버리고야 만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이야기는 마치 엉성하게 급조한 범죄 현장처럼 보인다. 엉성한 브로커 역할을 수행하는 상현처럼 말이다.


어쩌면 엉성한 브로커 역할을 수행하는 건 상현 일행만이 아니라 영화 전체일지도 모른다. 브로커가 A를 B로 몰래 밀수하는 것을 중개하는 역할이라고 가정했을 때, 이는 받아들여지기 힘들거나 논란거리인 개념을 현실에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의 역할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들을 착하다고 주장할 뿐인 브로커 일당의 모습은 <브로커>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브로커>에는 선함만이 있을 뿐 그에 따른 이유나 항변 등은 없다. 오히려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 의도를 흐려버린다. 늘 그랬듯이 고레에다의 이 영화에도 등장인물이 뒷말을 흐리는 장면이 수차례 등장하는데, 개중에서도 월미도로 향하는 열차 장면을 떠올려보자. 상현이 소영에게 “너무 늦진 않았을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을 그녀는 듣지 못한다. 바로 이 순간 우리가 고레에다의 가족에서 읽어낼 수 있는 행간이 등장한다. 상현이 소영에게 전하지 못한 이 말은 그동안의 행적이 그저 바깥세상과의 괴리를 통해서만 동작했을 뿐이었음을 드러낸다. 상현의 이 말은 소영에게 전달되지 않음으로써 그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지적하는 것으로 목적지를 바꾸게 된다. 그리고 상현은 이 말이 자신에게 돌아온 것에서 바깥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이 세계의 한계를 본다.


너무 늦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면 그 반대편엔 너무 이른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있는 걸까. 그렇다면 여기서 사건은 도래한 것일까 아니면 닥쳐온 것일까.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너무 이르다는 사실도 있을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은 기적이 진짜로 일어날 일이 없다는 걸 알기에 진짜로 일어나게 될 것을 믿는다. 영화에서 아이를 대하는 소영의 태도는 거진 그렇게 보인다. 자신의 아이를 베이비 박스 아래 내려둘 때 그녀가 첨가한 “다시 돌아오겠다”는 문구는 동수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모든 (아이를 버린) 엄마가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한 일이 일어날 리 없기에 오히려 그러한 마음을 진실되게 가질 수 있었기도 하다. 생각해보기에 영화가 가진 여러 모순적인 지점은 어쩌면 위의 맥락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만도 같다. 영화는 그들이 어떤 바깥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혹은 애써 무시해버린다. 이 브로커들은 잘 준비된 예비 부모들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이들이 정말로 부모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혹은 그렇게 믿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즉 이미 ‘예비된 것’은 안으로 침투할 수 없게 내적 견고함이 형성되어 있으며, 바로 이런 이유로 중세 유럽이라는 뿌리 깊은 역사의 베이비 박스는 그 바깥이 가려지고 온전한 한국적 맥락에 편입된다. 베이비 박스 안에 아기가 인위적으로 거둬진 순간, 영화는 ‘버려졌다’는 결론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한다. 다시금,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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