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Jun 06. 2022

애프터 양: 이미 여러 차례 끝나버린 삶

<애프터 양>(2021)


코고 나다의 <애프터 양>을 보면서 문득 오즈를 떠올렸다. 이는 코고가 오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점에서, 또한 오즈의 각본가 이름을 자신의 예명으로 취했다는 점에서 영화 외적인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꽤 재밌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외적인 일을 불필요하게 끌고 오는 일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지만, 어떤 영화는 본편보다 흔적이 더 흥미롭기 마련이다.


가령 코고가 영화에서 대놓고 오마주를 바친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이 영화의 주요 삽입곡인 [Glide]를 정식으로 커버업 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릴리 슈슈>에서 소년은 (아마도 원작에 충실한) 단절과 이어짐을 반복하는 기억 속에서 노래를 듣는 바로 그 순간만 자기 주체를 확보한다. 이는 소년이 음악에 푹 빠져버렸다는 점을 뜻하기도 하지만 기억=나, 연속성이라는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는 것이기 도 하다. 이른바 기억의 지속(durability)이 곧 자신을 규정한다. 그리고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혈연관계라는 점에서, Family가 Familiar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띤다. 가족은 익숙한 기억들을 통한 하나의 집단으로 규정되며 그런 기억이 익숙함을 잊기 전까진 그 형태를 잃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변형하자면, ‘나’라는 건 결국 ‘한 존재’가 가진 속성을 여러 기억이 나눠 가진 것으로도 볼 수 있을 테다. 여러 닮은 것에서 ‘나’가 도출되는 것이지 나로부터 여러 닮은 것이 산출되어 나오는 게 아니다. 이에 따르면 <애프터 양>에서 오즈를 지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오즈 영화의 특징은 가족을 하나의 존재처럼 그린다는 점인데, 오즈 영화에서 가족은 그저 존재할 뿐 그 자체로 ‘나’라 할만한 게 되진 않는다. 오즈 영화의 ‘나’는 존재하는 가족의 양상 안에서 피어나는 여러 기억에 공통분모를 지적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이는 상호 간에 공유하는 정념인데, 그 특성상 겉으로는 관측되진 않지만 여러 간접적인 신호를 통해 이를 감지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가족은 지속되는 기억을 간접적인 형태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집단이다. 그러니까, 오즈의 가족은 당대의 스테레오 타입이라기보단 입방체에 가깝다. 오즈의 영화에서 가족들에겐 저마다의 역할이 있지만, 아빠가 어머니의 역을 맡거나 첫째 딸이 둘째 딸의 역할을 맡는 식으로 대본이 바뀐다면 가족의 형태는 굉장히 달라질 것이다. 이러한 점은 오즈의 영화가 왜 정해진 역할극인 ‘연극’이 아닌지를 설명해줌과 동시에, 코고가 왜 <애프터 양>의 가족 구성을 다문화로 지정했는지에 대한 한 가지 단서가 된다. <애프터 양>의 가족 구성은 다문화지만 다양한 기억을 전제로 하고 있진 않다. 이들 사이에는 명실상부한 하나의 기억이 있으며 이는 그 가족 구성이 왜 스테레오 타입이 아닌 디폴트값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


제이크(콜린 패럴)와 카이라(조디 터너 스미스)의 딸인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는 입양아다. 중국계인 딸을 위해 부부는 중국 문화를 가르쳐줄 생체로이드 양(저스틴 민)을 들여온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양과 함께 한 미카에게 양은 대체할 수 없는 하나의 가족이 되었고, 그래서 미카는 ‘새 제품’을 사달라는 게 아니라 ‘양’을 돌려달라고 말한다. 요컨대 미카의 기억에서 양은 하나의 디폴트값이며, 이는 미카의 친구들이 그녀를 입양아라는 스테레오타입으로 다루는 것과는 정반대다. 결과적으로 이는 코고 나다가 말하듯 “모든 사람이 아메리카인인 건 아니다.”라는 점에 대한 문제의식이 된다. 가령 미국의 입양아들은 미국인인 자신을 디폴트 값으로 ~계인 자신을 스테레오 타입으로 발명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는 원본과 복제의 관계에서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지의 문제와도 일맥상통한다.


미국계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에서 덮어씌워진 건 전자일까 후자일까? 딱 잘라 말하기 힘든 노릇이다. 부부는 그들의 딸에게 중국의 문화를 가르쳐야 한다고 믿지만, 이 판단이 민족 정체성에 대한 보존의 시도인지 아니면 그러한 정체성으로 자신을 재발명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딸을 위한 행동이겠지만 원본을 무엇으로 규정하는지에 따라 덮어씌워 지는 쪽이 달라지기에 이는 구분되어야 한다. 여기서 기억에 대한 흥미로운 단상 하나, 기억이 덮어 씌워진다면 이전의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거나, 혹은 좌표값의 매칭으로만 즉 흔적만이 남을 뿐이다. 우리가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는 건 그덕분인데, 이에 따르자면 기억은 늘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니라 그런 흔적에서 파생되는 셈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애프터 양>과 같은 다문화 가정이 성립하는 방식이 흔적에서 기억으로의 이행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방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하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대개 사람들은 이 흔적을 확실히 인지하고서 그다음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잠시 외출한 사이 방을 청소해놓은 게 부모님일 수도 있지만, 방을 어질러 놓고 나간 건 강도와 같은 낯선 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판단은 모두 전적으로 자신의 이전 기억에 미루어 이뤄진다. 만약 집을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이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이 방은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방 안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삶을 기억해내려면 방 안에 남은 흔적에서 자신의 기억을 꺼내야만 한다.


이 일화가 말해주는 사실은 기억이란 게 사실은 그것과의 연속성을 통해 인지되고 확보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에 따르자면, 영화가 하나의 기억으로 기능하는 방식이란 자신을 규정하는 틀 바깥의 세상과 이어짐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흔적이고 사람들은 이 안에서 자신의 기억을 꺼내 그것을 삶으로 취한다. <애프터 양>의 코고 나다가 오즈에게서 가져온 방법론이 있다면 바로 그러한 흔적론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가족은 늘 하나의 흔적이자 기억의 방이었다. 하지만 오즈 영화의 아이러니는 그런 흔적을 뒤늦게 발견했을 때야 비로소 그들의 삶이 기억으로 살아난다는 점에 있다. 이 대목에서 무(無)라는 단어가 탄생한다. 오즈의 묘비에 적힌 단어이자 양이 말하는 애벌레 시절의 끝.


*


무(無)는 부재의 흔적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예를 들어 “무언가 부재한다는 건, 한때 그것이 존재했다는 뜻이며, 분명히 존재하던 게 당신에게서 고개를 돌렸다는 뜻이다.”[1]반대로 말해 이는 우리가 무와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다는 점을 뜻하며, 그러므로 무는 당장의 현실에 남은 흔적으로만 간접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는 사실상 기억과는 상반되는 입지의 단어다. 기억이 연속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보한다면, 무란 그런 연속의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끝’을 말하는 생체로이드 양의 말은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애벌레의 끝은 나비의 시작”이라는 양의 말은 단절에 대한 정서를 지속으로 옮긴다.


영화에서 양은 시스템 영역과 사용자 영역으로 나뉜 기억 체계를 갖는다. 후자가 기기를 부팅 해 사용자가 이를 사용하는 동안의 데이터를 쌓는 영역이라면, 전자는 제조사 단에서 관리하고 기기 자체가 존립할 수 있게 해주는 작동의 영역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에게는 다른 생체로이드에게는 없는 기억 능력이 있었고, 연구자는 이를 블랙박스라고 부른다. 새것이 아닌 리퍼비쉬로 구매한 양에게는 자신을 거쳐 갔던 여러 사용자의 기억이 담겨있었고, 이는 단지 사용자 단에서 접근할 수 없게 막혀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제이크는 데이터에 접근하며 양의 기억이 이곳에서의 삶을 초과한다는 점을 발견한다. 양을 구성하는 것은 이곳에서의 삶 이상이었고, 이미 여러 차례 끝나버린 삶이기도 했다.


양은 자신에게 새겨진 데이터가 자신의 삶이 될 수 있는지에 의구심을 갖는다. 그 데이터는 메모리의 관점에서는 기억이라 할 수 있지만 남겨진 현재와의 연관성이 없다는 점에서 ‘흔적’이 되진 못한다. 그렇다면 이를 두고서 ‘양’의 기억이라 할 수 있을까. 양은 로봇이고, 초기화될 때마다 한 번의 삶이 끝난다. 그 말인즉 양은 매번 다른 삶을 살았고 지금의 양과 메모리에 담긴 양은 다르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양이 말하는 끝은 그가 인용한 노자의 말[2]과 연결된다. 중국인들은 나비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양의 일화는 호접지몽에 대한 간접적인 지적인데, 애벌레와 나비 사이에는 그 어떤 연결고리도 찾기 힘들 정도로 흔적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비는 애벌레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을까.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있다고들 하지만 문학적 은유로 보면 이는 결국 마땅한 흔적을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억의 단절로 여겨지기 일쑤다. 이에 따르면 양은 매번 다른 삶을 살았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는 끝내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란 게 그렇듯이 영화가 하나의 기억이 될 수 있는 건 자신이 남긴 흔적에 ‘끝’이라는 마무리를 부여하는 덕택이다. 그리고 내가 <애프터 양>을 보며 오즈를 떠올린 건 바로 그 ‘끝’이라는 맥락이 오즈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가족이라는 집단은 인류 사회에서 하나의 흔적 기관으로 남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면 기억의 고유 능력은 가족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맡겨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블) 영화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