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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06. 2022

(마블) 영화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2022)


싸이의 9집 앨범에 실린 인트로에서, 다음과 같은 말장난이 들려왔다. “싸이월드, 싸이버거, 9집을 낸 싸이.” 단순한 말장난으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이를 생각하다 문득 마틴 스콜세지의 기사 한 편이 떠올랐다. 시네필과 마블 팬들 사이에서 긴밀히 돌았던 “왜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닌가?”라는 제목의 글이다. 마블 영화 전체에 어떤 평가를 가감하려는 건 아니지만 내가 이를 떠올린 것은 꽤나 단순명료한 감정에서 귀인했다. 그건 바로, 마블 영화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블) 영화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보기 전에 디즈니 플러스의 TV 시리즈인 <완다 비전>을 먼저 보고 가라는 말이 많았다. 이는 단순히 생각하면 “이걸 보면 더 맛있게 즐길 수 있어요”라는 권유이겠지만, 어떤 관객에겐 영화를 너무 어렵게 하는 진입 장벽이기도 하다. 한 편의 영화를 즐기기 위해 다른 부수적인 사항을 알아두어야 한다는 점은 어린이날과 같은 휴일에 영화관을 즐기는 일과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보낼 요령으로 개발된 유희거리였으니 말이다. ‘시네마’라는 예술로서의 분과를 떠올려볼 수도 있겠지만 마블 영화의 지향점은 그것과는 다르다. 마블 영화는 더 많은 관객이 자신들의 세계관에 들어와 뛰어놀다가 미래에 구매력을 지닌 성인으로 성장하길 원한다. 그렇기에 마블은 한 편의 영화로만 이야기를 끝내서는 안 되는, 일종의 ‘동화적인’ 목표가 있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떠올려볼 때, 한 편의 영화로 해결되지 못할 정보를 품는다는 건 (게임으로 빗대자면) 오픈 월드에서의 탐색이라기보다 DLC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금하는 것과도 같다. 추가적인 결제를 해야만 자신이 즐긴 이야기가 ‘완전’해진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과금요소로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추가적인 재화를 지불할 바에는 차라리 ‘이쯤 그만두자’며 자리를 이탈해버릴 공산이 크다. 


평소 나는 마블 영화의 팬이 아니라고 말하는 편이지만, 적어도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들은 모두 챙겨본 입장에서 더는 ‘마블팬’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 <엔드 게임> 이후의 마블 영화는 극장 안에 개봉하는 영화들로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런 사정의 배후에는 본격적인 IP 합병을 진행 중인 디즈니 콘텐츠 사업팀이 있다. 디즈니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많은 IP를 집어삼키는 중이며, 이러한 관리 아래 작품 간의 상호 교류가 활발해졌다. 마블 영화에도 엑스맨이 나올 수 있고 디즈니랜드에 심슨이 등장할 수 있으며 이러한 추세라면 <주먹왕 랄프2>나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IP 집약은 수도 없이 이루어질 테다. 문제는 <대혼돈>이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들어 이들을 자사의 세계관에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대혼돈>은 멀티버스 개념을 통해 자사의 IP로 편입시킨 콘텐츠들, 판타스틱 포-블랙 볼트-인휴먼즈와 같은 인물을 작품의 주된 서사로 끌어온다. 그런데 이들을 서사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란 스트레인지의 지구로 그들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스트레인지가 그들 세계로 침입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자사의 IP를 차례로 편입시킨다기보단 “원래부터 이들은 있었는데, 우리가 시야의 협소함으로 여태까지 보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듯 보인다. 


이는 우리가 전통적인 시네마에 기대하던 역할과 유사하다. 어떤 영화는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현실과 함께 살아가노라고 선언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명목하에 이런 관점은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의 세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대혼돈>의 경우처럼 또 다른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이 “같지만 다른 것”이 될 경우, 이는 우리 세계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는 결국 다른 세계에서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결론이 되고야 만다. 이 경우 시각이나 재현의 논리는 이미 존재하는 사건과 그런 사건들이 이미 변형되어 버린 방식 사이에서 자리를 잃는다. 여태까지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여주고자 그토록 노력했던 걸까? 그냥 이런저런 문제들이 해결된 멀티버스를 하나의 이미지로 제시해버리면 그만일 텐데 말이다. 그 말인즉 멀티버스는 그것이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 작용하기에 문제가 된다. 어떠한 사건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이해할 때 더 깊고 풍부해진다. 우리는 이를 시간의 작용이라 부르며, 영화가 역사라는 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시간의 압박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한 편의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앉아있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가 과거와 동떨어지지 않음을 전한다. 그러나 멀티버스는 그냥 그곳에 문제가 있고 우리는 별다른 이해 없이 그걸 받아들여야만 한다.  


따라서 마블 영화의 멀티버스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란 어려워진다. 마블 영화가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우리의 눈을 가린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의심하여 탈출구를 모색하던 기존의 노력들을 모두 멀티버스라는 이름으로 무마해버린다는 뜻이다. 현실세계에서 이미지와 역사에 관한 연구는 모두 시간의 압력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자신이 본 게 정말 옳은지를 의심해야 했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은 대개 거울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마블의 세계엔 거울 속의 세계가 실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마블 프렌차이즈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만약 우리에게도 거울 속의 세계가 실존한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낳는다. 우리 눈, 혹은 우리 자신의 사고 한계를 인정한 결과로 탄생한 게 거울로 위시되는 정신분석이라면, ‘거울 속 세계’라는 건 그러한 의심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마블과는 무관하지만 아라키 히로히코의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견된다. 파문과 같은 비교적 현실적인 설정 안에서 움직이던 3부에서는 모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거울 속 세계란 실존하지 않아요.”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후 ‘귀신’ 등으로 지칭되던 스탠드 개념이 본격적으로 정립된 5부에서는 거울 속 세계가 정말로 있다. 이러한 묘사의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는 그게 6부에서 ‘일순 후의 세계’라는 평행세계로 가기 위한 기초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하나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으려면 ‘거울’이라는 개념을 깨부수어야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멀티버스로 이행하는 <대혼돈>은 어떠한가. 우선 이 영화는 스트레인지가 주역이지만 그만큼이나 완다의 비중도 크다. 그리고 스트레인지가 완다를 막아내는 입장에서 갈등의 주 요소는 완다에게 있으며, 그런데 작품은 완다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말은 이미 앞에서 했던 것이지만 이 대목에선 스트레인지에게 별다른 갈등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섬뜩한 오프닝과 함께 시작되는 이 영화에서 스트레인지의 갈등은 그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 있다. 스트레인지가 맞서 싸워야 할 적은 완다라기보다 다른 차원의 자신처럼 보인다. 스트레인지는 공리를 위해 소녀를 죽였던 다른 차원의 자신과 경쟁해야 하고, 타노스를 막기 위해 다크 홀드에 손을 댔던 차원의 자신과 경쟁해야 한다. 즉 멀티버스의 세계에선 ‘만약’이라는 속으로만 던져져야 할 질문이 정말로 현실 세계에 구현되어 있고, 이는 우리가 내적으로 해결해야 할 정신의 문제가 외부에 펼쳐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세계의 거울 속은 정말로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건 완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인지 또한 정신적으로 치유된다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스트레인지는 사랑하는 연인을 잃던 순간에 깨져버린 손목시계를 수리하고, 이를 보관함에 넣어둔다. 이는 두 사람 모두 트라우마를 그러한 멀티버스에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치유했다는 점에서 정신분석학적인 외부를 상상케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울 세계를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시간에 굴하지 않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맥락에서 멀티버스에서 온 소녀가 말하는 “이곳 세계의 스트레인지는 달라요.”라는 말은 영화의 전반적인 주제의식을 관통한다. 영화에 나오듯 꿈이 다른 멀티버스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장이라면, 멀티버스를 치유하는 일은 곧 개인의 실존하는 트라우마를 처치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현실을 구하는 일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요컨대 <대혼돈>은 마블 영화의 세계관을 더 넓게 열어주는 관문이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개요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당장에 사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취합만 가능하다면 꽤나 진취적이다. 그러므로 마블 영화는 확실히 스콜세지가 말하는 부류의 시네마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시네마가 갖는 정신분석의 능력은 영화를 보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멀티버스는 ‘나’를 우리로 만들고, 이들을 각자의 자리에 배치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시네마와는 다르다. 어쩌면 과거에는 정신분열로 묘사되던 일이 무수히 많은 취향으로 개변됨에 따른 결과물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과거에서, 수없이 존재할 수 있는 ‘나’의 세상은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걸 우회하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즉 석유는 고갈될 것이지만 석유를 발굴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진화할 수 있듯이, 현실의 가능성 또한 스트레인지처럼 무수히 많은 우회로로 존재한다. 그러니 영화가 점점 어려워지더라도, 우리는 오히려 수많은 멀티버스를 상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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