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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22. 2021

하나의 베를린에 공존하는 두 개의 시간

<운디네>(2021)


펫촐트의 영화 전부를 보지 않은 나에게 이 영화에 대해 말할 권리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감독의 영화 전편을 보아야만 영화 한 편을 논할 수 있다는 생각도 이상한 것이기는 하다. 다만, <피닉스>(2021)를 보면서 이전에 보았던 그의 다른 영화 <운디네>(2020)가 떠올랐다. 명확한 한글 자막 없이 영어로 관람해야 했던 나에게, 영화는 말이라기보다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운디네>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나지막이 들려오는 “운디네”라는 이름이 이 영화의 주요한 이미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병규 평론가의 지적처럼 이 영화를 유령의 도식으로 읽는다면 그렇다. 하지만 내가 <운디네>에서 들었던 이 목소리를 <피닉스>를 논하는 자리에서 꺼내든 이유는 본편을 유령의 힘으로 읽어내고자 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닉스>는 유령이 아니라 사람을, 더 정확하게는 이것이 유령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임을 확고히 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다소 간추려 말하면 이는 다음처럼 서술될 수 있을 듯하다. “두 개의 인격은 어떻게 하나의 육체에 공존할 수 있는가.”





*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의 배경설정을 짤막하게 짚고 넘어가자. 영화의 배경은 종전 후의 베를린으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귀향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상태다. 영화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종전 후에는 죽었(다고 여겨지)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일이 많아서 재산이나 결혼과 같은 면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들 한다. 한국의 경우는 한국전쟁 때 그러했는데, 이는 영화가 묘사하는 귀향의 문제가 구태여 베를린의 맥락에서만 해석될 필요가 없음을 말해준다. 쉽게 말해 이는 나치와 유대인 간의 문제 바깥에서도 고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에서 그러한 문제를 배제하기 힘든데, 왜냐하면 나치와 유대인의 사례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재현의 문제를 서구 지성에 던졌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이는 아우슈비츠와 관련 있는데, 아우슈비츠를 두고 벌어지는 재현의 문제가 양측의 의견을 사이에 두며 서로 대립했다는 점에 귀인한다. 아우슈비츠의 부역자들이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사건 또한 없었던 것”이라고 궤변을 성토할 때,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은 “그곳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증언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이것은 ‘사건’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양측의 의견 대립은 오직 사람만이 증언할 수 있다는 것, 또한 그러한 증언이 사건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공통적인 근거를 두는 듯하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찰로 나아간다. 오직 인간만이 증언할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해를 먼저 요구하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이는 어떤 ‘상태’에서야 비로소 ‘인간’임이 완성되는가 하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이는 누구든지 특정한 상태에서는 인간이 아니게 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은 그들이 처한 상태(Condition)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여기서 개입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랑시에르가 지적하였듯이 역사가들이 시간을 구성함으로써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이때의 ‘사건’은 아우슈비츠를 바르게 재현해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역사가들의 관점은 시간 안에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이지만,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에게 그곳의 시간은 ‘이야기’될 수 없는 장소이며, 따라서 사건이 되지 못한다(「말들의 역사, 역사의 말들」).



이른바 영원이라 불리는 이 감각의 상태는 더는 사건이란 게 발생하지 않는 정지 상태를 의미한다. 단 하나(The One)의 사건이 모든 사건(The ONE)을 지시하는 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이는 이야기 없이 사건도 없다는 점과 그러한 시간이 모종의 장소성과 결합되는 경우의 수 모두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어떤 면에서, 시간의 무화가 지적하는 바는 그러한 공간이 계속된다는 영속성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의 시는 없다.”고 말했던 것은 아마도 다음처럼 바꾸어 쓰여야 할 것만 같다. “이제 더 이상의 사건은 불가능하다.” 앞으로 줄곧 나아가기만 하던 시간이 자신의 꼬리로 되돌아감으로써 기억은 이 울타리 안에 갇힌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시간은 멈춘다.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을 잃지는 않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운동 에너지를 잃고야 마는 상황에는 이러한 과정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마치 궤도 상의 인공위성처럼 기억의 중력에 의해 자신의 운동 에너지를 잃지 않고 있다. 이 양가성은 앞으로 나아가는 상태가 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는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적절하게 설명해준다.



기본적으로 시간은 흐르는 것이지만, 거대한 중력 안에서 시간은 다르게 움직인다. <피닉스>는 이야기 하지 않는 여자를 움직이는 시간으로 바라볼 때, “하나의 베를린에 공존하는 두 개의 시간”으로 읽어낼 수 있다. 첫 번째로 움직이는 시간에 대해 말해보자. 움직이는 시간이란 말 그대로 넬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그녀에겐 조니가 떠올리기 싫어하는 과거의 시간이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녀 자체가 아우슈비츠라는 시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자면 조니가 넬리의 유산을 차지하려 했던 것은 죽은 이에 대한 냉대라기보다, 그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었고 그의 반대편에 서 있는 대립항인 유대인들에 대한 응시의 거부로 읽혀지는 면이 있다. 따라서 조니와 넬리의 관계에서 중요한 건, 조니가 넬리를 버리고 떠났는지가 아니라 조니가 어떤 시간에 휩쓸려있었고 그에 따른 결과로 현재는 어떤 시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따져 묻는 일이다. 이곳에서 넬리라는 시간은 사라져버렸으며, 이에 따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시간이 아닌 그 전후의 것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한 화두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반에 넬리의 친구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채, 그녀가 본래 있던 곳으로 다시금 돌아간다: “우리에겐 돌아갈 곳이 없다고 말했지. 하지만 나아갈 곳도 없어. 나는 삶보다 죽음을 더 가까이 느껴.” 여기서 그녀가 본래 있던 곳은 다름 아닌 어둠이다. 이 어둠이라는 표현은 밝기의 정도가 아니라 비가시성에 대한 묘사로써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비가시성을 지닌 두 개의 시간에 대해 말해볼 수 있을 테다. 돌아갈 곳이 없고, 나아갈 곳이 없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연장된 현재와 현재에서 이어지는 미래라는 두 개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즉, ‘돌아갈 곳’은 이미 가버렸고 ‘나아갈 곳’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에 따르자면 넬리의 친구가 하는 말은, 그들의 시간은 현재를 기준으로 하며,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 모두가 죽음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바꾸어 서술하면 이는 죽음은 이미 가버렸고,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곳에 죽음이란 아예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죽음이라는 표현은 “사고 불가능성과 어울리는 제시 불가능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랑시에르).



이른바, 그것을 생각할 수도 없기에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침묵은 조니가 자신의 죽은 아내를 닮았다고 생각한 ‘넬리’에게 말을 아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아우슈비츠의 바깥에 있던 사람들에게 아우슈비츠는 재현의 대상이 될 수 없기에 전 아내와 닮은 넬리는 아내였던 ‘넬리’로 보아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경우, 넬리를 이상하리만치 거부하는 조니의 모습은 다르게 볼 여지가 있게 된다. 이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조니의 모습이란, 넬리 친구의 말처럼 배신자일 테지만 어쩌면 그는 나치 시대를 이루었던 평범한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전쟁에서 민간인이란 없다”고 말했던 커티스 르메이의 논란 있는 발언 하나를 알고 있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기에 이 말은 “전장에서 무고한 시간이란 없다”라는 문장으로도 바꾸어 서술될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사실 여부에 맞지 않는 것을 두고서 상대방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을 ‘무고죄’라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전장에서 무고한 시간이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곳에 사실이 아닌 시간이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피닉스>에서 베를린이라는 장소는 그 누구도 아우슈비츠와 연결되지 아니할 수 없음을, 따라서 그들 모두를 연결하는 아우슈비츠를 숨기는 것이 ‘재현 불가능성의 논리’였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재현불가능함을 재현 가능하게 하는 순간, 영화의 시간은 비로소 울타리를 열고 순환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두 개의 시간이 사실은 하나였음을 증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난 14분 14초에는 이제 막 성형수술을 마친 후 회복 기간에 들어선 넬리가 자신이 예전에 살았던 집의 폐허에 방문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넬리는 바닥에 떨어진 거울 조각을 바라보는데, 이 거울 조각은 개별로도 하나의 상을 비추지만 총체로도 하나의 상을 비춘다는 점에서 베를린의 아픈 기억을 묘사한다. 왜냐하면 이는 마치 국가와 시민 사이의 관계가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것을 “모두가 동조자였다”는 르메이의 맥락으로 읽는 게 아니라, “베를린의 시간은 하나였다”는 총체의 인식으로 읽어내는 일이다. 예컨대 이곳에는 성형 전의 넬리와 성형 후의 넬리라는 두 개의 인격이 있는 게 아니라, 그녀 자체라는 하나의 이미지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피닉스>는 <운디네>에서 발견되었던 목소리와 정반대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운디네>에서 목소리가 관객들도 들을 수 있는 형태로, 그러니까 일종의 디제시스적 환영으로 들려오는 반면 <피닉스>에서는 그렇지 않다. <피닉스>는 목소리를 온전히 그들만의 것으로 남겨둠으로써 영화가 해낼 수 있는 재현의 기능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외면한다. 예를 들어 영화의 1시간 6분경의 시퀀스는 조니와 넬리가 서로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다루는데, 넬리가 의도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꺼내자 조니는 성급히 말을 돌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조니는 마치, 겉으로는 그녀가 전 부인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속으로는 지레짐작하는 게 아닌가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해 이는, 그가 어느 순간부터 넬리의 목소리를 전 부인의 목소리로 착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게 한다. 이 경우, 영화는 디제시스로 유령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것이지만, 디제시스 안에서 유령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위에서 <운디네>와는 정반대의 방향에 <피닉스>가 있다는 말을 실제 목소리의 여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유령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신, 혹은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 눈에 보이게 될 때 그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령이란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가 있다고 가정할 때, 가시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가 비가시적인 세계가 있음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이다. 이때 가시적인 세계/비가시적인 세계라는 말은 하나의 베를린에 존재하는 두 개의 인격을 지시하는바, 전후에 살아 돌아왔으나 그들을 쉬쉬했던 거주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 모습은 단순한 냉대로만 비쳐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저 베를린의 거주민들 모두가 나치 부역자는 아니었을뿐더러, 살아 돌아온 이들에게 생존의 경험을 묻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생존자와 비생존자를 가르는 일 또한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라는 프레임이 될 우려가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정치적 지형 안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건, 기차역에서 열린 조니와 넬리의 환송회처럼 건조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통해 단순한 생존 신고만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생존 신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도 없고,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되는 양가적 상황에서 하나의 몸에 공존하는 두 개의 인격을 슬기롭게 조화시키는 최선책이었다. 하지만 <피닉스>에서 이 최선책은 넬리를 필두로 한 인격의 전환을 통해 해체되고 또 변이된다. 조니는 넬리를 통해 시간의 전후를 넘나들며, 이때의 넬리는 유령이면서도 유령이 아닌 상태가 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이 애매모호한 지점을 죽였다가 다시금 살려내는 순환의 지점으로, 그런 의미에서의 피닉스다. 조니가 어느 시점부터 넬리가 정말로 자신의 전 부인임을 알아차렸다는 가정하에 영화를 바라본다면, 조니가 넬리에게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은 재현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다. 마치 유령처럼 겹친 아우슈비츠와의 거리 조절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조니가 할 수 있는 건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해버리는 일뿐이다. 즉 여기서는 그가 실제로 넬리임을 알아차렸든 아니든 간에 불가능한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만이 오직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불가능한 이미지는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손쉽게 말해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말에 따르면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재현될 수 있다면, 그것은 행위를 통해서,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새로 지어낸 허구를 통해서다. 즉, 과거에 있었던 것에 관해 지금 여기서 발화된 말과 이 장소에 물질적으로 현전하면서 부재하는 현실 사이의 대결을 통해서다.”(『이미지의 운명』) 넬리의 말은 처음에 새로 지어낸 허구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실제로 그녀가 겪었던 일이며(“들었던 이야기예요.”라는 답변), 이는 물질적으로 현전하는 전 부인의 얼굴이지만 사실은 전 부인은 아닌 닮은 사람으로써의 ‘넬리’와 계속해서 대결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얼굴(이미지)과 목소리(시간)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신체(장소)와의 대결에서 패배함으로써 조니 또한 자신의 다른 인격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야 만다. 죽은 이의 귀환이라는 소재와 은밀한 인격 전환의 순간이라는 점에서 히치콕의 몇몇 영화, 그중에서도 <현기증>의 후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피닉스>의 결말은 말 그대로 피닉스인 것처럼 보인다. 피닉스는 죽지 않는 새를 가리키는 말로서,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난다는 점에서 순환을 상징하는 새이다. 그러나 과거에서 연장된 현재와 미래로부터 늘어진 현재라는 두 가지 인격 사이에서 정작 현재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는 모순을 겪는다. 이는 기본적으로 전후의 베를린이라는 상황이 갖는 장소성에 귀인하는 바, 이곳에서 신체의 문제는 이중인격이 아니라 시간을 횡단함으로써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굳건함의 상태를 의미한다. 순환적 시간 안을 횡단하는 신체는 이야기의 흐름과 결합함으로써 주인공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표면으로 올라온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넬리라는 피닉스, 주인공의 재등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피닉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영화이며, 우리는 이 결말에서 시작 지점으로 다시금 회귀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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