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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01. 2021

벽을 넘기 전에, 벽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모가디슈>(2021)









1.



<모가디슈>를 관통하는 하나의 대사는 “살 수 있으면 살아야지.”이다. 이 영화에서 남한 대사관 사람들은 북한 대사관 사람들을 받아주며, 이 모습은 마치 난민 구호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양측이 한 민족이라는 점일 테다. 그러니 이건 난민이라기보다 동지애라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렇다면, 동포끼리는 으레 도와야 마땅한 것이다. 한국사에서 유달리 ‘한민족’이라는 말이 강조되곤 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일제 치하에서 한민족이라는 말은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말이었지만, 해방 이후에 한민족이라는 말은 묘한 뉘앙스로 변질되고야 말았다. 진정으로 민족을 위하는 길, 말하자면 누가 그 하나의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고 이는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동포란 본래 하나였던 이들이 일시적으로 나뉘어 살게 된 어떤 상황에서, 이들이 서로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동포라는 말은, 그들이 ‘하나’였다는 인식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동포라는 표현이 조롱조로 사용된다 한들, 이 말은 이들의 과거가 하나였다는 점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위의 대사를 떠올려보자. 남한 대사가 말하는 “살 수 있으면 살아야지.”라는 말이 의미하는 건, 단순한 인도적 차원의 구호조치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들에게 ‘내가 산다’는 건, 과거에 한몸이었던 동포들 또한 ‘산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본래 하나였다는 인식이 있었고, 이에 따르자면 그들을 죽이는 건 자기 몸의 반쪽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모른 체만은 할 수 없었던 셈이다.



따라서 “살 수 있으면 살아야지.”라는 말은, 상대가 아니라 나에게 먼저 전달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상대를 위한 이타적 발언이라기보다는, 한때는 하나였던 나에게 전하는 일련의 메시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중의적이고 그런 이유로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대사가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지애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속으로 들어가면 그저 자신을 위할 뿐이라고 말이다. 아마도 이 영화의 결말이 서로를 외면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유는 바로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들에겐 그들 각자의 ‘몸’이 생겼으며,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서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본래 있던 몸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이렇게 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뉘는 생물인 플라나리아의 사례다, 이들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절단면을 말끔히 재생한 채 두 개의 개체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 둘은 유전적으로는 하나의 개체다. 그렇다면 양쪽 모두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를 위하는 게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길일까? 이미 분리되었으므로 자신을 살리는 게 곧 생존일 수도 있지만, 둘 다 하나의 유전자를 공유하므로 둘 중 하나만 살아도 후세에 유전자는 전해질 수 있다. 여기서 유전자라는 말을 민족이라던가 동포라던가 하는 말로 치환하면 이 비유는 쉽게 이해된다. 무엇이 국가를 위한 일인지를 따져 물을 때 그들에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의문이 생겨나는 셈이다: 국가와 민족은 같은 뜻인가?



어쨌거나, 하나의 개체는 유전자의 보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을 희생해 유전자를 살리는 쪽이 대의적으로는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개인을 국가에 대입하는 일, 그리고 민족을 국가에 대입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단지 동포라는 점만으로 상대를 구하고 그게 곧 자신을 구하는 일이 되는 영화의 서사는 그 점에 의존하고 있다. 국가가 망해도 개인은 살아야 한다, 혹은 개인은 죽더라도 민족은 살아야 한다는 식의 두 가지 논의가 가능하다. 영화에서 “살 수 있으면 살아야지.”라는 말은 바로 그 두 가지 논의 사이를 관통하여 지나간다. 극 중의 인물들은 그 두 가지 사이를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이 사는 길, ‘옳다고 믿는’ 길로 나아간다.



2.



안기부와 보위부라는 양측 진영의 캐릭터들은 이를 위해 설계된 것이다. 인물의 신념을 강하게 드러내려면 그만한 수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테이블을 뒤집는 일은 벌어진 판 위에 장기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 영화는 한국과 동떨어진 소말리아로 넘어간다. 영화가 배경 삼은 1991년에 남한과 북한은 서로 섞일 수 없는 진영이었고, 이 둘을 한 자리에 모으려면 제3국을 통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어떤 면으로는, 이곳이 제3국이었기에 두 가지 논의 중 하나를 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작중에서 소말리아는 아직 남한에도 북한에도 포섭되지 않은 애매한 상태이며, 그러므로 어떤 것도 결정된 상태가 아니다. 바꾸어 말해, 이곳에서 인물들은 둘 중 하나를 결단내릴 이유가 없으며 그래서 둘 사이를 그냥 관통해버리는 일이 가능했다.



양측 정보기관의 이름을 풀이하자면 대략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안전을 기획한다는 말과 보전하여 지킨다는 말,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세세하게는 차이가 있다. 안전을 기획하는 일이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부터 안쪽의 것을 지킨다는 뉘앙스라면, 무언가를 보전하여 지키는 일은 그 무언가가 지속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는 것에 더 가깝다. 물론 이런 해석이 명확한 의미를 제시해주는 건 아니다. 안기부와 보위부로 대립구도를 세우는 건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진행을 위함일 뿐, 세부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양측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분명 존재한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거리감만큼 안기부와 보위부의 존재감은 크다.



영화에서 양측은 상대에게 협력하며 가끔은 친한 내색을 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딱 잘라 거절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이는 아무리 한민족이라 한들 더는 같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이곳에서의 분열은 근본적인 분열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이 선을 넘자고 말했지만, 1991년 모가디슈에서 이 선은 정치 공작으로만 사용될 뿐 실질적인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영화 초반에 소말리아 대통령 바레에게 전할 올림픽 입장식 테이프가 북측에 의해 도난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문제는 바로 다음 장면이다. 남한과 북한 직원들이 말다툼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선은 넘지 말자’는 대사는, “손에 손잡고 선을 넘어서”라는 88 올림픽의 기조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러므로 선을 넘는 게 곧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게 되리라는 점을, 우리는 쉬이 알 수 있다. 양쪽은 선을 넘지 말자 말하지만, 선을 넘어야만 비로소 평화를 되찾는다는 게 이 영화의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그 선이 영화 속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 선은 대사관을 둘러싼 얇은 담장인 듯 보인다. 대사관은 국제법상으로 해당국의 영토로 취급되며, 여기서 그 영토를 확정 짓는 게 담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담장을 넘어오는 건 곧 영토를 침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화에서도 이는 남한 대사관 직원과 현지 경찰 사이의 말싸움 장면에서 언급된 바 있다. 어쨌거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먼저 선을 넘어왔다는 점이다.



만약 이곳이 한국이나 북한 땅 한가운데였다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은 국경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타향이며, 이들을 나누는 건 얇은 벽 하나뿐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건 양측 대사관의 초라한 건물인데, 영화 속에서 미국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다른 대사관을 보면 자체 방위병도 있고 건물 개수도 많은 등 굉장히 으리으리하다. 이것이 국력의 우열을 보여준다는 점을 척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들 대사관의 벽이 굉장히 연약했기에, 양측은 하나가 될 수 있던 것이기도 하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궤변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벽이 연약하지 않았더라면, 북한 대사관이 침략당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들이 남한 대사관 직원과 함께 탈출하는 일도 없었을 테다.



3.



이를 보면 확실히, <모가디슈>는 둘이었던 것이 하나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모가디슈의 지리적 환경은 모국과 연결된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으며, 이를 통해 이들 사이에는 하나의 마음이 피어난다. 그 마음이 바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이타심, 혹은 이기심이다. 상대를 위하는 것이 곧 한민족으로서의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 말이다. 물론 이 여정의 끝엔 실패가 자리한다.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제하더라도, 영화 전체의 흐름은 이들이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지시하며, 우리는 이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양쪽 진영이 줄곧 보여주는 태도가 그렇다.



북측 대사관 직원들이 남한 대사관에 몸을 의탁하려 할 때 한신성(김윤석)과 강대진(조인성)은 “잘못하면 빨갱이 되는 거 아니냐.”는 식의 대화를 나눈다. 여기서 떠올려볼 수 있는 건 역사적 배경이다. <모가디슈>가 배경 삼은 1991년은 전두환 대통령이 하야한 지 겨우 3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그런데 전두환의 하야가 이루어진 1988년은 올림픽이 개최된 때이기도 하며, 말하자면 1991년은 평화(민주화)를 향해가면서도 평화(올림픽)로부터 멀어지던 때였다. 다른 한편 1994년에 벌어진 북한의 식량 배급 난은 모가디슈의 91년으로부터 3년 후에 해당한다. 이런 사정을 알고 보면 영화 속에서 북한 대사관 직원들의 모습이 굉장히 처량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그곳에서 생존한다 한들 앞으로의 위기가 남아있다는 걸 짐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991년은 ‘향해가면서 멀어지던 시기’의 정중앙에 있던 셈인데, 혹자는 이를 두고서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모가디슈>의 배경이 대사관이 밀집한 타국의 어느 낯선 장소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영화 안에서 줄곧 강조되듯 대사관은 국제법상으로 당사국의 영토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사관이 밀집한 모가디슈의 모습은 벽 하나를 두고 모인 나라들의 모임처럼 보인다는 것, 반대로 보면 단지 무너진 건 벽 하나였을 뿐이라는 서독과 소련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상대적으로 위험해 보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월경의 행위가 이 영화 안에서는 비교적 가볍고 가능성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북한과 남한 사이에는 길고 거대한 비무장지대가 자리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게 없다. 해외 공관 사이에서 북한과 남한이란, 길을 가다 흔히 마주치지만 서로 말을 걸어서는 안 되는 그런 수준의 사이일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약화된 벽이 양쪽 사람들이 마음을 열게 하는 것에 일조한다. 본국에서라면 양측 이들에게 중대한 좌천 요소로 작용할만한 것들, 빨갱이라던가 반동분자라던가 하는 요인은 이곳이 해외이기에 약해지고 그래서 더 선을 잘 넘을 수 있게 해준다. 특히나 작중에서 이는 그들의 처지가 더욱 해외에 가까워질수록, 소말리아 정부가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기에 자구책을 찾아야 할 처지에 놓였을 때 더욱 강화된다.



이 사실은 영화 안에서 의외의 지점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앙심이다. 영화에서 남한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북한 대사관에서는 벽에 걸린 김정일의 초상화를 발견할 수 있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어쨌거나 양측 모두가 누군가에게 기도를 올리는 이 상황은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자 어느덧 간과되어 버린다. 남한 사람들은 기도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북한 사람들은 본국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망각은 후반부의 자동차 레이싱 장면 직전에 그들이 탈출한 자동차 주위를 잡동사니로 둘러싸는 일에서 간접적으로 목격된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성경은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할 뿐이다. 김정일의 초상화도 마찬가지다. 대사관이 부랑자들에게 침략당하는 위기 상황에서 이들의 신앙심은 지켜지지 않는다.



4.



양쪽 사람들 모두가 ‘본국’을 탓하면서 최소한 연락이 닿는 케냐까지는 가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기도해도 닿지 않는 것이 있는 반면, 적어도 연락만큼은 닿는다는 점에서 현실 세계의 우위는 그들이 향해가야 할 그 목적지 안에 있다. 이 목적지가 바로 생존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생존이라는 키워드가 그들 사이의 최종 결론이 아니라 최종 결론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는 점이다. 각자의 목표는 본국으로의 귀환인 것이지 이곳에서의 탈출에 우선하지는 않는다. 만약 탈출이 우선이었다면 북한 대사관 사람들은 남한 대사관으로 망명했을 것이지만, 북한 대사 림용수(허준호)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며 딱 잘라 말한다. 이 점에서 <모가디슈>는 “둘이었던 것이 하나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인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생존이지만, 현장에서의 생존이라기보다는 본국에서의 생존에 더 가깝다. 둘이었던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이 <모가디슈>에서 화합이나 평화를 뜻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왜냐하면 이들에겐 집이 있고, 집이 아닌 곳에서의 죽음은 별다른 의미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게 그들 처지에서의 ‘실패’이다. 이들에게 평화란 집의 평화, 더 축소하자면 가정의 평화이다. 북한의 외교관들은 평양에 자녀 한 명씩 놔두고 와야 한다는 작중의 대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북한의 외교관들에게 해외 공관은 자녀들 모두를 데려오고 싶을 만큼 좋은 곳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북한은 외교관의 자녀 한 명을 평양에 내려둔다. 반대로 남한의 경우, 한신성의 자녀는 본국에서 3년 동안 홀로 지내고 있었다. 케냐보다는 한국에서 공부를 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분류해보면 북한에게 케냐는 북한보다는 더 나은 곳, 남한에게 케냐는 남한보다 더 못한 곳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북한 사람들의 행동이 자칫 이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남한의 대사 한신성이 북한의 대사 림용수에게 망명을 권했을 때 림용수가 이를 단칼에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이 싫어 케냐에 가족 모두를 빼 오고 싶어했음에도 그들이 북한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본국에 자녀 한 명이 남아있어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들의 최종 목표는 국가가 아니라 가족을 지키는 것, 즉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점 때문이다. 남한으로 망명하면 확실히 북한에 있을 때보다는 물질적으로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북한에 있는 자녀 한 명은 버림받게 된다. 즉 가족이 분열될 것이다.



안기부와 보위부의 단어의 의미적 차이는 여기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안전을 기획하는 안기부의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을 받아주었던 건 “살 수 있으면 살아야지.”라는 생존의 논리였다. 이 생존의 논리는 “구할 수 있는데 왜 안 구하냐?”라는 동지애에 기반한다. 반면 보전하여 지키는 보위부는 그들이 집이 영속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표면적으로 그들이 지키는 건 북한의 ‘체제’지만, 긴급 사태에서 이들의 큰 집은 무너지고 가장 기초적인 단위인 작은 집만이 남게 된다: 당장 살아야 하는 건 가족이 되고. 위기의 순간에 허물어진 벽은 이들 가족의 유대를 돈독히 하는 것에 공헌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벽이 있어야 비로소 존립하는 집단이지만, 가족 집단의 유대는 벽이 아닌 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사람들이 갖는 의미가 그러했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말은 민족이라는 말에 대치되니 말이다. 따라서 북한 사람들이 전향을 신청했다는 말로 국가를 속이지 않으면 그들을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남한 대사관 직원들의 태도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하나였던 것이 둘로 쪼개지는 일보다 무서운 건, 둘로 쪼개졌던 것이 다시 하나로 되돌아갈 때 견뎌내야 하는 여러 시련이다. 이 시련이 두렵다면 그 이유는, 이들 사이에 있는 게 근본적 분열이 아니라 아주 얇은 벽에 불과하다는 점에 있다. 평화가 언제든지 쉽게 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분열의 상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복구될 수 있을 테다.



5.



예컨대 이 영화의 비극은 좋은 의도로 포장해야만 그들의 나쁜 의도를 숨길 수 있었던 남한 대사관 사람들의 모습에 있다.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망명을 신청했다고 속이지 않으면 ‘인도적’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은 평화 분위기가 조성된 88년 이후에도 여전히 근본적 분열은 존재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라는 쉬운 말은 국가보안의 논리에 따라 망명이 아니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쉬운 일을 위해 어려운 길을 택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만큼 쉽게 깨어질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상황을 더 어렵게 몰고 간다는 점이다. 평화에서 출발해 평화로부터 멀어지는 이 이상한 풍경은, 구상하기 쉽지만 실천하기란 어려운 평화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모가디슈>는 남한과 북한 둘 중 하나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다. 이 영화는 모두가 주연이다. 이들은 화해를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화해라는 개념이 왜 존재하는지를 탐구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양측은 화해란 무엇인지를 각자 깨우친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 화해는 없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평소 하던 대로 행동한다. 쉽게 말해 <모가디슈>의 화법은 벽을 넘어가자는 게 아니라 벽이 그곳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같이 겸상도 하고 언어도 통하고 그러면 언제든지 하나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민족이나 동포라는 말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이곳에 있다. 그건 바로 이들 사이에 벽이 있다는 점이며, 벽을 넘기 전에 벽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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