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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16. 2021

언젠가는 저 끝에 빛이 보이리라 믿으셔야만 합니다

<랑종>(2021)



이 글에서 내가 공포영화라고 말하는 게 <랑종>이 보여주는 오컬트 장르라는 점을 미리 명시해둔다. 일상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일을 겪는 게 공포의 정의라면, 공포영화 장르는 꽤 많은 것을 가리키게 되니 말이다. 사실 그런 맥락에서 오컬트 영화는 부분적으로 재난 영화와 유사한 점이 있기도 하다. 첫 번째로는 인물이 자연과 맞서 싸운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오컬트 영화 속 귀신들은 인간의 법칙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연재해와 유사하다. 하지만 오컬트 영화는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을 초자연적인 것의 힘을 빌려 해결한다는 점에서 재난 영화와 다르다. 재난 영화가 문명사회에 닥쳐오는 균열이 바로 자연이라 말하는 반면, 오컬트 영화는 문명사회 안에 존재하는 균열의 치유법을 자연 안에서 찾아내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랑종에서 님(싸와니 우툼마)이 말하는 무당의 일이 바로 이렇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 님에게 찾아오는 부부를 떠올려보자. 남편이 뱀을 잘못 주워 먹고 탈이 나자 부인은 그를 무당인 님에게로 데려온다. 이때 제작진이 님에게 이런 의식이 의학적으로 유효한 것인지를 묻자, 님은 다음처럼 말한다: “무당의 일은 보이지 않는 것을 치료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말은 <랑종>의 프로듀서인 나홍진의 이전작 <곡성>(2016)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는데, 만약 <랑종>과 <곡성>이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다면 그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종교적 믿음은 아니다. 이 믿음은 자신이 본 게 무언가를 재현한 것이고, 이에 따라 거기에는 원본이나 실체와 같은 근원이 있으리라는 일말의 가능성을 뜻한다. 달리 말해서 이는 믿음에 대한 증명을 요구한다기보다, 그것을 어디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느냐는 지속력을 가늠하는 것에 더 가깝다. 나홍진이 씨네 21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마스터클래스 인터뷰에서 말하듯, 믿음이란 “그냥 가는 겁니다. 그냥… 언젠가는 저 끝에 빛이 보이리라 믿으셔야만 합니다.”(씨네 21, 김소미, “당신의 피가 시키는 대로, 쉼 없이 쓸 것”, 21.07.13) 이 글에서 나는 두 영화를 본격적으로 비교할 생각이 없지만, 문명사회 안의 균열을 두고 벌어지는 사투는 두 영화를 재난의 세계에 데려다 놓으며, 이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룰 만한 이야기 몇 개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이를테면 재난에 대한 생각 중에 믿음과 연관되는 키워드가 바로 헛소리라는 점이 그렇다. 



헛소리에 관해 말해보자. 공포 장르에 많은 변주가 있지만, 이 모든 일에는 헛것을 보고 듣는다는 전제가 있다. 이때 주목해야 할 건 그런 헛것들을 극도로 밀고 나간 형태가 바로 헛소리라는 점이다. 묘기를 극단으로 몰고 가면 마술이 되듯, 헛것을 극단으로 몰고 나가면 헛소리가 된다. 다시 말해서 ‘허튼 것’을 우직하게 밀어붙이면, 이제 그건 더는 허구가 아니게 된다. 이는 영화가 재현해내는 이미지가 단지 허튼 것으로만 치부될 수 없는 이유임과 동시에, 그것이 현실에서 영향받아온 스크린 속의 이미지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동시에 설명해준다. 헛소리는 믿음의 지속적인 상태라는 점에서 순간적인 목격에 해당하는 ‘헛것’과는 거리가 있으며, 바꾸어 말해 이는 예외적인 상태가 줄곧 지속되는 재난 상황이 단순한 시각적 스케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오컬트 영화는 평소에 보이지 않던 재난이 우리에게 시각적 스케일로 보여질 때 나타나는 상황을 보여준다. 만약 유령이 우리와 공존하지만 겉으로는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실재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들이 누군가의 몸을 빌려 현실에 귀환하려는 이 상황이 바로 재난의 실체화-오컬트인 셈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엑소시즘을 두고서 재난에의 경고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당이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존재라는 점을 고려할 때, 더 나아가 무당을 ‘종교인’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이들이 행하는 퇴마의식은 재난이 재림하려는 것을 막는 행위이다. 그런데 재난을 미리 예견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대개 헛소리로 치부되곤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이를 계속 밀고 나가는 이들만이 끝내 살아남는다. 예컨대 재난에서 살아남으려면 끔찍한 미래를 그려보는 일이 아니라 끔찍한 미래가 우리에게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믿는 이들만이 볼 수 있는 것’에 더 가깝다. 이 대목에서 영화가 다 끝나고 덧붙여지는 비하인드 영상을 떠올려보자. 밍(나릴야 쿤몽콘켓)의 퇴마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한 인터뷰에서 님은 “솔직히 바얀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신이라는 헛것을 믿는 이들이 무당이라면, 그러한 헛것을 허튼소리(헛소리)로 발화하는 게 무당이라는 점에서 님의 좌절은 재현에 대한 거부처럼 보인다. 신을 보았다는 것보다 신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했는데, 님은 그러지 못했다.



재현에 대한 거부는 그러한 재난을 감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모종의 자기 구속에 의거한다. 물론 전체 서사로 볼 때 님의 이러한 발언은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 좌절했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보아도 해석의 방향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오컬트 영화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영화는 계속해서 일반적이지 않은 말을 해야 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이를 충분히 헛소리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장르적으로도 오컬트 영화는 헛소리를 얼마나 끝까지 밀고 나가는지가 중점이 되는데, 장르론의 관점으로 본다면 <랑종>의 결말은 오컬트 장르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인간과 자연의 싸움을 관객과 영화의 싸움으로 변환하여 바라볼 여지가 있다. 첫째, 어느 으슥한 환경(정글이나 동굴 같은 어둠)에 관객(탐험가)는 홀로 내쳐진다. 이곳에서 그는 온갖 영적인 경험과 함께 몇 가지 새로운 발견을 하며, 그럼에도 이 모든 탐사의 목표는 생존이다. 자연이 인간을 줄곧 압박하는 상황에서는 탐험이 끝나고 살아 돌아가야만 비로소 그러한 대결이 있었음을 알리고 승전보를 알릴 수 있다. 그리고 이 탐험의 행위는 생존의 미래가 아니라 생존을 진행시킨다는 점에서 자기보전에 대한 공고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랑종>의 배경이 태국이라는 점은 이 탐험의 행위를 정글 탐사로 보게 하는 면이 있다. 정글은 어둠이 내린 숲보다 한층 더 갑갑한 습도를 자랑한다는 점에서, 더 확고한 공포의 인상을 자아낸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정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것을 체험의 인상에 빗댈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영화에서 정글은 일본 공포영화의 양식이 적절하게 섞여 들어온 태국 공포영화의 어떤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다소 오리엔탈리즘이 섞인 시각일 수도 있겠지만, 태국의 정글은 일본의 야산처럼 신을 모시는 장소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의 특수성은 여러 신화적 이미지, 혹은 시공의 중첩을 이루어낸 이미지를 끌어오며 이는 이미지의 부여 혹은 투과 상태로 영화 안에서 나타난다. 살짝 농담을 섞어 말하자면 태국의 영화에서는 정글에서 괴물이 민가로 내려오고(<엉클분미>), 일본의 영화에서는 티브이 안에서 귀신이 튀어나온다(<링>). 우리는 여기서 각 이미지가 내려오고, 튀어나온다는 형용사로 묘사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즉, 이미지를 내림받고, 이미지가 튀어나온다는 말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와 후자를 구태여 무당과 비디오라는 단어로 지칭할 근거는 부족하나, <랑종>에서 발견한 장면 하나가 나에게 모티브를 주었다. 랑종의 중반부, 밍에 대한 구마의식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려 하는 가운데, 가족들과 그녀는 자동차를 타고 한밤중의 도로를 달린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중앙을 기점으로 왼쪽에 밍을, 오른쪽에는 창문에 비친 밍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왼쪽에 있는 밍이 입을 꾹 닫고 지친 모습이라면, 오른쪽에 있는 밍은 섬뜩하게 웃는 모습이다. 이 장면을 두고서 악령의 세계가 바로 거울 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일본 공포영화에서 비디오라는 매체가 티브이라는 거울 면을 두고 두 세계를 이어주었다는 점을 다시금 떠올려보게 된다. 이때 핵심은, 비디오라는 매체가 우리에게 전해주었던 시간의 삭제와 자기 이미지에 대한 반영의 나르시시즘이다. 영화 필름을 가정으로 보급한 비디오는 필름의 끊김, 훗날 ‘글리치(glitch)’로 불리게 될 오류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이 오류의 시대에 등장한 존재가 바로 1998년의 <링>이라는 존재였으며, 그와 동시에 화면으로부터 현실에 오류가 재림할 수 있다는 재난 상황의 인식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다. 



거칠게 요약하면, 무당은 하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라는 점에서 내림과 튀어나옴을 가능케 하는 매체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랑종>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은 재난 상황을 매체가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는지에 관한 방법론적 탐구이기도 하다. 어쩌면 비디오 아트를 통해 예견된 디지털 시대의 풍경이 <블레어 윗치>(1999)를 가능케 했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랑종>의 후반부 장면들이 긴급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2019)를 떠올리게 한다는 혹자의 평은 디지털 작업이 갖는 타임라인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전통적인 필름 영화에서도 필름의 편집은 가능했지만 이는 시간을 물리적으로 조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편집에서 영화는 모든 타임라인에서 편집의 시간대로 내려오며, 이때 영화는 거대한 이미지 클라우드에서 물리적 조작의 현실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디지털 영화의 글리치는 없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삭제하고 결론에 곧바로 도달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그녀를 지우는 시간>(2020)).



본문에서 헛소리를 극도로 밀고 나가는 것이 곧 영화적 믿음을 형성한다고 말했던 대목을 충실히 이행하는 선에서 말해본다면, 디지털 영화 편집은 물리적 현실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현실을 조작하는 그래픽 작업에 그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무당들에게 어떤 신이 내려오는지에 따라서 내용물의 묘사가 달라진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혹은 무당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주는지의 문제가 바로 무당의 삶과 직결된다는 점도 상기해보자. 목격의 순간을 신의 영광으로 여기던 때가 지나고 나면, 볼 수 없는 것들을 목격하려는 행위는 더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헤쳐나와야 할 어둠이 된다. 받아들일 신이 너무 많다는 건 바꾸어 말해 우리에게 그만큼 많은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기도 하고, 이 이미지들을 나열해 하나의 흐름으로 만드는 게 매체의 고유 능력이라면 무당은 신을 흐름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바로 매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랑종>의 결말은 몹시 불우한데, 이미지의 홍수를 바르게 받아들일 매체의 올바른 접근법에 대한 탐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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