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마로나>(2020)
1.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에는 한 마리 당나귀가 등장한다. 이름은 발타자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이 당나귀에게 주인집 소녀는 말한다. “발타자르. 세례를 줄게”. 브레송의 성향을 생각하면 굳이 당나귀에게까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브레송은 당나귀를 하나의 인격체에 빗댄다. 동물에게 인격이 있는가 없는가, 만약 있다면 그 또한 구원받을 수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 비유는 당나귀가 태어나 이름을 부여받았을 때 그 시작점을 알린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만으로 사회에 편입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주민센터에 가서 출생신고를 해야만 비로소 산 자가 된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개인이 한평생을 사용할 이름 석 자를 적어 넣게 된다. 따라서 발타자르의 이름 수여식은 당나귀가 끝나고 발타자르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예컨대, 이를 두고 물질의 영화가 아니라 기억의 영화로 전향하게 되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이 객체에서 주체가 될 때 그곳에는 기억이 담긴다. 소위 말하는 자아라는 것이 이름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다. 발타자르가 세례식을 받아야 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기억은 늘 흔적을 남기고 이 흔적은 잔향, 잔흔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호명된다. 자아가 생긴 이상 후회할 일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잔인한 여정의 시작점에서 기사는 공주에게 세례를 받는다. 혹자는 여기서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떠올릴 것 같다. 정확하게는 미치광이 기사 돈키호테가 시골 소녀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는 장면이다. 이 시골 소녀는 사실 매춘부인데, 말하자면 가명을 씀으로써 후회를 흘려보내는 자인 셈이고, 그런 그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 돈키호테는 앞으로의 여정을 기억해야만 하는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그러니 돈키호테의 여정은 기억을 잃어버린 자의 기억 되찾기 여정이다.
그렇다면 당나귀 발타자르와 기사 돈키호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쓸쓸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말이 아니고서는 별다른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두 개체 모두 동물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 공통분모가 있다. 발타자르의 동물성은 동물의 육체에서 비롯된 육체의 굴레이고, 돈키호테의 동물성은 육체에 갇혀버린 광인의 굴레이다. 그 누구도 발타자르와 돈키호테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의 육체는 창문 없는 감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브레송은 발타자르의 슬픈 두 눈을 화면의 구심점으로 잡아두는데, 이는 눈이 마음의 창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단련된 몸이라 하여도 눈의 연약한 만큼은 감출 수 없다. 바꾸어 말해, 얼굴을 아무리 가린다 하여도 눈망울에서 새어 나오는 감정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우리가 동물과 대화할 때, 주로 눈을 바라보게 되는 건 그들의 육체가 아닌 마음에 집중하겠다는 모종의 선언이다.
2.
앞서 우리는 발타자르와 돈키호테라는 두 인물을 통해 동물적인 것에 대해 알아보았다. 여기서 나뉜 두 개의 감각은 육체와 마음이다. 보잘것없는 육체에 이름이 생겨날 때 그곳은 기억의 구심점이 된다. 그러니 브레송 영화의 결정론적인 성격은 영화의 시작점에서, 기억의 구심점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환상의 마로나>는 브레송의 <발타자르>를 거쳐 애니메이션이라는 물리적 지표 위에 안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동물의 삶에서 죽음을 따라간다는 점도 그렇지만, 이름의 원리가 물체의 표면에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부유한다는 점이 그렇다. 허나 가장 큰 차이는 좀 전에 말해두었던 애니메이션이라는 물리적 매체의 성질이다. 만약 브레그송의 흑백 영화가 컬러인 세상에서 ‘이례적인 것’으로 취급되기에 마땅히 안착할 곳을 찾지 못한다면, <환상의 마로나>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출렁임 속에서 XYZ의 좌표값을 잃은 채로 떠돈다.
<마로나>의 이야기는 현실 세계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세계를 기반에 둔 일종의 판타지이다. 이곳에서 물체는 XYZ의 값을 잃고서, 자동차의 백미러 아래 작게 쓰인 ‘실제 사물의 크기보다 작게 보일 수 있음’이라는 말을 재현한다. 그러니 이곳에서 마로나는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큰 존재일 수도 있다. 반대로 그 무엇보다 강대해 보이는 존재가 아주 여린 마음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마로나가 바라보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렇다. 마로나가 마주하는 사람 중에는 근육질의 공사장 인부도 있고, 철없는 여자아이도 있지만, 그들 각자를 구분하는 건 외견이 아니라 냄새이다. 마로나는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냄새를 통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로나를 싫어하는 이들은 털이 날리고 냄새가 난다는 것을 이유로 든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이 서로 싫어하게 되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체감할 수 없는데, 스크린의 벽에 가로막혀 마로나의 냄새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애니메이션이 묘사하는 마로나의 귀여운 외모일 뿐이다. 어쩌면 이것조차 왜곡된 좌표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영화는 마로나를 통해 냄새라는 감각을 끌어들임으로써 우리가 영화에서 목격할 수 없는 영역을 표현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이 아니라 영역이라는 말의 공간성이다. 애니메이션의 세상에서 공간은 끝없이 늘어나거나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이 애니메이션의 세상에서 좌표라는 것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본능적으로 감각하는 중력, 척력, 부력과 같은 자연계의 원리로 국한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동물적인 것’이고 <마로나>의 주인공이 마로나인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마로나는 동물이지만 그보다 더 동물적인 것은 이 도시, 더 나아가면 이 세계이다. 마로나가 만나는 이들은 본능적인 끌림 같은 것을 느끼고 서로에게 구애한다. 분명 이 감정은 모성애와 같은 부류의 것으로서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던가. 동물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3.
<마로나>의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으로 느끼는 것 간의 괴리를 품은 메타몰포시스(Metamorphosis)를 함유하고 있다. 소설에서 돈키호테가 풍차에 대항하는 장면이 아주 용맹하게 그려지지만,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을 세상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묘사하듯이, 동물의 거죽을 한 이에게 이성이 주어질 때 세상은 정상적으로 돌아온다. 동물의 세상에서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올 때, 세계는 인간이 구축한 원근법을 따라 재편되고 부유하는 지대는 해체된다. 요원한 해석일지도 모르겠으나 분류해본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동물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말이다. 인간의 머리로 바라보는 동물적인 감각에 대하여, 이곳의 육신은 현실의 단단함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유함을 전제로 둔다. 애니메이션은 자신을 붙잡아 두는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서 시작하고, 우리는 이를 상상력이라 부른다. 보다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상상력이란 부유하는 힘으로서 하늘을 향해 두둥실 떠오르게 해준다. 그래서 <마로나>의 이야기는 중력을 이겨내는 비행 서사이다.
마로나의 움직임에는 작은 선들이 자잘하게 뒤따르고, 물리적 법칙을 무시하는 듯한 변형(Metamorphosis)이 풍선처럼 세상을 뒤틀어 놓는다. 이 변형은 으레 신체에 수반되는 것이므로, 어린아이의 성장통과 같은 것에 비유되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상상력이라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상상력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힘이 아니라 (중력을) 견디어 내는 쪽으로 작동하는 단어다. 애수에 젖은 이들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도시가 때때로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고흐의 시선으로 그려진 도시가 아름답다면 도시를 상상해서가 아니라 공기를 견디어 내어서다. 이에 따르면 이 도시는 영화가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가혹한 장소일 수 있다. 땅 아래에 가라앉은 것들, 잔잔한 먼지부터 바닥에 발을 디딘 채 살아가야 하는 길거리 동물 중에는 마로나의 방황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로나가 겪는 세 차례의 방랑을 보다 아름다운 것으로 예찬해야 한다. 마로나는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슬픔을 겪은 동물이 아니다. 마로나는 슬픈 도시의 중력을 이겨낸 환상(Imagine)에 가깝다. 이 문장을 비극 쪽으로 돌려보면 우리는 오늘도 도심 속의 작은 환상들을 끊임없이 떠나보낸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마로나는 죽은 채로 도로 한복판에 누워있다. 그 위로는 소녀의 슬픈 얼굴이 놓이고 카메라는 아래에서 위로 서서히 부유한다. 흔히 유체이탈하면 생각나는 게 그런 장면이지 않던가. 그래서 이 쇼트는 망자가 세상을 떠날 때,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중력의 불가피한 힘을 체감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석이 있다. 만약 망자가 하늘로 떠나가는 게 무거운 육체를 벗어버렸기에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한 명의 망자가 영화의 자장에서 벗어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즉, 이것은 영화라는 푸른 지구이자 마을인 것이다. 그런데 이 푸른 지구이자 마을을 확정해 주는 장면은 영화의 시작 지점이 아닌 결론 지점에 나온다. 영화는 시작 지점을 미리 결론으로 제시한 후에, 결론 지점에서 그곳까지의 과정과 이후를 말해주는 방식으로 짜여있는데, 영화의 러닝 타임 동안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마로나’라는 이름이 많은 여정을 거쳐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발타자르>에서의 숭고한 영혼을 기리며 다음처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로나>의 러닝 타임은 시작 지점이 왜 세례식인지에 대한 설명이라고 말이다.
4.
이 이야기는 부모에 대한 짧은 설명으로부터 출발한다. 떠돌이 개인 아버지와 믹스견인 어머니 사이에서 그녀는 아홉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화면 위로 몽타주 되어 지나가는 아홉 마리 견공의 얼굴은 형제인 만큼 구분하기 어렵다. 즉 이 장면에서 작품의 화자인 마로나를 찾는 것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래서 원본인 어머니에게서 갈려져 나온 아홉 개의 ‘판본(Variation)’처럼 보이는 강아지들은, 구분되기 힘듦에 따른 간소한 이름을 부여받았다. 첫째, 둘째, 셋째… 그리고 아홉째로 지칭되는 그들 각자에게는 별개의 이름 같은 게 없고, 이름이 없으니 아직 시작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유하게 말하면 미완의 삶이지만 잔혹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태어났음에도 태어나지 못한 처지이다. 이때 마로나는 ‘반려동물’이라는 처지에 대해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인간은 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개는 인간의 말을 알아들어야 한다."라고 부모는 가르친다. 이 말은 어쨌거나 배려라고 생각했던 ‘반려’ 동물이라는 단어가 허울뿐인 조약 같은 것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름을 부여하는 존재인 인간을 작품의 구성 원리로 내세운다.
이 구성 원리는 작품 내에서 “어른들 집에 살 때, 어린아이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라는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증된다. 부연 설명하자면, 이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아니라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중력이라는 거대한 힘에 관한 역학이다. 어른이 아이를 보듬어야 하는 이유는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중력을 이겨낼 힘이 있어서고, 어른이 될수록 키가 커지는 것은 그만큼의 높이를 지구로부터 저항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강아지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작다. 세상에는 대형견도 있지만 마로나는 인간의 발꿈치 정도에 겨우 올라서는 크기의 소형견이다. 이 존재의 미약함은 마로나의 눈에 비치는 세상이 커다란 동시에 정말로 커다랗다는 점을 말해주고, 동시에 마로나의 뜀뛰기가 세상을 향한 거센 환호성처럼 들리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알겠지만 영화에서 마로나는 짖는다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높이 뛰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허나 점진적으로 누적되는 기억의 무게가 그녀의 몸에 부담이 되기 시작할 때 영화는 끝난다. 아마도 마로나가 자동차에 치이게 된 이유는 존재의 무게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마로나’라는 이름이 주는 미약한 존재의 강대한 무게감이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곧 마로나의 삶인 상황에서 우리는 ‘마로나’를 본다. 이름이 곧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일종의 고유 명사이기도 한 ‘마로나’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처음에 아홉이라는 간소한 이름으로 불리던 마로나에게 이름이란 일종의 좌표값이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의 아홉 번째 주민이 바로 자신이다. 말하자면 마로나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아홉’이라는 이름은 영화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순서이다. 그러니 이 여정은 ‘그녀가 아홉 번째 지점에 골인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영화가 죽음으로부터 시작한 이래로 마로나의 삶이 어떤 진행이었을지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생겨나는 자신에 대한 믿음, 삶에 대한 굳은 신뢰가 좌표로 형성되는 과정이 이름에 담긴다. 여기서 성별에 대한 오인은 올바른 좌표값이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인 듯 보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지점에 가서야 삶의 벡터를 확립해 주는 마지막 이성이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른바, 동물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다. 수컷이거나 암컷인 게 그리 중요하던가. 결과적으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발타자르>와 <돈키호테>를 잇는 세례식이 오늘날의 도시 한복판에서도 조용히 거행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