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내일을 희망하며

코로나 19 시대의 <날씨의 아이> 재론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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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이 비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어떤 이들은 반쯤 농담 삼아 <날씨의 아이>의 몇몇 장면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만화적 맥락이라면 몰라도 현실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굉장히 소름 끼치는 면이 있다. 먼저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날씨의 아이>는 날씨의 무녀가 제물로 바쳐지지 않았기에 물에 잠긴 세상을 다룬다. 여기서 중요한 건 히나와 호다카 각각의 선택이다. 1) 히나는 자신을 제물로 바쳐 도쿄를 살려내려 했으나, 2) 호다카는 그런 히나를 도쿄로부터 구원하려 한다.


주의력 깊은 독자라면 이 두 가지 언명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히나는 도쿄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지만, 호다카는 히나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 “너만 있으면 돼!”라는 대사에는 ‘나는 너의 안에서 살아가도 좋다’라는, 다소 오글거리면서도 낭만적인 함축이 들어있다. 김병규가 그의 글에서 지적한 바 있듯, 두 사람의 조합은 서로를 끌어안고 수직 낙하하는 장면에서 배후의 관념이 액체적 세계임이 확실시되며, 그에 따르면 위의 대사는 다음처럼 고쳐 쓸 필요가 있다. ‘히나∋호다카’.


몸 전체가 수분으로 이루어진, 반쯤은 투명해진 히나의 품 안에 호다카가 안길 때, 도쿄에 막 동화되려 했던 소년은 도쿄로부터 추방당한 소녀에게 귀속된다. 이 모습은 마치 도쿄를 히나에게 돌려주는 것처럼 보이며, 작품 상의 도쿄가 히나라는 마지막 퍼즐을 통해 완성되는 액체적 세계임을 떠올려본다면, 작품 속에서 도쿄는 미완의 도시로 남게 되는 셈이다. 예컨대, 작품의 결말에서 도쿄에 고인 거대한 물웅덩이는 맞춰지지 못한 퍼즐이라는 거대한 기표 그 자체나 다름없다. 이 기표는 도쿄라는 이름을 하고 있지만, 라깡의 편지처럼 기의를 계속해서 도피시키는 ‘사랑의 불시착’인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무서운 상황은 그것이 엇나갔을 때가 아니라 완전히 실종되었을 때이다. 도쿄의 사람들이 히나를 애타게 찾아 헤맬지 모르겠지만, 히나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면 이 사태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향해버린다. 왜냐하면 문제의 해결책이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본래 알고 있었던 원인이 진실된 것인지를 묻는 게 우선시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과연, 정말로 히나만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것일까? 이 생각은 호다카의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되어야 하기도 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인 물, 썩은 물, 맹물


많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날씨의 아이>를 작동시키는 배후면의 원리는 바로 SNS이다. 우선 두 사람의 활동이 SNS를 통한 홍보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나, 호다카가 히나에게 선물할 상품을 찾는 장면에서는 “인터넷에 묻지 말라.”는 답변이 언급된다. 정황상 이 물음은 백날 인터넷에 질문해봐야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더 낫다는 것이겠으나, 다른 맥락으로는 이렇게도 풀이된다. ‘인터넷의 정보를 믿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을 불확실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장소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백번 귀로 듣는 것보다 낫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호다카도 히나가 능력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그 힘을 믿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위에서 말했던 라깡의 편지처럼 되어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것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지점은 히나가 자신의 나이를 속였다는 점에 있다. 좀 더 풀이하자면, 호다카가 알고 있었던 나이는 진실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문제는 히나가 자신의 진짜 나이를 고백했을 때 비로소 해결된다. (거짓상의 기표에 과녘을 꽃아 넣음으로써 기호가 완성되었다.)


작품의 결말을 보았다면 대체 무엇이 해결된 것이냐고 물을 수 있다. 분명 도쿄의 절반이 날아갔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굉장히 심각해 보인다. 하지만 작품은 도쿄라는 지명을 두고 얽힌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세부적으로는 도쿄의 품에 안기는 소년과 도쿄로부터 버림받은 소녀의 이야기이다. 문장으로 적절히 표현해두었듯이 두 사람은 술래잡기에서의 화자와 청자를 겸하고 있다. (“다 숨었니?”라고 화자가 물었을 때 청자가 “…”라고 답해야 게임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 화자가 청자를 찾아다닐 때, 청자가 화자를 피해 달아나는 것이 게임의 규칙이 아니라 생존의 논리로 이해된 상황이 바로 <날씨의 아이>의 전반부 이야기라는 것이다.


히나는 왜 호다카를 피해야 했으며, 호다카는 왜 히나를 따라가야만 했을까. 이 둘의 관계는 수분이 충만한 액체적 세계가 지시하는 생존의 논리를 따라간다. 습한 계절에서 건조한 지대를 찾아 떠나는 두 사람의 여정은 잡음으로 가득 찬 세계인 도쿄로부터 탈출하기나 다름없다.* 도쿄가 두 사람에게 보내오는 신호는, 도쿄에 녹아들기라는 이민자 문제와 도쿄를 둥둥 떠다니기라는 액체적 성질에 귀인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찾아내어 귀속해야 할 키워드는 융해이다. 물 위를 둥둥 떠다니면서 호흡기로 손쉽게 들어올 것들은, 공기 중을 떠다니면서 귀안으로 손쉽게 들어올 것들이 된다. 그런데 온갖 오염물질이 손쉽게 녹아드는 이 액체는 쇼트의 병치와 병합이라는 영화의 어떤 성질과도 닮아있는 게 사실이고, 오늘날의 영화가 이야기하기의 측면에서 개인의 품에 안긴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날씨의 아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화가 될 수도 있다.


(*주 : 키틀러를 경유하도록 하자. 축음기-실재계로부터 살아남기란 뜬 소문으로 가득 찬, 동시에 수분으로 가득한 도쿄로부터 도망치는 것과도 같다. 이곳은 기표와 기의와 만나 기호가 되기 직전에, 아주 건조한 기후로 인해 기표가 붕 떠버리고 마는 기의의 호수이다. 즉 허공에는 기표가 습하게 꽉 차 있고 바닥에는 기의적인 맥락으로 가득하다. 지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테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화가 사막 속의 오아시스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기표로부터 살아남기, 혹은 실재계의 기표들에 대한 우리들의 우편배달인 셈이다. 자세한 것은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에서 ‘편지는 도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락을 참조하라.)


타조처럼 고개를 처박는 방법


그러고 보면 이들의 여정은 소문에 휘둘리기와 소문으로부터 벗어나기라는 두 가지 선택지로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라는 속담이 있기도 하지만, 대게 소문이라는 것은 명확한 근거 없이 표층으로만 진행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소문은 어디까지나 실체 없는 망상(혹은 원본보다 과대포장되었)이라고 생각해야 우리는 안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을 통해서 우리는 신카이 마코토가 도피하는 두 남녀를 보여주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여정은 망상으로부터 도망치기, 혹은 망상과의 자리 교환을 막아내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히나와 호다카는 맑음 소녀가 맑음이라는 날씨를 대체하는 것에 겁먹었고, 히나=날씨라는 공식을 논파하기 위해 실재의 사막을 건넜다. 하지만 이 사건의 가장 큰 문제점은 편지가 아직 개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상징적인) 폭탄 돌리기를 받아 들었고, 어딘가에는 내다 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이렇게 해결되고 있지 않던 문제를 지금 시점에 와서 꺼내게 된 이유 또한 명확하다. 우리가 코로나19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이전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복기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주었다.


먼저 코로나19와 뜬 소문은 1)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명확한 실체가 있으며, 2) 생각하는 것보다 거대한 증상을 일으킨다는 점과 3) 우리의 몸을 차지하려 든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심지어 어떤 바보 같은 이들은 코로나19는 정부가 꾸며낸 음모라고 말하면서 ‘노 마스크’ 시위를 하고 있는 지경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문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모두 음모론자들이 꾸며낸 소행이야! 모두 뜬 소문일 뿐이라고!” 이 소문이 차라리 진실이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좋든 싫든 간에 코로나19라는 단어에 관한 소식을 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아라.


오늘날 인류는 기후를 예측하는 시스템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나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후는 항상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 기상청은 슈퍼컴퓨터를 도입하고도 날씨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며, 이는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날씨 예측은 한 달 전, 일주일 전이라는 희미한 시절에서부터 그제와 어제라는 가시권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점진적으로 선명해진다. 예컨대 기후는 실시간으로 렌더링 되는 계산의 산물에 가깝다. 그리고 내 주장은, 공기 중에 붕 떠다니는 입자를 계산하는 것만큼이나 공기 중에 산포한 소문을 계산하는 일도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소문에 근거를 묻지 않는 일이 그 소문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주장은 소문을 바라보는 형식이 우리의 실재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소문에 대한 사실 확인이 아니라 그것들에 녹아들어 가는 우리의 모습이 중요하다. 이른바 융해라는 단어를 다시금 꺼내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들 중 코로나19를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이가 있다면, 코로나19라는 실체로부터 도망치는 것인지, 아니면 코로나19를 둘러싼 사회로부터 도망치는 것인지를 질문해보자.


이 두 가지 질문을 통해 확인되는 이야기란 이렇다. 코로나19가 정말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오늘의 우리에게 내일 비가 올지 말지라는 문제와도 같다. 공기가 축축하고 비를 예보하는 구름이 잔뜩 껴도 비가 내리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단지 우리는 어딘가로 향할 때 우산을 가지고만 나올 수 있을 뿐이며, 이 행동 자체가 비가 오기 때문이라는 확신만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비가 온다는 사실보다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더 생각을 기울일 수도 있고, 그럼에도 비가 온다면 ‘운이 좋았지’라면서 대강 넘겨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면 이런 직유법을 사용해보고 싶다. 호다카가 인터넷에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온 답변이 기후에 대한 우리의 사고와 비슷하다. 백날 인터넷에 물어보아야 내일의 날씨를 확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상청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슈퍼컴퓨터를 통해 계산된 경우의 수이며, 실제 현장은 당신이 집 밖을 나서는 바로 그 순간에 확정될 것이다. 분명, 언젠가 과학이 고도로 발전하는 때가 온다면 기후는 암과 같은 질병처럼 완전한 정복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그리고 라플라스의 악마에 운명을 맡기는 일이 마냥 긍정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약간의 균열 지점을 감수한다면 우리는 <날씨의 아이>에서 언급된 ‘날씨’라는 대목을 ‘코로나19’라는 단어로 치환해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히나가 각종 행사에 불려 다니면서 날씨를 맑게 하는 대목을 본다면, 우리는 히나가 일종의 성역을 형성하고 있음을 떠올려볼 수 있다. 히나가 가는 곳에는 ‘비’라는 단어가 없으며, 이 모습은 비 오는 하늘에 뻥 뚫린 햇살을 통해 묘사된다. 여기서 공원을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할리우드를 비롯해 모든 인류가 염원하는 ‘아이들의 안전’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런데 아이들이 ‘~’로부터 안전하다면, 소문과 코로나19 중에 어떤 단어가 더 합당하겠는가? 아마도 후자일 테다.


불확정성의 원리에도 불구하고 매일 우산을 챙기는 나날 속에, 그들은 완전한 확정성의 원리를 받아든다. 히나가 있기에 이곳은 절대로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완전한 성역을 형성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사태에서 마스크의 착용은 어디까지나 불확정성의 원리에 귀인 한다. 우리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더라도 코로나19에 반드시 걸리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는 벗고 다니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스크의 착용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마스크야말로 우산보다는 조금 더 <날씨의 아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산이 자신을 비로부터 지키는 도구라면, 마스크는 상대방을 배제하는 도구이다. 우산을 쓰는 이들이 세상의 한복판을 걸어간다면, 마스크를 낀 이들은 세상 속에서 홀로 있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한다. 영화의 절정부에서 호다카가 히나를 향해 뛰기 시작할 때, 우산을 내다 버리고 비를 시원하게 들이켜는 모습이 두 사람만의 낙원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호다카와 히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회로 나아갈 용기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안전할 수 있는 권리였던 것이다.


이것이 아이들을 보호하자는 문구로 이어지는 일은 꽤나 속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이 글 전반을 통해 말해왔던 것은 <라쇼몽>의 도입부에 내리는 무수한 소문의 비다. 이 폭풍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꿋꿋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오늘날에는 어떤 종류로든 소문이 넘쳐나는 상황이므로 그것들을 판단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모든 소문에 사실 확인을 하는 것은 굉장한 어려움이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밖으로 나가지 않을 텐가?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내일을 생각하며 발길을 옮겨야 한다. 이때의 방법이 이기적인 자기방어이기 보다 상대를 향한 배타적 이타 주의가 되는 것이 더 낫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추가 : <스틸 라이프>의 배경이기도 한 중국의 샨샤댐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소식을 보았을 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중국은 여러모로 기후에 도전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고, 이것이 중국의 어떤 속성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면 착각은 아닐 것 같다. 이를테면 2008년 8월 8일, 베이징 올림픽을 위해 조작된 기후를 생각해보라. 과연 어떤 나라가 인민을 위해 인민을 희생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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