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하는 근대

<극장판 귀멸의 칼날>(2021)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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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멸의 칼날>의 극장판을 보러 갔다. 이 만화의 이야기는 TV 애니메이션 1기, 첫 번째 극장판, 2기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이 만화를 계속 볼 사람이라면 극장판을 봐두어야만 한다. 따라서 내가 극장판을 보러 가게 된 건 그만큼 TV 판을 재미있게 보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재미와는 무관하게, 내가 열차에서의 싸움을 보며 느낀 건 시시하기 짝이 없는 영화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런 이야기라도 좋다면 들어주길 바란다. 먼저 나는 이 영화에서 혈귀들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영화에는 세 종류의 혈귀가 존재하는데 이하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죽음의 끝자락에서 생명을 보전하고자 혈귀가 된 부류이고, 두 번째는 생명을 넘어서고자 혈귀가 된 부류이며, 세 번째는 타인에 의해 강제로 혈귀가 된 부류이다.


이 세 가지 부류를 <귀멸>의 맥락에서 이하의 것들로 번안해보고자 한다. 이 세계에서 혈귀의 기원은 다음의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로는 만들어져야만 했기에 만들어진 혈귀이다. 이들 혈귀는 개인의 사연보다는 ‘만들어졌다’는 생성과 건축의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다. 사연이야 어떻든 간에 지금 이곳에 살아남았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두 번째로는 만들어져버린 혈귀가 있다. 이들 혈귀는 동시대의 흐름에 가뿐히 올라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 반대다. 이들에게 혈귀란 삶의 세 번째 형태에 불과하며, 어떠한 특수한 지점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세 번째로는 만들어지는 혈귀가 있다. 이 혈귀는 1번 사례처럼 완성품(사후세계)도 아닐뿐더러, 2번 사례처럼 강제성(의지)을 띠는 것도 아니지만, “완성되지도 않았고 강제적이지도 않기에” 미아와도 같은 상태에 놓인다.


1번 사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성품의 형태로(하현), 2번 사례가 왜곡된 사고 주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상현), 3번 사례의 영화들은 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는 돌아오지 않는 항구적인 평화 상태를 유지한다(네즈코). 아이는 유전적으로 부모의 대리물에 해당하지만 그와 동시에 독립적인 개체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모든 혈귀는 무잔의 모조품이다). 이는 아이가 부모에게 종속되어있음과 동시에,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없는 유년기를 부모에게 ‘의탁’할 뿐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혈귀가 되면 유아기적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이 의탁의 상태가 바로 일시적인 평화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국민이 투표를 통해 의회에 권력을 이양하는 것은 국가/부모에 의탁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부모자식 관계는 풀리지 않는 매듭과도 같다 하였다. 귀살대의 창설 이유가 무잔을 제거해야만 가문의 저주가 끝나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라. 여기서 우리는 ‘항구적인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는다. 왜냐하면 팽팽하게 이어진 줄의 탄성은 당겨진 활시위처럼 반대로 작용하는 에너지를 그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혈귀가 없다는 건 어딘가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뜻이다.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그게 곧 혈귀의 짓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혈귀를 피해 갈 수 없다. 이처럼 우리의 근대 세계는 전쟁을 기본값으로 설정해두고서 평화를 일시적인 합의의 상태로 지정했으며, 이에 따라 반작용의 에너지란 ‘평화’ 상태에서 전쟁 상태로 돌아가려는 힘을 뜻하게 되었다.


칸트의 항구 평화론은 현대에 들어 반작용의 에너지를 최대한 줄이는 물리적 법칙과 결탁한다. 빠르게 이동한다는 건 세계와 마찰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이를 통해 한정된 공간에서도 다수의 공존이 가능해진다. 근대에서 현대로의 발달은 속도의 정치와 연관되는데, 작중에 등장하는 열차나 양복과 같은 사물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열차와 양복은 제국의 상징이다. 영국 런던에 신사들이 거리를 쏘다닐 때 다른 한편으로는 잭 더 리퍼라는 괴물이 장소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 괴물은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는 점에서 탄지로가 생각하는 혈귀의 정의에 맞닿는다. 탄지로에 따르면, 혈귀는 돌이킬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혈귀들은 사람을 죽일 때마다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서서히 잃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렌고쿠가 혈귀가 되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단호하게 거절했던 장면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무잔의 말에 따르면, 모든 인간에겐 혈귀가 될 가능성이 있지만 어느 정도의 혈귀가 될 것인지는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달려있다고 한다. 무잔의 이 말은 인간이 가능성의 극한에 도전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혈귀는 인간이라는 선을 넘어 그 바깥에 자리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다음의 논의로 이어진다. 여기, 평화에서 전쟁 상태로 돌아가려는 팽팽한 고무줄이 있다. 칸트는 항구적인 평화가 사물의 마찰계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오늘날 이 방법은 과학이 발달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첫 번째로, 지구를 탈출하는 우주선의 속도는 인간과 행성 사이에 존재하는 탄성을 상쇄한다. 이것은 중력을 이겨냈다가 중력에 몸을 의탁한다는 점에서 탄성의 법칙을 따른다.


ICBM과 같은 전 지구적 미사일 발사 시스템의 출현이 의미하는 바가 그러했다. 지구의 중력이란 곧 전쟁 상태로 돌아가려는 탄성이며, 이에 따라 우리의 저항은 중력을 이겨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르게 보면 이는 지구라는 행성이 제공하는 중력이 일종의 인간적 본능이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미사일은 상승할 때 “우리가 이것을 발사했다”를 적국에게 말함으로써 전쟁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멀어진다. 그러나 이내 곧, 그것이 중력을 따라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면 전쟁의 한복판에 가까워진다. 요컨대 항구적인 평화란 마치 인체의 오르가즘처럼 작은 죽음의 최고점에 다다르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작은 죽음은 명백하게 점의 한 형태로서 존재하지만, 찰나의 순간으로 지속된다는 점에서 항구의 일종이다.


예를 들어 오르가즘을 유발하는 성적 행위는 수축과 팽창의 리듬을 따른다는 점에서 생명 활동의 원리와 유사하다. 세포가 죽고, 다시금 탄생하는 방식으로 인체가 커지듯이 우리의 찰나도 점진적으로 커져 나간다. 그래서 이는 우리의 몸이 전쟁터임을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의 세계가 왜 투쟁의 역사인지를 잘 말해준다. 혈귀들에게는 피를 섭취함으로써 양분을 취한다는 생리학적 특징이 있다. 무언가를 섭취함으로써 강해진다는 건 <도쿄 구울>이나 <진격의 거인>처럼 인간이 아닌 이들의 특권처럼 설정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물론 이는 인간을 잡아먹어야 하기에, 다시 말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할 요령으로 설정된 것이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근대 세계의 괴물이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근대 세계의 괴물은 끝없는 확장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다. 식민 지배의 형태로 드러난 제국주의의 마수는 식민지 사람들의 피를 적극적으로 갈취하려 드는데, 드라큐라 설화의 본격적인 도래가 근대화와 맞물리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국은 신민의 피를 짜서 만든 팽창된 괴물이며 그는 오직 팽창만을 추구한다. 그는 수축했다가 다시금 팽창 상태에 다다름으로써 신체의 말단까지 피를 보내는데, 둘 중에 중요한 건 팽창이다. 팽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신체는 말단부터 썩어 문드러지게 된다. 따라서 혈귀는 동정의 대상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모두에게 그럴듯한 환상을 제공한다. 어쩌면 혈귀와의 공존은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려면 그들이 무잔의 지배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피의 확장을 이겨내고 끝없는 수축을 달성해야만 한다.

끝없이 수축하게 되면 어느 순간 간극이 사라지고, 세계는 하나의 점으로 통합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찰나의 사유이다. 점으로 수렴되는 세계는 사실 속도의 팽창이 아니라 공간의 수축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주 등급의 귀살대원이나, 십이귀월의 혈귀들에게는 그러한 속도전이 적용된다. 이곳에서 강함의 척도란 곧 빠르게 적을 제압하는 일이다. 혈귀들은 하루의 절반을 잃은 대신 두 배의 속도를 획득했다. 반면 귀살대원들은 호흡을 획득함으로써 두 배의 속도를 획득한다. 이로써, 시간을 이용하는 혈귀가 시간에 구애받고, 피를 이용하는 귀살대원이 피에 구애받는 역설이 완성된다. 얼마나 빨리 적에게 도달하는지, 혹은 적이 눈치채지도 못할 사이에 공격을 가하는 게 곧 전투의 승산을 결정하게 되고, 이들은 인간을 넘어선 기계화의 길에 접어든다.


기계화라는 점으로 본다면 이들은 마치 사이보그나 다름없다. 실제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도나 해러웨이 등이 말하는 사이보그의 정의를 참조해볼 수 있을 테다. 혈귀의 정체성은 선택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신체는 근대화, 기계화의 장소가 된다. 이는 네즈코가 인간과 적대하는 혈귀의 특성을 스스로 제거했다는 점을 떠오르게 한다: 그녀가 무잔의 사회화를 거역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보는 게 옳다. 네즈코의 빠른 성장은 그녀가 세계와 마찰하지 않았던 덕택이었다. 예를 들어 네즈코를 불가능한 공존의 상태, 즉 혈귀이지만 혈귀 사냥꾼과 함께 다니는 예외적이고도 일시적인 평화 상태의 인물로 가정해보자. 아마 그녀에게는 다음과 같은 정언 명령이 내려져 있을 테다.


“모든 인간을 가족처럼 여겨라!” 이 정언 명령은 그녀가 혈귀가 된 이후, 탄지로가 2년여 동안의 수련을 하는 동안에 암시의 형태로 내려졌다. 이 명령은 혈귀의 본능인 무잔의 힘에 더 우선한다는 점에서 선험적이다. 요컨대, 무잔의 힘이 부모의 명령에 의해 사회화되는 개인의 위치를 의미한다면, 네즈코의 암시는 그보다 더 자연적이다. 여기서 자연적이라 함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근대가 전제 삼았던 야생의 인류에 대한 것이다. 루소가 인간을 동물의 일원으로 보았을 때부터 우리의 역사는 본능을 극복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었다. 그렇게 보면 귀살대가 극복하려는 건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본능은 기본적으로 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어떤 욕망을 충족하려 든다는 점에서 동물적이다. 탄지로처럼 혈귀를 이해하려 들 때 비로소 전쟁은 끝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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