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은하에서 결과값으로 산다는 것​

<소울>(2021)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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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자아는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피곤들 안에서, 자신의 비참과 가난 속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신의 영광을, 다시 말해서 자신이 응시하고 수축하며 소유하는 것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다.-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1]-


픽사의 <소울>은 개인의 한계, 혹은 일상의 권태로움을 말하는 영화다. 뻔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를 조금은 다르게 표현해보려 한다. “나 자신이야말로 나 자신의 가장 큰 적이다.” 첫 번째로, 이 영화에는 적이라 할 만한 것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적(enemy)’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악당 같은 게 생각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빨간빛을 뜻하는 ‘적(赤)’이라는 한자다. 왜 빨간빛인가 하면, 위험을 알리는 색이 보통은 적색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적색이 위험과 연루되는 것들은 대개 다음과 같다. 횡단보도 옆에 세워진 신호등, 몸에 상처가 났을 때 나는 피의 색깔, 매운맛을 내는 음식들의 공통적인 색깔. 또한 우리는 위험에 닥쳤을 때 ‘빨간 불’이 켜졌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 이 상투적인 표현은 <소울>에서 약간은 다른 방법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사내가 유명 연주자에게 발탁되어 잔뜩 흥분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전화통화에 정신이 팔린 사내는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길가는 행인과 부딪히거나 횡단보도를 무자비하게 침범하거나 하던 중에, 사내는 맨홀 구멍에 빠져 성급한 죽음을 맞이하고야 만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죽었다’라는 말은 최대한 단언적으로, 비가역적인 무언가를 뜻하는 것에 사용되곤 한다. “죽음도 불사한다”라는 말은 그만큼 의지가 있다는 점을,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말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속뜻을 내포한다. 그런데 이 무거운 말이 애니메이션이라는 물질 속에서는 비교적 가볍게 여겨지는 것 같다. 왜 그럴지를 생각해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어서다. 애니메이션이 진짜로 현실인지 아닌지 등의 논의는 중요하지 않다. 확실히 해야 하는 건 <소울>이라는 애니메이션 속에서 사내의 죽음이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어 보인다는 일말의 가능성이다. 이는 우리가 게임을 할 때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전제로 두는 것과도 같다. 게임 속에서도 죽음은 존재하지만 판을 처음부터 다시 깨거나, 부활 아이템을 쓰거나 하는 등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에서도 죽음은 존재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 죽음의 가치는 실사가 주는 그것보다는 못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이 ‘틀렸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소울>의 결말이 사내의 부활로 끝난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어차피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으므로 이 이야기가 시시해 빠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었던 이가 다시 삶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근본적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것은 결코 물리적 죽음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영화의 제목인 ‘소울’처럼 기본적으로는 영혼의 문제를 다룬다. 요컨대 우리는 상처받은 영혼에 대해 물을 수 있고, 영혼은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이 질문들은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영혼이라거나 구원이라거나 하는 말은 솔직히 좀 종교적이고, 종교적이라 함은 세속과는 거리가 있는 듯하니 말이다. <소울>이 다루는 두 개의 예비적 세상, 태어나기 이전의 장소와 죽음 이후의 장소가 바로 그러한 거리감을 갖는다. 이곳의 존재들은 탄생이 유예되었거나 결말이 유예된 상태다. 따라서 <소울>에서 물리적 죽음은 영혼의 삭제로 이어지지 않으며, 저 멀리 보이는 성운 너머로 사라져야만이 비로소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가면 더는 보이지도 않고 생각할 수도 없으며 완전한 어둠으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결국 이곳에서의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한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말해보자. 병원에 누워있던 사내에게 꼬마 영혼이 들어가 임시적 부활에 이르는 장면에서는, 병원의 모니터링 기기 위로 심박수와 같은 데이터가 산출되고 있다. 이 짧은 클립 영상은 오늘날의 죽음이 일종의 데이터로 짐작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병원 모니터링 기기의 선율이 일직선으로 바뀌면 그 환자는 죽은 것이다. 그 그래프가 바로 심장박동을 데이터화한 것이기에 그렇다. 다른 한편, 죽음으로 가는 다리에서 도망친 사내가 ‘어느 초월적 존재’에게 발각되는 것은 ‘데이터 값’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일종의 버그가 생긴 채라고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이 한 편의 게임, 지구의 개인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 푸른 행성, 우리 은하 순서로 천천히 확대되는 공간에서 사내는 유일한 버그(Bug)다. 그는 자신을 벌레(Bug)처럼 여기고, 초월적 존재는 자신의 데이터값을 수정하기 위해 그를 죽음 너머로 되돌려보내려 하는데 어쨌거나 그가 이 게임 안에서의 유일한 존재라는 점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시각을 달리 해보아야 한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이는 누구인가. 죽어도 다시 살아나 보스 몬스터에 도착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주인공 플레이어다. 이 버그적 존재는 데이터 값에 불과하지만 데이터인 채로 있기에 이 게임, 지구 안에서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데이터의 특징 중 하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여럿이 있을 때 비로소 어떤 의미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데이터 수치 자체는 그저 사실만을 표현할 뿐이다. 인간, 남성, 여성, 외계인, 빨간색 기타 등. 이런 데이터가 세상에 들어가 다른 값들과 맞물릴 때 비로소 어떤 해석이 도출된다. 즉, 데이터는 혼자서는 아무런 해석도 도출해낼 수 없는 잠재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울>이 크게는 두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고양이의 몸에 들어간 사내와 사내의 몸에 들어간 꼬마 영혼의 모습은 잠재태의 두 가지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첫 번째로 사내, 그는 오후 9시 정각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앞두게 된 어느 운수 좋은 날을 살아간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가능성의 형태로만 있는 시간이기에 이것은 다가올 시간이자 도래할 시간이다. 오늘 하루의 목표는 오후 9시에 공연을 멋지게 해내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사내는 몸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사내가 꼬마 영혼에게 해주는 말이 “하루하루를 그저 사는 것에 불과하다”라는 사실이다. 불안과 절망으로 가득해 보이는 이 문장은 오전에 죽은 사내가 오후에 다시 살아남으로써 하루 안에 모든 것을 끝마치는 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한다. 즉, 살아야 한다의 완결형인 ‘삶’을 이행해야만 한다.



하루를 그럭저럭 살아가던 사내의 처지는 결코 좋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잘 곳이 있고 최소한 굶지도 않으며 머리 자를 여유도 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빨간 불’은 아니다. 그러나 사내의 일상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건 앞으로의 시간들이 모두 잘린 채 오늘 하루만이 남게 되었을 때인 것이다. 이유야 간단하다. 켜지지 않을 것만 같던 빨간 불이 오늘날 켜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곧바로 멈춰야 한다. 초록 불은 켜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지만 빨간 불은 어느 순간 찾아온다. 우리들 중 다수는 빨간 불이라 하면 건강을 많이들 떠올릴 테지만, ‘자신을 적으로 두는’ 이 영화에서 그것은 일종의 ‘불꽃’이기도 하다. 영화가 노리는 건 이 부분인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불꽃은 영감이거나 ‘빨간 불’이거나 둘 중 하나다. 이 둘은 곧바로 겹쳐지지 않지만 영혼이 뒤바뀌거나 하는 세계에서 그게 안 될 이유는 없다. 아주 분명하게, 이 둘은 하나의 교차 축으로 작동한다. 도래해야만 하는 것이 불꽃이라면, 어느 순간 도래하는 게 불꽃이기도 하다. 즉 불꽃의 앞뒤로 예비된 세계, 꼬마 영혼과 죽은 사내의 모습이 현실 세계의 뉴욕 한복판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바꾸어 말해 현실은 그 어떤 곳으로도 갈 수 있는 교차로이며, 그런 점에서는 그 누구도 죽음과 열정을 감히 예측할 수 없다.



데이터의 해석은 주관적으로 이루어진다. 바라보는 면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그림들처럼 그 데이터는 단 하나의 진실과 여러 개의 표면을 지니고 있다. 지구로 귀향한 사내가 성공적으로 재즈 공연을 마친 후 집에 돌아와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악보 없이도 피아노 연주는 자유롭지만 무언가가 탐탁지 않은 기분이 재즈 공연 직후부터 계속되어 왔다. 그러던 중 사내는 자신이 꺼내 두었던 꼬마 영혼의 작업들, 미용실의 사탕, 단풍나무 씨앗, 먹다 남긴 피자 쪼가리 등의 잔존물들을 보면서, 피아노 위의 악보를 치워버리고 그 대신 잔존물을 올려둔다. 불꽃이 사라지자 불꽃이 태어난 셈이다. 아마 이게 개인, 지구, 우주 등을 하나의 층으로 겹쳐 쌓는 영화의 화법인 듯하다. 우주 안에서 하나의 영혼은 무척 작다. 멀리 볼수록 더욱 그렇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면 삶을 살아가며 인생의 지평이 커져갈수록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는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사내는 어릴 적의 낯선 발견이 지금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낯선 발견이 어린 시절에 이루어졌다는 점만으로 나이가 들어감으로써 점점 더 그것과 거리를 두어버리는 착오를 범하고야 말았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음이 쉽게 추론된다. 언제까지고 무한으로 즐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언젠가”가 무엇인지를 아는 건 아마도 거리감각을 통해 유추되는 것 같다. 재즈 연주자로부터 연락을 받은 날 아침, 기쁨에 몰입해 정신없이 뛰어가는 사내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무언가에 몰입한 이를 묘사하는 영화 속의 장면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바로 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들이 불교적 의미에서의 찰나를 의미하고, 이 찰나를 영화 안에서 불꽃이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 단자(monade)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거리 감각이라는 점에서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제시하고 싶다. 횡단보도는 한 눈에 들어오는 목표다.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건널 순간과 기다릴 순간이 명확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횡단보도는 거리를 배회하는 대중의 감각이 가장 잘 서려 있는 장소인 것이다. 어딘가에서 시작하고, 어딘가에서 끝난다는 건 어쩌면 그런 점에서 열차라는 교통수단의 감각과도 연결된다. 열차 또한 정차역마다 사람들을 오르내리는데, 이 대중(multiple)들이 각자 어디로 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말하자면 열차란 것은 하나의 거대한 교차 축이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대중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를 공간이다.



열차는 그 안에 탑승해 있을 때 속도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도 거론해볼 수 있다. 재즈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친 사내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할 때, 그의 옆에 다가온 명연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다에 있는 물고기는 이곳이 바다인지를 모른다.” 이 말은 전통적으로 ‘이미 그곳에 있지만 바깥을 살아본 적이 없기에 그곳인 줄을 모른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에 사용되어 왔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격언과 비슷하지만, 고여있는 장소가 우물이 아니라 바다라는 점에서 방향성을 지녔다. 바다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장소다. 그와 동시에 부유하는 감각을 제공해주기도 하며, 하염없이 떠다녀야만 하는 부초의 일생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부유의 감각은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첫 번째로는 방향 감각의 상실이다. 지평선은 아름답지만 사방이 바다라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균형의 상실이다. 물 위를 떠다니는 이들은 정해진 자리가 없다는 점에서 불안을 느낀다. 요컨대, 이것이야말로 영화적 의미에서의 ‘무빙 이미지(moving-image)’라 할 수 있다. 이동하는 이미지의 불안은 상상력처럼 자유롭지만 가두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모래사막과도 같다. <소울>의 몰입의 세계가 상상력의 공간이자 불안의 사막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지젝은 무의식의 공간을 사막이라 불렀는데, 니체는 무언가를 짊어진 인간을 낙타라고 말했고, 낙타는 등에 짐을 지고 살지만 물을 마실 때만 등짐을 볼 수 있는 생명체다. 만약 우리가 정신분석학의 사막에서처럼 “내가 생각하는 곳에 내가 있지 않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내가 있음을 안다”면, 현실의 저편 너머에 있는 두 개의 세상 모두를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정신 분석이라는 것은 무언가 어렵고 딱딱한 게 아니라 불꽃에 관한 이야기다. 죽음 충동과 성 충동이 오르가즘이라는 불꽃을 붙잡는 행위라는 점에서 하나의 교차 축으로 작동하듯, 영화에서 열차를 타는 두 개의 장면은 꼬마 영혼이 사내의 몸에 들어갔을 때와 사내가 자신의 영혼을 붙잡았을 때, 두 번에 걸쳐 이야기된다. 꼬마 영혼이 열차에 탑승했을 때 그곳은 눅눅하고 불쾌한 뉴욕의 지하철이면서도, 거울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는 상상계의 장소다. 마치 애니메이션처럼 말이다. 요컨대 꼬마 영혼에게 애니메이션이 주는 현실이 아님(non-reality)의 감각은 현실이 아니기에 하찮게 대할 수 있지만, 반대로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 보이기에 두려운 것이기도 하다. 죽음 안에 성이 있고 성 안에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게 바로 꼬마 영혼이다.



반면 사내가 지하철의 유리창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 그곳엔 무표정한 인간이 들어서 있다. 야외를 지날 때는 바깥을 보여주는 것으로 기능하던 창은 어둠 속을 지날 때 보는 이의 얼굴을 비추는 반향적(reflexive)인 표면이 된다. 즉, 세계의 표면을 통해 자기 세계의 표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바꾸어 말해 유리창 너머의 세상과 얼굴 너머의 세상이 유리창 안쪽의 세상과 얼굴 안쪽의 세상을 비추어보는 것으로 변화한다. 결국 이 들여다봄의 성질이 ‘현실이 아님’이라는 점에서 예술가가 느끼는 희열, 영혼들이 찾아오는 ‘불타오르는 상태(Burn-in)’가 되는 건 필연적이다. 무언가의 너머를 엿본다는 건 오래도록 금기로 여겨져 왔다. 영화가 주는 엿보기의 쾌감은 무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존재, 어느 관찰자가 있으리라는 점을 생각하게 하면서 우리를 감시의 상태에 놓이게 한다. 매 순간, 내가 만들어낸 카메라를 통해 관찰되는 우리의 모습은 준거점이라는 하나의 이상향을 만들어내며,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에 미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시각의 아래로 폄하한다. 그러나 카메라를 통해 우리의 시각이 폄하된 기술복제 시대에 카메라를 통한 관찰은 우리를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주관적’ 해석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데이터가 단 하나의 진실과 여러 표면을 지녔다면, 가상의 카메라를 상정해 자신을 관찰하는 행동은 단 하나의 현실과 여러 방향으로 찢어지는 마음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이 찢어진다. 정신은 분열된다. 카메라가 포착한 현실은 물건의 레이어, 인간의 레이어, 하늘의 레이어 등으로 나뉘면서 우리 자신을 디자이너로 만든다. 포토샵 위에서 여러 레이어가 하나의 이미지를 구축하듯이 어떤 프로그램 안을 살아가는 우리는 특정한 목표와 기능을 하도록 교육받았다. 무빙 이미지가 자아내는 불안은 그런 점에서 연유한다. 무빙 이미지의 불안은 열차에 올라탄 사내가 빠르게 변화하는 창밖의 풍경을 볼 때의 경우처럼 찢어지는 세계에 대한 강한 반발로부터 비롯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 시절의 꿈과 멀어지거나, 어른이 되면 무언가 될 줄로만 알았던 자기 자신의 이미지 구축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이에 해당한다. 사내가 안정적이고 의료보험도 보장되는 교사직을 두고서 어머니와 갈등을 빚듯이, 시간 안에서 신체라는 이동수단에 탑승한 우리는 반강제적으로 늙어가며, 어느 순간 세포의 분열이 예전만큼 못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러니 달리 생각해보면 분열한다는 건 살아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은 살은 회복되지 못하는데, 세포가 분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과 마찰할 일이 적어질수록 체감되는 속도는 빨라진다. 자동차와 같은 이동수단이 점차 가속할 때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희미해지고, 육안으로 관측되는 이미지가 희끄무레한 무언가로 통합되듯이, 나이가 들수록 현명해지는 노인들에게 시간은 점점 빨라져만 간다. 삶에 대한 연륜을 획득함으로써 세계와 마찰할 일이 적어지고, 마찰할 일이 없으니 시간은 소멸을 향해 가속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사내의 바지가 어머니와의 화해로 이어지는 것을 떠올려 보자. 비록 그 안에 있던 건 꼬마 영혼이었지만, 바지가 찢어짐으로써 어머니를 찾아가게 되었고 어머니와 화해하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역시나 꼬마 영혼이 스쳐 지나가듯 언급한 ‘루틴(routine)’이라는 단어일 것 같다. 루틴이라는 건 매일의 시간을 뜻하고, 바지가 찢어졌을 때 매일의 시간에는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이 균열은 분열이라는 단어처럼 완고한 것들의 붕괴 조짐으로 여겨지곤 하지만, 현실이 아니라 '너머(beyond)’를 말하는 이 영화에서는 세계를 오갈 수 있게 해주는 교차 축이다. 공간에 균열을 내어, 틈새를 찢고 몸을 욱여넣지 않으면 출근길 만선 열차에 탑승하는 것과 같은 기회는 생기지 않는다. 여러 차원을 이동하는 초월적 존재들이 말하길, 인간이 이해할 수 없기에 ‘제리’라는 이름으로 편하게 불러 달라고 했다. 그리고 꼬마 영혼은 그 누구도 자신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지구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누구도 (nobody) 되기를 거부하는 이는 육체가 없는 (no-body) 이라 할 수 있다. 육체가 없는 세 명의 자아들, 영화와 영혼과 불꽃은 그 누구도(no one) 아니지만 신이 아니(No-ONE)기도 하기에 오히려 자유롭다.




[1]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서울: 민음사, 2004)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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