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디지털만화규장각에 게시되었다.
http://dml.komacon.kr/webzine/review/27572
1.
만화는 채찍 같은 매체이다. 선형적이면서도 날카롭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컷 하나를 병렬로 배치해 보여주는 만화의 편집 방식에서는 이야기가 매화가 끝날 때마다 단절되곤 한다. 그런데 작품 연재가 다 끝나고 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몰아보면 이야기가 부드럽게 이어진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작품을 만드는 사람입장에서는 다르다. 매화마다 이야기의 강도를 조절하면서, 전체적인 흐름을 잃지 않게 하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처음부터 책 한권에 완결이 난다면 모를까. 웹툰이나 시리즈 만화처럼 계속해서 나아가야 하는 경우에는, 사실상 기획에 해당하기에 작품이 중간에 전복될 위험은 항상 있다. 쉽게 말해 독자가 중도 하차할 위험이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독자의 중도 하차율이 늘어날수록 버스의 운행이 멈출 확률은 늘어난다. 예컨대 만화가는 작가인 것만이 아니라 고객을 응대하는 서비스업 종사자이기도 하다.
작품의 연재주기가 짧을수록 큰 이야기를 풀어내기란 어려워진다. 한달 연재, 격주 연재, 주간 연재, 일일 연재. 만화를 그리는 속도도 문제이지만 기획과 구성 면에서도 짧은 준비기간은 어려운 일이다. 음식을 먹을 때, 너무 잘게 썰면 식감이 애매해지듯이 만화도 전체 이야기를 너무 잘게 썰면 구성이 모호해진다. 만화만 잘 그리면 장땡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만화에 탑승한 고객들은 작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은 재화를 냈고 그만큼의 무언가를 돌려받기를 원한다. 이는 조회 수나 별점과 같은 요소가 실시간으로 집계된다는 점에서 굉장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영화처럼 일단은 만들고 난 후에 평가가 뒤따르지 않기에. 작품의 완성도를 꾸준히 높여 나갈 수 있지만, 이를 반대로 하면 그만큼 세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세상을 잘 보여주는 매체는 영화보다 만화일 수도 있다.
2.
영화를 만드는 이를 분류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이는 각각 감독(Director), 기술자(Technician), 작가(Artist)로 불린다. 영화감독이 영화 전반을 기획하는 사람이라면, 영화 기술자는 영화를 기술적으로 잘 만드는 사람이고, 영화 작가는 영화를 심미적으로 그려내는 사람이다. 이 세 단어 중에 ‘기술자’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화를 단지 기술적인 무언가로만 치부하는 듯한 느낌이 들 테니 말이다. 그러나 영화 기술자에 해당하는 이들의 목록을 본다면 생각은 좀 달라질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 알프레드 히치콕과 같은 인물이 영화 기술자 타입에 해당한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위의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다른 두 가지의 결핍이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론이자 분류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만드는 과정’에 대한 해석이 아니다.
만화를 만드는 이들에게도 이것을 동일하게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위의 말을 기획자, 장인, 예술가라는 말로 번안한다. 만화를 기획하는 이가 있고, 만화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이가 있으며, 만화를 통해 미(美)를 전하려는 이가 있다. 첫 번째. 만화 기획자는 동시대에 필요한 기획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반포하는 것을 그의 의무로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기획자에게 중요한 건 소재의 날카로움과 시의성이다. 두 번째. 만화 장인은 우리가 흔히 말하곤 하는 ‘만화력’의 주인공이다. 날렵하면서도 중후한 펜 터치는 수려하고 인상 깊은 작화를 만들어낸다. 세 번째. 만화 예술가는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사람들이 무언가를 느끼기를 원한다. 이 느낌은 기획자의 날카로운 지적과는 다른 면으로, 미술관 벽에 걸린 액자를 보는 것과 유사한 인상을 준다.
3.
(연재) 만화를 두고서 채찍 같다는 말을 사용한 건, 그 형식에서 선형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무언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펜싱 칼처럼 만화는 휘어지면서도 찌르는 무기가 된다. 그러니 (어딜 가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만화 또한 휘두르는 사람에 따라 강력한 파괴력을 낸다. 이 과정에서 만화의 ‘실시간’이라는 요인은 발진-전개를 위한 에너지 획책의 수단이 된다. 매화 분절되는 이야기는 작품 전체의 큰 흐름을 깨뜨리지 않고서 도약을 위한 증폭의 지점이 되곤 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만화가 현실보다 먼저 앞서 가는 경우도 있다. 사회 문제를 지적하는 몇몇 작품들의 경우가 그렇다. 최초에는 어떤 발화 지점을 발견해 그것을 다른 이에게 알리고자 했던 기획자의 작품이, 매화의 증폭을 거듭하여 마침내는 앞으로의 미래를 예견하는 ‘예언서’가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획자의 탈 것에 올라탄 독자들은 작품에 영향을 주기보다 작품에 영향을 받게 된다. 쉽게 말해 기획자가 작품을 장악한다. 기획자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경전을 써내려 가고 경전을 받아든 독자들은 교리를 실천하는 신도가 된다. 교리를 실천한다는 말만 보면 어느 종교의 교주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신봉하는 것은 교주가 아니라 교리이다. 휘두르는 교리는 잔잔한 물결로부터 시작해 거대한 파문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우리는 거센 풍랑이 닥쳐온 대양 한복판에 닥쳐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해진 문제의식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말해주는 이가 있는 덕분이다. 예컨대 우리는, 떠나온 곳에서 가야 할 곳까지 만화라는 끈으로 엮여 있다.
4.
최규석이 네이버에 연재한 <송곳>의 2013년으로부터 <지옥>을 연재하는 2020년에 우리는 도착했다. 이 7년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그중에 가장 뜻깊은 날은 최규석의 <송곳>이 연재를 시작한 2013년이다. 시대의 당연한 흐름일 수도 있지만, 최규석을 웹툰으로 만나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규석은 언제나 세상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그것이 가끔은 회초리로 다가오기도 했다. 이 단단함이 어쩌면 진입 장벽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최규석은 알았던 걸까. <송곳>은 네이버 플랫폼에서 연재되어서인지 대중에게 더 잘 노출되었고,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심장이 만들어낸 상승기류는 회초리를 회오리로 만들었다. 교조적이던 직선이 보다 실천적인 곡선으로 변모하였고, 우리는 세상을 조금은 더 유한 눈길로 파고들 수 있게 되었다.
<송곳>이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시청자 게시판에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보기 불편하다’는 의견이 쇄도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드라마 제작사에 해야 할 말이지 최규석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최규석이 휘두르는 채찍이 드라마라는 2차 가공 형태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는 있다. 그리고 이는, 최규석이 단순히 만화력이 높기만 한 장인도 아니고, 심미적인 것을 예찬하는 예술가도 아니며, 지금 우리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기획자인 덕택이다. 최규석의 기획은 시대를 횡단할 뿐만 아니라 매체도 횡단한다. 최규석이 휘두르는 채찍은 시대를 가열하게 당기는 무기가 아니라, 감싸야 할 것은 감싸고 내쳐야 할 것은 내치는 문제의 가항반원을 설정한다. 이 가항반원의 안쪽에서 보호받아야 할 이들은 보호받고 목소리를 낸다. 그 바깥에 있는 이들은 유하게만 보여 약자로 생각되던 선들에게 호되게 얻어맞는다.
5.
너무 사실적인 것들에 대하여. 분명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어찌 표현할지 매사 고민해야 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라 해도 정도(正道)를 걷지 않는다면 바르게 전해지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떠오르는 한 마디는 ‘선 넘네’라는 문구이다. 오랜 세월 사랑받았던 개그 프로그램이 종영을 택했을 때 프로그램 관계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이 예전과 비교하면 민감해졌고 코미디언들도 그만큼 조심스러워졌다.”고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말은 개그 프로그램에 대한 옹호나 비판 중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한다. 이 말은 마치, 예전에는 선을 넘는 것에서 재미를 찾았었는데 인제는 선을 넘지 못하게 되어서 재미를 추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선을 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 본래 전하려던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괴물과 싸우는 이는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다르게 말하면 이는 개그가 꼭 ‘웃긴’ 무언가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다. 슬픔을 보며 웃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개그가 전해주는 해학이다. 마찬가지로 선을 넘는다는 것이 꼭 가공의 선을 설정하고서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유하고 부드러운 물질이지만, 휘두르는 사람에 따라서는 아주 강력한 기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고뇌에 빠진 이의 이마 주름일 수도 있고, 슬픔에 빠진 이의 눈가 주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최규석의 선형성에 빠져 있는 흔적들은 작품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새겨진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