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디지털만화규장각에 게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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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통에 관한 이야기
산다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상처가 난 걸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팍 죽어버릴 테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스러워야 한다. 상처를 통해 성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 상처받아야 한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는 오늘날 살아있는 이들이 왜 상처받은 채인지를 설명해준다. 강한 이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이가 강한 것이다. 그들의 강함은 상처를 버티어내는 힘이다.
오래된 고목의 표면에서 갖은 자국을 보고 나면 그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지 짐작해보게 된다. 이와 유사하게 인간에게도 세월이 남긴 자국이 있다. 얼굴에 남은 주름은 시간의 풍파를 견뎠기에 생긴 상처다. 시간은 바람처럼 인간을 할퀴고, 우리의 몸은 성할 날이 없다. 허나 아무리 불어도 바람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지 못한다. 아무리 상처받아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삶에 대한 의지 때문도 아니고, 시간에 대한 반항심 때문도 아니다. 상처가 삶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잠의 원료가 피로이듯 상처는 삶의 원료다. 만약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살아가기 위해 상처받아야 한다는 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워서일 테다. 물론 그 말이 옳다. 허나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웃음은 빛과 같아서 어둠과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또한 웃는 이가 있다면 우는 이도 있을 것이다. 웃는 이와 우는 이가 한 자리에 공존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극이라 부른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일식을 두고서 그런 표현을 사용했듯이 말이다.
2. 빛과 어둠에 관한 이야기
컬러와 흑백에 관해 이야기해보자면 이를 각각 빛과 어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맥락으로 보면 컬러와 흑백은 공존할 수 없다. 하지만 컬러와 흑백의 공존은 우리를 현실의 밖으로 이끈다. 일식이 일어날 때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고 여겼던 고대인들처럼, 한 화면에 공존하는 두 가지 세상은 교차로에 선 우리를 가정한다. 이른바 희비교차, 울면서 웃는 표정은 무엇이고 웃으면서 우는 표정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지면서 이기는 이는 누구이고 이기면서 지는 이는 누구인가.
싸움은 진 사람과 이긴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전쟁에 진정한 승자란 없다. 어떤 면에서는 상처뿐인 싸움을 왜 하는지 묻고 싶어진다. 이에 대한 자문자답.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상처받는다. 아니, 우리는 삶을 위해 상처받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전쟁은 살아감의 증표이자 행위이다. 삶은 전쟁의 연속이며 전투함으로써 나와 상대는 살아갈 수 있다. 여기에는 죽음이 아니라 고통이 개입하며, 고통이 과하다면 죽는 수밖에 없고 죽은 이는 말이 없기에 우리는 죽음을 모른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비밀은 지켜진다는 게 아니다. 신생아는 말을 할 수 없기에 우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는 신생아의 울음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정확히 알아낸다. 무릇 차이는 있겠으나 대부분의 울음은 고통스러움에 대한 간접표현이다. 아기는 배가 고파서 운다. 아기는 몸이 아파서 운다. 아기가 조용해지는 순간은 잠이 밀려와 눈을 감을 때밖에 없다. 잠이라는 게 일시적인 죽음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기는 죽음의 순간에만 울음을 멈춘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힘이 들 때 잠에 빠지는 이유는 그것이 유사 죽음이어서다.
3. 죽음에 관한 이야기
죽음의 순간이 정말로 죽음인지를 우리는 모른다. 죽음이 결정된 순간에 우리는 죽어있기에 죽음을 스스로 확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른 이유로 정지훈은 죽음을 모른 체하고 싶은 것 같다. 코미카에서 <수평선>으로 데뷔한 그는 흑백이 좋다고 말했다. 동시에 <수평선>이 자신이 그린 만화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이제 막 시장에 안착한 신입이 할 말이 아닌 것도 같지만, 편수로만 보면 벌써 5편의 작품을 연재했다. 그중 현재진행형으로는 네이버의 <더 복서>가 있고 이것도 꽤 괜찮은 작품이다. 그러니까 그가 <수평선>을 마음에 들어하는 까닭이 따로 있을 것이다. 단순히 데뷔작이라는 이유가 아닌 다른 무언가 말이다.
누군가의 데뷔작이 여태까지 해왔던 생각을 꽉 눌러담은 ‘고봉밥’이 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예 작가의 데뷔작은 그만큼 열정이 넘친다. 때로는 열의가 과해 전체적인 균형이 맞지 않을 때도 있지만 우리에겐 그것을 감안해줄 마음이 있다. 작가의 데뷔작은 앞으로의 앞날을 가늠해보는 지표이자, 그가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지훈의 <수평선>은 어떠한가. 이 만화에는 자극적인 맛도 텁텁한 쓴맛도 없다. 수평선이라는 제목처럼 너무나 평행하고 무난한 지평이 펼쳐져 있다. 허나 반대로 보면, 여태까지 살아온 것과 앞으로 나아갈 길의 균형이 맞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만화의 시작에 한 아이가 나타난다. 우리는 이 꼬마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 이른바 출신 없는 주인공은 모든 떠도는 것들의 원형이지만, 적어도 꼬마에게 집이 없다는 점은 알 수 있다. 집이 없는 이들은 항상 떠돌기 마련이니까. 또한 집이 없다는 건 안식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집이라는 건 심리적인 안정을 주어야만 비로소 공간으로 기능한다. 심리적인 안정을 주지 못하는 공간은 몸을 눕혀봐야 불안을 자극하기만 할 뿐이다. 예컨대 집시들의 방랑이 영혼의 방황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4. 사랑에 관한 이야기
<수평선>은 전쟁 중에 가족을 잃고 얼굴에 상처가 난 채로의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소년은 전장을 떠돌다 소녀를 만남으로써 ‘소년 소녀를 만나다(Boy meet girl)’라는 공식을 성립시킨다. 이 공식을 통해 소년은 집을 되찾는다. 즉 소년에게 소녀는 심리적인 안정을 주는 이다. 그렇게 여태까지 울음에 가까웠던 소년의 세상은 소녀를 만남으로써 웃음에 가까워진다. 소년은 소녀에게 잘 보여야 하고 그러려면 울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년이 운다고 해서 그것이 소년의 패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소년은 울면서 이긴다. 소년은 우는 표정을 지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
소년이 소녀와 함께하는 여정에는 많은 사람이 마치 시간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시간처럼 소년소녀를 할퀴고 지나가지만 그때마다 두 사람은 버티어 낸다. 작품 안에서 시간의 흐름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고 인물을 통해 암시되는 이유는 그런 상처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소년이 만난 인물들은 전쟁으로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집을 잃은 이들이다. 즉 그들은 집시이고 영혼의 안식을 갈구하며 세상을 떠돈다. 세상을 떠돈다는 점에서는 소년소녀와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진부한 클리셰를 다짐하기라도 하듯이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다. 사랑이 없기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말인즉슨 단 하나를 위해 나머지 모두를 바칠 만한 대상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이를 두고서 <수평선>을 사랑에 대한 예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류애(人類愛)이던 남녀관계이던 간에 말이다. 정지훈의 호기심은 위에서 말한 그 ‘하나’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단 하나를 위해 살아간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모험가의 삶이 끝이 없는 이유는 탐사라는 게 선을 넘는 행위여서고, 남녀관계에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운명의 실로 엮였기 때문이다. 보다 시적으로 표현하면, 수평선은 앞으로 나아가는 세로선이자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가로선이기도 한 것이다. 세로로 놓이면 밧줄이 되지만 가로로 휘두르면 얼굴에 상처를 내는 채찍이 되는 것, 그게 바로 선의 논리이다.
5. 선에 관한 이야기
악당은 착할 수 없다고 우리는 배웠다. 그러나 모든 악당이 나쁘지는 않다. 각자의 사연에 따라 행동하는 것들이 타인의 눈으로는 악해 보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생존의 논리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것, 이는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논리이다. 반면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났음에도 자연스럽지 않은 생물이기도 하다. 동물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위해서만 헌신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도 헌신한다. 예컨대 인간의 사랑은 혈연관계가 아니다. 인간의 사랑은 육체의 선이 아니라 운명의 선으로 얽혀있고 그것은 수평선이다.
소년소녀가 만나는 이들은 선악을 구분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소년소녀는 그들이 악인이 아니기를 바라며 선인으로 대우해주지만, 그들이 선을 넘어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알고 보니 악인이었다는 말보다는 어디까지가 가능한 선인지를 구분하기 힘들었다는 게 옳은 표현이다. 둘 중 먼저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소녀이다. 소녀는 지면서 이긴다. 먼저 다가가 피해를 입지만 종국에는 그만큼 되돌려받는다. 반면 소년은 의심이 많다. 그래서 소년은 늘 이기지만 결국에는 지고야 만다. 두 사람이 만나 각자의 성향이 중화될 수 있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수평은 소녀의 죽음으로 인해 깨어지고야 만다.
소녀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상대에게 져주는 일의 실패가 아니다. 소녀는 웃으면서 울었고 세상의 밝은 것들에는 고통이 뒤따른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소녀의 죽음은 예견된 것이라 보아도 좋다. 걸어가는 길이 고통인 것은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요, 걸어가는 길이 기쁨인 것은 두 사람이 같은 시간을 보내서다. 예컨대 같은 상처를 공유한다는 것, 하지만 소녀는 세상이 상처받기를 원치 않았다. 세상이 상처받지 않는다면 시간의 굴레는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시간은 지평을 넘어 사건이 되었다. 아마도 사건의 지평선이 멀리서 수평선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죽음 이후를 알 수 없는 건 그곳에 강력한 힘이 작용하기에 시간이 왜곡된 것뿐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