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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05. 2020

좌표로부터 도망치기, 지표의 으스스함에 익숙해지기


방구석에 앉아 책만 읽으면 세상 물정을 모르게 된다고 말하는 어느 학부모를 보았다. 교육 관련 프로그램이었으니 그렇게 이상한 말도 아니지만, 이 방송에 대한 몇 사람의 반응은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그들은 다음처럼 반문했다. “책 자체가 타인의 경험을 서술해둔 것인데, 책만 읽어서 경험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말 아닌가?” 학부모가 그 말을 한 이유는 아마도, 세상에 나가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작용하는 것과 같은 ‘만남’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맥락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다른 쪽으로 이 이야기를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경험에 관해서다. 


이를테면 영화를 생각해보자. 영화를 본다는 것만으로 영화 속 풍경에 대한 모든 감수성을 얻어낼 수 있을까. 배우들의 화려한 연기가 아니라 세상의 재현과 나 자신의 감정과 같은 면 말이다.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계의 반짝이는 면이지만, 그 반짝임을 ‘본다는 것’ 자체가 현장과 풍경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를 투입하게 됨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로만 세상을 탐구하는 이들은 현장에 있는 이들과 자신을 비교해보면서 끊임없는 자괴감에 시달리게 되기도 한다. 머리로만 알고 가슴으로는 알 수 없는 것, 누군가의 경험을 익힌다 해도 직접 느끼는 것과는 뭔가 다른 점이 있으리라는 환상. 어쩌면 우리가 영화를 찍거나 보는 이유는 그런 환상을 사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환상을 사랑하는 경험 자체가 환상적이라는 소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장의 경험이 언제나 우위에 서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매체를 통해 얻은 경험은 매체 나름의 고유성이 있고, 어떤 면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독자적인 것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게임이나 VR과 같은 것, 혹은 인공위성을 통해 들여다본 지리정보체계처럼 우리가 아는 현실의 것과는 다르면서도 어떤 점에서는 더 우위에 서는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앞서 말했던 환상은 다음처럼 바꾸어 서술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가질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나와는 다른 무언가이기에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고. 우리의 환상은 어떤 우열의식으로 가늠되는 성격의 열등감이 아니라 서로와 소통하며 몸을 매만지는 부류의 호기심이라고.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 육체의 끌림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건, 아마도 몸이 아니라 몸에 담긴 무언가에 끌리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이곳에는 국경도, 성별도, 출신도 없다.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법한 일이나 혹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육체의 영역으로 넘어올 때 우리는 그것에 끌린다. 그러니 우리는 이걸 두고서 이성의 패배로 보아도 좋다. 그러나 이미지는 항상 이성적으로 파악되기를 거부해왔다. 눈에 보이는 순간이 곧 놓쳐버리게 되는 순간과 일치하는 영상 매체에서는 단박에 파악되지 않는 것들이 마치 그동안 놓쳐왔던 것들처럼 우리 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게 무엇일까. 너무 익숙하기에 오히려 놓치게 되었던 건 아닐까. 


이른바 환등기의 환영이라 불리는 영화 매체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눈앞에 놓아주는 것으로서 그 자신의 환영을 온전히 실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환영은 우리가 이미 알던 것들이 세상의 표면에 올라오기만 했을 뿐이다: 이 현혹하는 이미지는 우리가 기존에 잊고 지내던 것을 무대 위에 올려 둔다는 점에서 잔인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처음 본 것처럼 그들을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분명 잊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되던 것들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그런데 사실은 망자가 돌아온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쪽이 지독한 망각에 빠졌었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이는 마치 그동안 나와 세상을 분리해오던 것들이 사실은 나를 구성하는 물질들이었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과도 유사하다.  


이렇게 생각 속에 억압된 것들이 유령의 형태로, 실재의 형식으로 표면화되고 그 과정에서 사회는 분열증을 겪는다는 게 들뢰즈의 주장이기도 했다. 지젝은 이를 반대로 해석하여 ‘실재의 귀환’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이 귀환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유령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된 흐름으로부터 추방된 것들이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았기에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 그 존재를 서서히 파묻어 갔었다는 점이 이 이야기의 요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해석은 우리가 그동안 버림받았다고 표현했던 대상들에게 주체의식을 넘겨줌과 동시에, 우리가 왜 그들을 먼저 찾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공한다. 즉, 우리가 그들을 버렸기에 죄의식 비스무리한 감정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게 아니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반쯤은 두려움이 섞인 마음으로 그들에게 접근해 유령의 희미한 몸짓에 응답해보려는 의지인 것이다. 


영화가 아니라 사진에는 유령이 담겼었다. 그러나 필름이라는 매질이 사라지고 난 지금 세상에서 심령사진은 더는 찍히고 있지 않다. 이유는 아마도 둘 중 하나일 듯하다. 디지털은 육체가 없으니 유령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거나, 혹은 디지털 세상에도 유령은 여전히 떠돌고 있다고 말이다. 어쩌면 영화에 등장하는 유령이 전혀 무섭지 않거나, 혹은 생각보다 더 무서운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테다. 몽테뉴가 ‘나는 내 책을 구성하는 물질이다’라고 말했듯이 영화는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인 것이며, 그렇다면 영화에 등장하는 유령들은 영화로 인해 등장한 게 아니라 영화로 빨려 들어가 쇼트라는 철창 안에 가두어진, 동물원의 원숭이와도 같은 존재다. 


여기서 잠시, 그 유령들이 정말로 우리의 현실로부터 온 것들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유령들은 우리 세계의 그림자이기보다는 그늘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현실의 반대편에 끊임없이 달라붙는 무언가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점만을 말해줄 뿐인 지표적인 무언가에 불과할 수도 있다. 디지털의 언어로 말하자면 좌표쯤으로 표현할 수 있을 테다. 좌표라는 건 그곳에 무언가 있음을 보여주는 표지이자 동시에 그곳에 아무것도 없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전투기의 계기판에 달린 레이더를 떠올려보자. 레이더에 잡힌 신호는 그곳에 무언가 있음을 말해주지만 그와 동시에 무엇이 있는지를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기러기 때인지 적국의 전투기인지 아니면 민간 항공사인지를 단지 레이더만으로는 알 수 없다. 


디지털은 세상을 재현(representation)해내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세상을 재연(reenact)해낼 뿐이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회화가 사진이 등장한 이래로 현실 재현에 관심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건 예술사에서 아주 유명한 사실이다. 시기에 맞물려 이루어진 초현실주의 선언의 주된 목적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억압된 것들을 수면으로 떠올려 놓고서, 그곳으로 다가가 그들과의 만남을 갖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표면에 관한 의지는 과거에는 중간지대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는 경계라는 이름으로서 다양한 구역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 신기한 것은 역시나 디지털이다. ‘으스스한 것들’을 불러 모았던 경계의 담론은 어째서 디지털 세상으로 가게 되었을까?


경계라는 것은 바닥에 그인 금이 아니라 세계에서 존재를 특정하기 위한 일종의 크로마키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탈은폐라고 불리는 이 작업은 초록색 배경 위에 배우를 투입시켜 만들어 내는 가상 세계의 추적 쇼트(Tracking shot)이고, 이 경계의 작업은 현실과 가상 모두에 존재하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현실이 있는 곳에 가상이 있다는 그늘의 담론을 우리에게 전한다.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영화가 현실과의 지표적 연결고리에 관심을 잃게 되었다는 점도 그와 유사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기존의 것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최초의 설계도가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곳에서 그것은 더는 재생산 되지 못하거나, 된다고 해도 이전과 같은 무언가는 아니라고 말이다. 


이는 어쩌면 유물론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생각일 텐데, 최근 웹툰과 애니메이션 등지에서 사용되는 3D 렌더링 툴을 예로 들어보자. 이전 시대에 2D 애니메이션이 손으로 동화를 그려 만들어졌다면, 근래에는 3D 사진을 2D 풍으로 변환하는 디지털 프로그램이 출시되어있다. 이를 통해서 웹툰 작가는 배경묘사에 들일 시간을, 애니메이션 회사와 게임 회사는 ‘카툰 렌더링’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과거를 현재에 유사하게 묘사해낸 이 기술들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건 재생산을 거친 후의 결과물이지 그것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혹은 그 설계가 작품의 내용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끼치는지와 같은 면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때 배경을 손수 그리지 않았다면 더는 만화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하거나, 만화풍의 그림체를 사용하는 건 게임으로서 반칙이라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놀림거리가 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작업 시간 단축을 위해, 후자의 경우는 만화를 하나의 스타일로서 사용했으니 말이다. 이는 기술이 발전된 상황에서도 과거의 것을 사용하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며, 그것들은 실용적인 면이 아니라 심미적인 측면으로라도 계속해서 살아남을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영화가 회화나 사진을 닮으려는 시도 또한 같은 맥락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영화가 회화와 사진으로부터 출발했다 하더라도, 그들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자신의 본래 설계를 탐구하려는 게 아니라 단순히 과거의 것에 대한 심미적 추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이 경우, 누군가는 영화가 자신의 근본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면서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기 십상일 테다.

 

그러나 영화가 잃어버린 것은 자신의 설계도가 아니다. 따라서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필요가 없던 것이다. 만약 우리 시대에 기술이 발달해 영화가 자신의 설계도를 잃어버린 채라면 영화는 더는 재생산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의 본래 설계도가 아직 남아있거나 혹은 육안으로는 같아 보이는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변형이 이루어진 채라는 두 개의 가정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따라서 둘 중에 디지털 시대에 더 적합한 방법론은 후자인 듯 보인다. 


먼저 디지털 시대가 갖는 근본적인 변화를 언급해보도록 하자. 디지털 시대에 영화는 필름이라는 물질적인 지표를 갖지 않는다. 즉 디지털 시대에 영화는 세계와 직접 맺어지지 않고 있다. 이해를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최근 100배 줌이 가능한 카메라 렌즈가 등장했다고 가정했을 때, 이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세상은 우리가 아는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단지 확대했을 뿐 여전히 같은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영화에서의 익스트림 롱 숏을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주 멀리, 작게 보이는 대상이 그곳에 정말로 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이 시선의 주체는 결코 인간의 그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기술을 통해 재생산된 시점이 우리 현실과 어떤 지표를 맺고 있는지는 겉으로 구분하기 힘들다는 소리다. 


과거에는 이와 같은 예외적인 것들만이 인간의 바깥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렌즈에 포착된 모든 것이 인간의 밖에 자리한다. 처음부터 우리와 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 없으므로 우리는 세계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확신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는, 증거는 없지만 직감적으로 이해되는 모종의 추론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추론이 세계에 대한 객관이라 단언할 수 있을까? 진실 여부를 떠나 이 사실을 잠시 머무르게 할 지대가 없다는 점은 우리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 의심하게 한다. 이처럼 무엇이든 간에 생각을 잠시 맺어줄 증거, 지표가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이는 우리의 시선이 반드시 무언가를 거쳐야만 비로소 완성됨을 말해주기도 하는데, 시선이 곧 욕망이 되는 경우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일찍이 라깡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영화에서의 응시에 관한 연구는 대체로 이를 따랐었고 이를 인간이 아니라 지표로 옮겨도 크게 무리가 따르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본디 회화라는 건 인간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기 위해 투사 화법을 발명해냈으며, 이를 통해 신과 인간을 성공적으로 분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생각해본다면 그렇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지표를 통해 지표를 한다. 


그렇다면 지표를 한다는 건 무슨 말인가. 당연하게도 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디지털 시대에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는 지표를 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마땅한 물질적 지표를 통해 맺어지지 않는 관계가 그 자체로 지표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우리가 영화를 보는 행위가 곧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는 행위와 같은 취급을 받았던 때가 있었듯이, 영화를 보는 것에서 곧 자신이 세계와 맺어지는 감각을 발견하는 일은 우리 시대에 일상이 된 것이다. 이는 디지털 시대가 세계와 관객의 거리를 멀어지게 할 것이라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의 지표성은 그것이 인지되지 않음으로써 세계와 더 밀접하게 맺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지표를 한다는 표현이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가 과거에 무언가의 흔적을 발견하던 게 사물의 지표성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지표성이란 우리와 곧바로 접촉하게 된다. 


디지털 시네마, 또는 포스트 시네마에서 화두로 떠오르는 게 이러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맺어짐이나 접촉, 이접과 같은 말로 지칭되는 이 현상들에게서 재현의 문제란 대상을 직접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 후에 세계에 대한 진실이 뒤따르는 포스트-재현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진실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음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아니라 진실을 발견할 수 없는 근본적 한계 속에서도 새로운 진실을 발견해보려는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위안부 문제와 같은 과거사에 대한 접근은 어디까지나 관련자들의 구술이나 왜곡되고 파편화된 문헌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통적인 관점으로는 이들에 대한 재현이 ‘남겨진 자’라는 정보밖에 남기지 못하지만 포스트 시네마에서는 재현이 아닌 재연이 도드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재현이 있는 그대로를 묘사할 수밖에 없는 반면 재연은 묘사를 통해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여기서는 진실이 후천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지와 같은 문제가 제기되곤 하는데, 아무래도 본다는 것 자체가 배반당한 현실의 문제를 푸는 게 더 시급한 과제인 듯하다. 우리에게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던 과거는 이제 없고 수면에 얼굴을 맞대어 물속을 들여다보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흐릿한 지표조차 사라진 지금 세계는 카메라 너머의 것과 곧바로 맺어지며 여기서는 보여주는 이가 아니라 바라보는 이에게 전적인 권한이 주어진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세계는 주체가 바라보는 즉시 주체의 의지에 의해 재편된다는 것이다. 마치 슬릿을 통과한 전자가 파동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큐멘터리라는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하며, 또 다큐멘트(Document)란 무엇을 의미하는 게 될까.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에 붙여졌던 이 칭호는 이제 본래의 의미로부터 반쯤은 떠나온 듯하다. 예를 들어 페드로 코스타의 <행진하는 청춘>을 살펴보자.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촬영된 이 영화에서는 화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롱테이크가 자주 활용되곤 하는데, 그가 여기서 갖는 문제의식은 단순히 오래 찍는 것만으로 세계를 정직하게 재현할 수 있노라 믿었던 과거의 그것이 아니다. 중점을 둔 것은 디지털 렌즈가 갖는 지표성으로, 지표 없이 세계와 매개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대상과 접촉한다면 표면이 아니라 내면에 안착하는 게 아닌지와 같은 문제였다. 


즉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만으로 사물을 기록할 수 있던 시기는 지났고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행하는 게 곧 참여적인 행위로 이해되던 시기도 지나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가 세계에 무언가 영향을 끼치고자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적극적인 고민이 대두한다. 그렇게 나온 고민의 결과 중 하나는 카메라가 포착하는 게 굳이 현실과 매개된 무언가에 국한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스크린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세계와 접속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물이 바로 시간이 아니던가? 즉, 이제 영화는 관람자의 시간을 묘사하는 것에 충실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영화는 영화관을 벗어났다. 굉장히 단순한 묘사이지만 이 문구 하나에는 여러 시대상황과 변화가 전제되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미술관에도 있고 영화관에도 있는 영화는 전통적인 영화로부터 벗어났다기보다는 세계와 매개될 필요가 사라진 영상 매체 전반의 문제의식을 대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를 어디에서 보는지와 같은 문제보다 영화는 관람자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가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인류사 전체로 본다면 꽤 오래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가 중세 시절부터 있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관이 부정되었음으로 영화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부정신학에 가까운 일이다. 또한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요즘 영화들에서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장면이 많이들 나오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텐데, 그것은 영화 카메라의 위치에 대해 반문하던 아방가르드 영화들과는 다른 지점에서 영화를 사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과거에 카메라가 1~5분 정도의 롱테이크를 잡는 것에는 영화관의 시간을 바꾸어 놓으려는 이유가 있었지만, 우리 시대에는 세계를 우회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기에 본격적인 교두보로서 그러한 경과를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나 그건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구를 직접 세계와 맞닿게 하려는 접촉, 촉감의 질감이 대두되기도 하지만 눈을 감았을 때 자유자재로 느껴지는 게 바로 시간이라는 점을 모르는 이는 없다. 당장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시간을 세어보도록 하자.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과 실제로 흐르는 시간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가? 팔굽혀 펴기 등을 하는 상황에서 시간은 엄청나게 느리게 흐르지만 컴퓨터 게임 등을 하는 상황에서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흐른다. 이와 유사하게 미술관에 설치된 영화들은 미술관을 거니는 행인들의 시간을 자유자재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이 영화들이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설치되지 않았더라도 어떠한 세계로서 기능할 수 있을지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관람자가 관람 시간을 자체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시작과 끝이 마땅히 정해지지 않은 영화라고 볼 수 있을 테다. 요컨대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어쩌면 이렇게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포스트 시네마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롱테이크 작업은 관람자가 이 장면을 볼 때, 그 시간이 이전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에 최적화되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들이 지표적으로 정말로 존재한다고는 점은 확실할 수 없지만 시간의 흐름이라는 영속적인 면을 경유해 그들에게 우회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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