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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12. 2020

폐허의 주변을 서성이기

그러나 이제 우리는 현존에서 부재, 삶에서 죽음으로의 변화를 목격한다. 지표의 정서란 유령과도 같은 현존과 헤아릴 수 없는 상실이 달콤씁쓸하게 뒤섞인 정서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씨네필이 느끼는 정서와 동일하다. 이때 점점 차분해지고 존경의 대상이 된 16mm 필름이 구시대의 혁신과 한때는 현대적이었던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쇠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슬픔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 에리카 발솜, 「전시장 안의 영화, 폐허 속의 영화」- 




1.



이 글에서 에리카 발솜은 디지털 시대에 지표성을 잃어가는 영화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과거의 것들을 생생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또한 이미지 자체의 죽음이 곧 이미지가 필요 없는 어떤 영화의 가능성을 말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를테면 영화가 사라지는 것을 찍을 수 있게 된 건 영화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날로그에 대한 재평가와 집착은 오히려 아날로그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며, 그렇게 보면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 게 오히려 ‘그것’을 잔존하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른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게 되는 방식, 이 침묵의 발언은 말하지 않거나 혹은 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 바 있다. 그러니 어쩌면 이는 디지털 시대에 흐려지는 지표성이 기억의 문제, 재현의 문제와 희미하게 맞닿는 지점이기도 할 테다. 예를 들어 침묵의 발언이라는 위 문장의 수사를 다시금 살펴보도록 하자. 침묵함으로써 말한다는 것은 무성영화의 마지막 시기에 드러났던 침묵 애호가들의 작은 항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반대의 지점에서 이 말은 시간에 가려진 진공의 세월 속에서도 살아남은 것들에 대한 작은 추도문이 되었다. 디지털 시대에 사라지는 이미지는 오히려 이미지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사실 이 사라짐조차도 우리가 흔적을 쫓을 수 없게 된 것일 뿐 정말로 사라졌다거나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2.



따라서 지표성의 상실이라는 어려운 말을 흔적의 사라짐이라는, 아주 쉬운 단어로 바꾸어 서술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적의 사라짐이라는 표현은 굉장히 많은 것들을 담고 있기에 여기서 어떤 이야기를 출발시키기엔 부적합하다. 다만 나는 내가 겪는 기억의 풍화와 이를 연관 지어 생각해보려 한다. 개인의 한계인지 아니면 디지털 시대가 낳은 환경의 소산인 것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얻은 정보들을 잘 잊어버리곤 한다. 정보 자체도 그렇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이를 두고서 나는 약간의 농담을 섞어 ‘디지털치매’라고 설명하곤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치매라는 것은 기존에 있던 것과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 모두로부터 외면당하는 질병이므로 굉장히 잔인한 단어인 것 같다. 그러니 이렇게 농담조로 소비될 만한 단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이것을 농담조로 말하게 됨으로써 그것이 농담이 될만한 여유는 이미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개념을 선취했고,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건 농담이 아닌 다른 표현밖에 없다. 따라서 이 어쩔 수 없는 후발주자의 고뇌가 무언가를 잊어버린다는 것에 뒤따르는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것을 한번 보았거나 만나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현듯 떠오르는 이미지나 개념이 떠올릴 때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추상화되기 시작하면 더는 농담이 아니게 되는 건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3.



분명히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상황이 나에게는 많이 있다. 이는 단순히 기억의 문제에만 불과한 게 아니라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에서 오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망각에 대한 해답은 정말로 간단하다. 펜을 들어 메모지에 기록을 남겨두면 된다. 그러나 찾을 수 없는 정보는 존재한 적 없던 정보라는 말이 있듯이,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하더라도 훗날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다면 그 정보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혹은 이런 경우를 가정해볼 수도 있다. 도서관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찾고자 하는 도서의 위치를 검색해 갔더니 그 자리에서 해당 도서를 발견하지 못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테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대충 읽다가 엉뚱한 자리에 꽂아둔 경우일 텐데, 이 사례에서 우리는 서지정보의 현실적 어려움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현실적이라는 말은 현실성(Reality)이 아니라 변인이 개입해오는 실질적인(Actual) 면모를 뜻한다. 아무리 서지정보를 분류해보아도 그것이 표층으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어떤 개입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간섭이 발생한다면 결국 그 데이터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도 단 하나의 기록은 남는다. 그건 바로 우리의 기억이다.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 생각,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었다는 괴로움, 이 기억은 자신의 좌표/지표를 잃어버린 채 텅 빈 대문자의 기호로만 우리에게 읽혀진다.



4.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의 물음은 그 텅 비어버린 것의 내부에 던져져야 하지 않을까. 결국 완전히 새로운 기억이란 없다. 단지 우회로만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새로운 시네마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건 아주 오래된 기억이 내부의 공동을 품고서 우리 앞에 새로이 등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에리카 발솜의 이 문장은 어쩌면 비탄이나 애수보다는 새로움에 대한 낭만적인 수사로서 쓰였을 수도 있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장소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이는 과거와의 이별도 미래로부터 도망치는 것도 아닌, 분해와 재구축이라는 현상학적 서사에 더 잘 어울리니 말이다. 이전 시대에 환상이라는 말이 일종의 엘도라도처럼 여겨졌다면, 우리 시대에 그것은 손으로 만지고, 쥘 수도 있는 환상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기억은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던 미궁으로부터 떠나와 컴퓨터를 오래 쓰지 않을 때 접속하게 되는 윈도우 화면 보호기 속의 미궁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 미궁은 픽셀과 폴리곤의 상태로 존재하다가 화면에 표시되어 오는 도중에 즉석에서 조립된다. 요컨대 이 기억이란 있다고도, 없다고도 볼 수 없는 중첩된 상태에 놓여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요청할 때 즉석에서 구성되어 나온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온디맨드(on-demand)라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런데 필요에 따라 즉석에서 기억이 구현된다면 우리가 그것을 두고 ‘진짜’라고 볼 여지는 남아있는 걸까.



5.



내가 보고 들었던 것들이 가공되어 나만의 이야기로 가공될 때 그것이 우리가 기존에 알던 ‘지식’임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단지 맥락에 비추어 보면서 내가 무슨 의도로 이 말을 사용했는지를 일일이 따져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쩌면 무언가를 진정으로 기억한다기보다는 인터넷 등을 검색해 적당한 수사를 끌어다 오는 게 더 효율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가 멋진 문장이 있으면 카메라로 촬영해 파일의 형태로 클라우드에 업로드, 그러고 나서 각종 태그를 붙여놓은 채로 깜빡 잊어버린다 한들 이 정보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로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모르더라도 일단은 기억의 회로를 만들어둔다면 언젠가의 순간에 불현듯 떠올라 우리의 현재 생각과 겹쳐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보는 자신의 본래 출생을 잊어버렸기에 오히려 이후의 것으로 새롭게 변모할 수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우리가 길을 잃지 않게 해주었던 닻이 이 새로운 장소에서도 아직은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자. 흔들리는 지표, 일렁이는 물질성, 이 윈도우 화면 보호기는 과거에 컴퓨터를 표시하는 디스플레이 장치의 손상을 막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으나, 지금의 우리에겐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동안에도 무언가가 돌아가고 있음을 암시하기 위한 일종의 표면적 호소에 가깝다. 즉 우리는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게 아니라 어쨌거나 그것을 기억하고 있음을 계속해서 호소해야만 하는 상황을 겪고 있다.



6.



하지만 이 호소는, 우리가 그것들을 그동안 잊어왔다는 점에 대한 자성이나 반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것을 잊었다는 사실이 곧 우리의 환상이었음을 깨닫기 위함이다. 즉 이 컴퓨터는 꺼져 있지 않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멈추었던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는 한, 아마도 이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결코 단절되지 않을 강한 네트워크의 형성을 전제할 텐데,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보고 들었던 것들과 결코 단절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컴퓨터라는 개념과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기억을 일종의 계산(Computing)으로 만들어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끌어낼 수 있는 공식처럼 사용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하고 떠올려내기 위해서는 이 회로들의 교란을 상정해보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예를 들어,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걸까. 이렇게 잘려버린 서지정보는 우리의 기억을 왜곡되거나 허구적인 것으로 폄하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폄하는 오히려 우리의 기억이 점진적으로 낡아가거나 혹은 쓸모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곳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점을 강하게 드러나는 반발적인 징표가 된다. 위와 아래 양쪽 방향으로 상실되어 가는 지표적 접근 가능성이 물질의 근본적인 상실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게도 우리 시대에 기억이 더는 물질이 아니라 형상, 혹은 현상에 가깝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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