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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16. 2020

오디오 비주얼 필름크리틱에 관한 단상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평론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글을 쓰고 싶었을 뿐이라고. 실제로 나는 비평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다. 오히려 여러 다른 문맥을 이어 하나의 줄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더 잘 발달해있다. 짧게 요약하면 디제잉 비슷한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디제잉이란 여러 다른 곡들의 구성요소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내어 그것들을 거대한 줄기로 엮는 작업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음악은 끊기지 않고 지속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 안의 결과물들이 모두 각기 사람들에게 인식되면서도, 큰 틀에서는 하나의 문맥이 되어야만 한다. 아마도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은 모양이다. 작품 하나를 들여다보고 세부적으로 다루는 재능은 나에게 없는 것 같다. 평론 같은 건...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재능을 떠올리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일단은 직장을 잡아야 취미로라도 글을 쓸 수 있는데, 먹고는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요즘이다. 글쓰기를 제외하면 무엇이 남지? 나는 이 흔한 생각을 디제잉의 문맥으로 옮겨보려고 한다. 여러 단서로부터 맥락을 인용해 하나의 그림으로 만드는 일은 관람자에게 흥미로운 단상을 몇몇 남기지만, 그 자체로 본질이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이게 요즘 유행하는 오디오 비주얼 필름크리틱에 제기되는 주요 논점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체계도 없고, 주관성이 강하며, 사용자에게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물과 관람자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를 입증할 수는 없다. 무언가 의미가 있는 행위가 아니므로 이걸로 업적 같은 걸 이루어낼 수도 없고, 어쩌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순간의 유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은 영상을 인용해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점은 우리가 그것을 수행할 만한 확실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항상 현상에 대한 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이 말이다.


문학비평은 자신을 인용할 수 있기에 축복이라 말했던 이들이 있었고, 오디오 비주얼 필름크리틱은 이러한 점을 근거로 201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아주 따끈따끈한 비평의 형식이다. 아직은 학술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논의가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라서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공산이 크다. 다만 이 논의에 어떤 결론이 내려지기만을 고대하지 않는다면 (말하자면 결론을 향해갈 의무를 타인에게 미뤄두면서 농땡이를 피운다면)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숟가락을 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를 두고서 쓸데없는 잡담이라 말해도 좋다. 나는 오히려 그 잡담이야말로 논의를 위한 본격적인 말뭉치(Corpus)를 형성하는 것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는 ‘쓸데없는 것들’로 여겨져 왔던 것들이 데이터의 형태로 가공되어 자원으로 활용되는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점을 떠올려보자.


과거에는 카페에 앉아 사람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가만히 앉아 관찰하고 있으면 미친 사람 취급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리서치&마케팅 업체들이 먼저 나서 손님들의 주머니에 돈을 쥐여준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사용자가 사이트의 어디에 몇 초 머물렀고,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등이 중요한 데이터로 재발굴되었다. 금융업계에서는 현실의 특정 공간을 하나로 묶어놓고서 해당 지역에 오가는 유동 인구의 카드 결제 기록 등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낭비되는 자원을 재활용하거나, 이제까지 몰라왔던 광물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데이터를 모은다는 건, 아카이빙의 가능성이 그만큼 확대되었기에 가능해진 일이기 때문이다. 능동형 웹사이트의 구축이 매순간 데이터 간에 오가는 교류작용의 아카이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게 대표적이다.


본래 아카이빙이란 아주 오랜 시절부터 있어왔지만 이것이 오늘날에는 과거를 재정렬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단순히 보존의 측면으로 본다면 미라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할 것이다. 미라는 대상의 시간을 빗겨나가게 한다는 점에서 아카이빙의 일차적 의미에 부합한다. 다만 무언가를 언제든지 찾을 수 있게 만든다는 점으로 본다면, 문헌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테다. 문헌 정보란 곧 서지 정보와 같은 말이 아니던가? 여기서는 도서관이라는 게 최초에 설립되었던 이유가 도서의 보존이 아니라, 도서의 수집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인류 최초의 도서관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서고는 나라 안에 들어온 이들이 소유한 책을 의무적으로 ‘대출’하게 함으로서 구축되었었다. 다시 말해서, 그 책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도서관에는 하나의 책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서지 정보학의 전통적인 경구를 탄생시켰다. 즉 찾을 수 없다면 존재하지도 않는다.


노예나 검투사 등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법이 성공적인 도피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도 떠올려볼 법하다. 도편추방제 같은 일들 말이다. 로마에서는 투표를 통해 대상을 추방하고는 그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했다. 기록을 말살함으로써 개인의 존재를 아예 ‘없던’ 것으로 해버렸다. 이는 우리가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과거를 시간선에서 이탈시킬 수 있음에 대한 간접적 증명과도 같았다. 벤야민의 말처럼 만약 역사가 하나의 폭주기관차라면, 이 기관차가 위험한 건 멈추지 않아서가 아니라 언제든지 탈선할 수 있다는 점일 테다. 로마에서 죄를 지은 이에게 시민권을 박탈했던 것은 그들을 현재로부터 빗겨나가게 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빗겨나간 이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시간선이 마주하지 않기에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가 된다. 그와 반대로, 로마의 시민이 된다는 건 인구기록표 등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이 국가에서 제안하는 데이터화에 동참한다는 뜻이었다. 즉, 그대들은 데이터를 제공하고서 데이터가 주는 보편적인 편리함에 귀속된다. 나이를 먹으면 군대를 가야 하고, 계절이 오면 농작물을 성실히 납부하는 것과 같은 예측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시간선의 앞부분에 자리한다.


이처럼 아카이빙이란 무언가를 보존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축적하는 행동이었다. 어쩌면 플라톤이 사물의 이데아를 현실에서 찾은 건 그러한 짝을 완성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모든 사물과 현상에 이데아가 있다면, 그 이데아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단순히 그것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보존에만 머무르게 될 뿐이다. 그리고 이 보존은 미라와 같은 원시적 형태로서, 단순히 시간의 등속 운동을 빗겨나가게만 할 뿐이었기에 그와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도서관의 등장이었다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한번 파악된 데이터는 반드시 도서관으로 매개하기를 강제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정책이 오늘날의 데이터 마이닝 작업과 닮아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 서비스 제공 회사들은 자사의 홈페이지나 서비스에 이용자가 처음으로 가입했을 때, 인터넷 쿠키와 같은 사적 데이터를 제공하기를 강제하고 있다. 이 데이터의 축적을 통해 당신은 보다 편리한 제안 등을 받을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맵핑(Mapping) 속에서 당신은 데이터 기반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미래 궤도를 통해 앞으로의 행보와 행동을 예측당한다. 분명 이들이 미래를 엿보지는 않았지만 당신은 단 한 명의 도플갱어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나르시스의 죽음을 우리에게 선고한다. 기계로 확장된 사고의 바깥에서는 당신을 구성하는 데이터들이 내부가 아닌 외부를 거쳐 다시금 당신에게 돌아오기에 그 정신분석은 이제 내면이 아니라 미래의 어떤 궤적을 쫓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때 외부를 통과하며 변질된 자신의 또 다른 면을 바라보는 건 낯선 타자를 보는 것과는 다른 방향의 감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정신분석학적인 타자가 신체적으로 우리와 대응하는 일종의 맵핑과정을 거친다면, 데이터화된 타자는 파편화된 연결고리를 통해 우리 안에서 끝없이 변용되기에 그것을 불러내는 일은 오직 인용으로만 가능하다. 이를테면 MBTI 테스트는 개인의 어떤 성질을 문건화한 것을 인용함으로써 개인을 기록된 성질에 맵핑시키고 그것을 다시금 내외적 관계에 적용한다. 이때 각 문항은 성격군의 말뭉치를 형성해 우리를 하나의 궤적 안으로 밀어 넣으며, 그곳에서 배제된 것들은 아예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치부되어 버린다.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구조주의의 맹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신체의 환영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현실의 신체를 가상의 공간으로 옮겨두는 작업에서, 쫄쫄이를 입은 연기자의 몸에 올려진 점들은 기술자의 모니터 안에서 점으로 이어진 데이터 뭉치를 형성한다. 그런데 만약 이 점들이 각 신체들의 부분적 대응에만 불과하다면 그 점 사이의 공간은 무엇이 되는 걸까?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게 아닐까? 아즈마 히로키는 이를 두고서 약한 연결이라고 부르며 구조의 붕괴 이후에 파편(fragile)으로 흩어진 개인들이 구조 없이도 연결을 만들어내는 그 미약한 힘에 대해 강한 긍정을 내보이기도 했다. 트위터는 대상을 인용하지만 그와 일대일로 연결되지만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리트윗이란 대상을 인용해 자신의 계정, 즉 자신을 구성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신체 안으로 편입하여 다시금 팔로워들에게 그 문헌의 위치를 알리는 전파의 행위이다. 이 행위에서 팔로워 사이는 무수히 많은 공간으로 엮여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약한 연결은 다양한 경로와 장소에서 인용됨으로써 비어있지만 결코 비어있지는 않은 관계를 형성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시, 비어있지 않은 것들을 개별적으로 들여다볼 때는 어떤 이야기를 하기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꽤 그럴싸한 연결고리가 완성된다는 점이다. 오디오 비주얼 필름크리틱에서 영상의 조각을 인용(Citation) 하는 행위가 흡사 이것과 유사하다. 인용은 기본적으로 본래의 맥락에서 어떤 것을 떼어내고 난 후에 새로운 장소에 그것을 이식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중점은 크게 두 가지로, 그것이 본래 있던 장소의 흔적을 지우는 일과 새로운 장소와의 본격적인 융화를 도와야만 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에 앞서 기존의 구조를 무너뜨려 장소를 폐허로 만드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 폐허는 오히려 무너짐으로써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게 되므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의 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그것이 파편을 주워 살아가는 스캐빈저들의 수집 행위를 통해 더는 쓰레기가 아니게 된다는 점이 이전 시대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SF 영화라는 배경을 제시해 주는 단적인 설정 중 하나가 쓰레기장에서 무언가를 주워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수집가들의 모습이듯이, 오디오 비주얼 필름 비평가들은 영화가 무너진 장소에서 자기만의 보물을 찾아낸다.



"20세기의 관점에서 이것은 표류(derive)의 논리이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서핑의 행위이다. 즉흥을 추구하고, 웹을 돌아다니는 임의적이고 자유로운 연계를 통한 주관의 연결." -클레어 비숍 , 「디지털 격차 : 동시대미술과 뉴미디어-
 "영화는 점점 과거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꿈의 궁전이 그랬던 것만큼 영화는 무덤이 된다." -크리스 페티, <Negative Space>(1999)-
"기억 속의 환유적 파편들(metonymic fragments)을 수집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영화들에 대해 친숙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빅터 버긴, 「In/Different Spaces: Place and memory in visiual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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