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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13. 2020

감금과 격리에 대한 두 가지 물음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임흥순의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은 두 개의 판본이 있는 작품이다. 정확하게는 여느 확장 영화(expanded cinema)들이 그러하듯 미술관과 극장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다. 하지만 단순히 경계를 넘나드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문제의식이 성립하기 힘들어졌으므로, 좀 전의 발언은 불필요한 곁가지에 불과하다고 느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영화가 경계를 넘어간다는 사실은 더는 신비하거나 새롭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마치 숨 쉬듯이 공간을 드나들기에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릴 만큼의 가십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는 디지털을 더는 디지털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2000년을 전후로 디지털은 여러 분야에 걸쳐 언급되었으나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한데, 우리가 이미 디지털 세상을 살고 있고 심지어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시대였던 이들이 사회의 주역이 되기까지 했다. (단순히 계산해보아도 2000년에 태어난 이들은 벌써 스무 살이 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에 선행하는 물음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격언일 것이다. 


나는 지금 영화의 정전(Cannon)을 꺼내드는 게 아니라 ‘영화’라는 단어의 이상한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영화 같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감탄사로 사용하는 이 말에는 근본이 없다.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주소가 명확하지 않고, 이는 일반적으로 영화가 ‘발명의 순간을 아는’ 유일한 예술이라는 점에서 더욱 대비된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영화 같다는 말을 사용하게 된 걸까. 영화광들이라면 알 존슨이 처음으로 입술을 떼던 순간이나 서부의 협곡을 가르는 존 웨인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 같음은 <라라랜드>나 <사랑은 비를 타고>와 같은 로맨스 영화에 더 잘 어울린다. 두 존재가 지금 이곳에 서서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우연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상대방의 시선을 의식함과 동시에 내가 보내는 시선을 응시하게 되는 상호교환적 행위가 바로 영화 같음이다. 


‘내가 너를 볼 때, 너도 나를 본다’라는 말은 굉장히 낯간지럽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딱딱한 흐름으로 바꾸어 말해보도록 하겠다. 당신이 영화를 보러 갈 때, 영화도 당신을 보러 간다. 대체 어떻게? 라는 물음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분명 현대 영화의 흐름이며 영화는 이제 더는 장치(apparatus)가 아니다. 에이드리언 마틴을 비롯한 이들이 줄곧 사용하는 단어인 디스포지티브(dispositif)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영화가 무언가를 도출해내는 기계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주관적 사고 능력을 키워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건 영화는 이제 답을 던져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정답이 필요 없게 된 사회를 우리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증거는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철없는 아이의 항변,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나요. 고고한 트위터 시네필의 190자 감상평, 이 짧은 감상이 영화를 이해하는 완벽한 풀이는 되지 못할 겁니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논점 하나를 던져보려 한다. 발터 벤야민은 “어떤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시선을 여는 능력을 그 현상에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적었다. 이렇게 능력을 부여받아 시선이 열릴 때 우리는 그것이 품은 어느 먼 곳으로 홀연히 떠나게 된다. 이 은유에 따르자면 우리가 영화를 보며 아우라를 느끼는 것은 영화가 자물쇠이기 때문이 아니라 열쇠이기 때문이다. 즉 열쇠/능력을 부여받아 자물쇠인 자신을 열어주기를 원하는 영화라는 말이 성립한다. 


요컨대 처음부터 그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영화를 해석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적어도 아우라의 시대에서는 그렇다. 이쯤 되면 당신은 ‘아우라가 없는 오늘날에 영화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진짜 사랑인지를 우리는 쉽사리 확신할 수 없다. MSG라는 이름의 조미료 혹은 아스파탐이나 수크랄로스 등의 감미료를 진정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입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 


이에 대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대답은 간명하다. 먼저 그는 가상현실을 다룬 영화인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주인공 퍼시발의 모험을 열쇠를 찾아 떠나는 게임으로 만든다. 내용 자체는 어느 할리우드 영화와 다르지 않게 임무를 완수하면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아주 단순한 목표설정이 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모두가 열쇠를 찾는 일에 혈안이 되는데, 퍼시발 혼자만 자물쇠를 찾아 떠난다. 여기서 영화의 결말을 적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하는 도전의 일부를 소개해보려 한다. 퍼시발은 열쇠를 얻기 위해 자동차 경주에 참가한다. 이 자동차 경주는 페르시안의 왕자나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게임처럼 지정된 트랙이 있고, 종착지점에 다다르는 게 이들의 최종 목표이다. 이때 퍼시발은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자동차를 타고 뒤로 갔더니 보이지 않는 길이 열렸다는 것은 어쩌면 <백 투 더 퓨쳐>의 드로리안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은 공간 이동의 순간일 수도 있다. 


마틴이 보낸 1편과 2편과 3편 사이의 간극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 자리한다. (각각의 개봉년도는 85, 89, 90이다.) 이 영화들에서 마틴은 매번 다른 시간대로 떠나는데, 관객인 우리도 매번 다른 시간대에 그들을 보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가 세 편으로 나누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영화가 세 편으로 나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세 번의 시간여행이 아니라 한 편의 시간’여행’을 떠나는 게 된다. 왜냐하면 영화 자체가 일종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우리가 어떤 영화들에서 손을 뗄 수 없게 하는 이유이다. 


이 뒤에 무언가 더 남아있을 것만 같은 환상, 영화는 그 시작과 끝에 있어 여행길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말하자면 한 편의 영화는 내용을 중심으로 시작과 끝이라는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을 설정한다. 중간에 관람을 그만둔다 한들 이 지점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당신이 영화보기를 그만두어도 영화 안의 것들은 계속 그곳에 있을 것이다. 프로시니엄 아치, 혹은 디제시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의 이름은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왔고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존재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의 영화 버전에서는 영화의 중간에 영화의 스태프들이 영화를 보러 간다. 일부러 모호하게 작성했지만 풀어쓴다 한들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모습을 그들 자신이 보러 간다. 영화에서 실존인물을 연기한 배우 세 명이 모여 전시에 참여하는 모습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이 재미있는 장면을 우리는 메타 영화, 메타 서사 등으로 부를 수 있을 텐데, 이런 이야기보다는 위에서 했던 말을 이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에이드리언 마틴의 기념비적인 논문 「페이지를 넘겨라」에서 그는 영화의 장치 개념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영화 디스포지티브로의 전환을 선언한다. 이후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이것을 두고 이주(Relocation)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다름 아닌 ‘이주’라는 용어 자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자리하고(locate) 난 후에 다시금(Re) 자리를 채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주라는 자신의 용어를 ‘재배치(Re-relocation)’라는 개념으로 ‘재배치’한다.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이주라는 딱딱한 말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보다 순화된 표현이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에서 세 연기자는 구술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각자의 동시대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드로리안을 탄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전시 버전과 영화 버전 모두에서 세 여인은 하늘을 바라보는데, 그곳에는 문득 개기일식이 벌어지고 있다. 흡사 카메라 조리개가 서서히 닫혀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풍경은 영화의 고전적 해석을 따라가면 명백한 불길의 징조라 할 수 있다. 


개기일식은 태양이 사라진다는 신화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태양이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사라질 것이 예견된다는 점에서도 불길하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 또한 사라질 것이 예견되기에 불안을 항상 내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은 곧 영화가 언젠가는 끝난다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두고서 콘텐츠(Content)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이 안에 무언가를 담고 있다(Content)는 점, 그렇다면 그것이 모두 소모되고 말 경우에는 영화는 텅 빈 상자가 되어버릴 테다. 이때 영화는 바로 폐허가 된다. 


그러나 들뢰즈가 『시네마2』에서 지적하는 건 그와 정 반대의 지점이다. 영화가 언젠가는 끝난다는 점에 불안을 느껴야 하는 게 아니라고, 오히려 불안에 의해 지속이 가능하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까 사실 들뢰즈의 이 불안은 벤야민이 말하는 신경감응(Innervation)의 맥락으로 바라보는 게 옳은 듯 보인다. 벤야민은 영화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무의식(optical unconscious)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극장이라는 공간과 만나며 시각적 감각을 촉각적 감각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 주장을 잘 보여주는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마르크스적인 혁명의 발언이다. 이곳 현실에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것, 이 초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아 지금-이곳에서도 볼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영화라는 무구라고 그는 적는다. 이와 동시에 영화 관객의 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은 결코 불안에 따른 신체 반응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에게 깨어나기란 꿈에서 현실로의 귀환이 아니라 현실에서 꿈으로의 이주였으며, 이를 통해 인식가능성의 지금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요컨대 들뢰즈가 『시네마2』에서 지적한 안토니오니의 <태양은 외로워>의 마지막 공백이 만들어내는 불안은 꿈에서 현실로의 깨어남이 아니라 현실에서 꿈으로의 이주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공백을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거리에는 사람이 나다니지 않고, 오직 카메라만이 생생하게 눈을 뜬 채로 있는 이 거리의 고요함은 마치 폐허처럼 보인다. 즉 <태양은 외로워>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세상을 마치 영원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벤야민이 폐허를 산보자가 눌러앉은 곳, 수집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보았듯이 여기에서 영원은 ‘그렇기에’ 이주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남아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이처럼 역사가 파행의 연속이더라도, 역사가 파행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곳에 남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역사의 천사는 지금-이곳에 홀연히 나타나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섬광처럼 만나게 할 것이며, 이 소실점이야말로 우리가 왜 영화의 시작과 끝을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한 전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영화적 여행으로 변환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화의 안에 있는 내용물(Content)이 자신을 유지할 요령으로 소모하는 시간에 손을 대야 한다. 영화는 역사가 되기 위해 내부에 시간을 구축하려 드는데 바로 이게 우리가 ‘영화가 갖는 지속의 힘’을 시간에서 찾는 이유였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듯 역사가 어쩔 수 없이 달려오는 이미지들의 종합이고 그것을 멈춰 세우는 것만이 우리 시대의 역할이라면, 영화는 이주가 아니라 폐허에 남기를 선택할 것이다. 


이는 영화 역사에서 롱테이크나 데쿠파쥬와 같은 카메라의 지속력을 통해 그 검증이 시도되어 온 바가 있다. 그러나 세르쥬 다네가 말했듯이 이 여행은 “남들과 교통할 수 없는 행복의 가능성을 실현하기에 무거운 대가가 존재한다.” 그가 이 발언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인 글 한 편 「카포의 여행하는 쇼트에 관하여」는 우리가 응시하는 것들이 사실은 일방적인 무언가에 그쳐버렸던 건 아닌지를 돌아보게 한다. 만약 영화적인 것이 상호 간의 눈 마주침이라면 우리의 여행은 단지 풍경을 바라보는 것일 뿐, 그 어떤 영화적 소통도 만들어내지 못할 테다. 


그러나 들뢰즈의 불안은 이 영화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없다. 미술관에 전시된 이 영화는 더 이상 우리의 뇌로서 기능하지 않고, 신경생리학적인 감응을 우리에게 전달하지도 않는다. (물론 전시를 먼저 했고 이를 보완해 영화로 만든 것이다만 영화 안에서 그들은 미술관으로 향한다.) 그렇다면 이때 당신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관객에게 감각을 알려주지 못하는 영화는 정치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죽은 게 아니냐고 말이다. 물론 이 물음조차 이것이 영화라는 점을 은연중에 전제하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어쩌면 영화라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품는 막연한 기대감을 표현하는 두루뭉술한 단어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이때 우리가 생각하는 당신은 무엇인가.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 재연의 방법을 택했을 때 우리는 여러 이유로 이 선택을 지지하게 되기 마련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실존인물이 사망했다는 점일 테다. 말 그대로 그들이 죽었기 때문에 죽음 자체를 영화 위로 불러오는 행위는 영화가 죽음을 빗겨나가게 하는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지양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죽음과 사랑은 딱 잘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배면에 달라붙은 개념(들)이다. 그래서 때로는 죽음을 사랑하는 행위와 사랑을 죽음으로 여기는 일이 각자 혼동되는 일이 있기도 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게 그저 착각에 불과했던 것은 아닌지를 재점검해보아야 한다. 당신의 사랑이 단순히 도피성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를, 폐허가 된 마음으로부터 떠나 새로운 장소에 이주하게 되면 무언가 일상이 극적으로 변하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를 말이다. 


당신이 미술관에 가서 하나의 영상을 만날 때 그는 자신을 영화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당신은 이 사이를 여행하며 풍경과 풍경 사이의 간극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 우리 모두의 보폭은 각기 다르기 마련이기에 이 영화는 성립한다. 이들이 시간의 중심부를 돌며 구축한 공간의 풍경이 그들 연기자의 무대가 된다. 이처럼 여행이 일종의 지속력을 지닌 행위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극장에서 미술관으로의 이주와 재배치라는 말로서만 설명될 게 아니라 영화관을 나와 미술관으로 향하는 그들의 여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에 대한 물음을 다양한 분야로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하찮은 이분법일 수도 있고, 짬뽕인지 짜장인지와 같은 사소한 고민일 수도 있다. 혹은 주체와 타자, 노동자와 부르주아 등의 인문학적 개념일 수도 있고, 우파와 좌파처럼 반으로 나뉜 정치적 성향일 수 있다. 그러나 오랜 고민이 아니라 올해만을 두고 본다면 이 생각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감염과 격리라는 두 개의 현상은 어떠한 이론이 아니라 당장의 현실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현상’학’이 아니라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상학이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현상이란 대체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이 이 물음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볼 기회를 얻지 못한다. 다른 학문으로 예를 들어보자. 수학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친숙한데 ‘수’라는 것에 대해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군가는 ‘우리는 수학자가 아니에요’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테지만. 수가 오직 수학자들에 의해서만 정의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수가 있기에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코로나 시대가 무엇인지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코로나 시대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코로나라는 현상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일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코로나란 무엇인가? 동그란 몸에 가시 같은 게 듬성듬성 붙어있는 모양이라고 과학자들은 소개한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파악되어야만 하고 눈에 보이는 증상이 있어도 그게 코로나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실제로 코로나는 감기 등의 질병과 쉽게 혼동되곤 한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영화라는 게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가장 처음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영화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를 두고 마테리알(Material)이라 표기하는 일은 필름의 입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표기할지와 같은 태그 생산(Tagging)에 전적으로 위탁된다. 


이른바 이주와 재배치의 문제로 불리는 이것은 시네마 만능론이라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VR 시네마, 익스펜디드 시네마(Expanded cinema), 그 외 기타 등. 이것들을 가장 간명하게 설명할 방법은 영화가 이제 더는 대문자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영화라는 대명사의 사용법까지 부정하는 일은 아니다. 만약 영화를 이데아론에 가깝게 보는 이가 있다면 더욱이 이 말에 공감할 것임이 틀림없다. 원초적 영화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우후죽순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그들 모두가 영화의 원초적인 면에 끌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요컨대 영화는 양가적이다. 


우리가 영화의 죽음을 선언할 때는 이것이 과연 무슨 감정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영화를 애도하는 것인가? 애도하기에 죽음을 선언해야 하는 것인가? 내 생각에는 영화가 죽었다는 사실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기본적으로 사랑과 한몸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죽음에 대한 성애가 바로 영화인 것이며, 이는 바쟁이 말하는 미라 콤플렉스와 무관하지 않다. 바쟁의 말처럼 영화가 일종의 미라와도 같은 것이라면 이는 죽음을 빗겨나간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죽음을 빗겨나가서가 아니라 죽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에 그것을 사랑한다. 


인간은 죽음 이후를 알 수 없다. 죽은 사람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그렇다. 바꾸어 말해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죽음은 신화화된다. 타자에 대한 사랑이 내가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끌림이라면, 죽음에 대한 신화는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끌림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를 사랑한다는 건 죽음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영화의 죽음이라는 주제는 그렇게 새롭지도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포스트 시네마가 영화의 죽음을 다루어야만 할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영화를 사랑하기에 영화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또 논하게 된다. 


나는 이 죽음의 공동이 클로즈업 쇼트와 연결되는 고리를 떠올려 보고 있는데, 영화사에서 얼굴이라는 건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신화화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르시수스는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기에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말은 궤변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딱히 다르게 생각해볼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얼굴을 사랑한다는 점이 신화 내에서 확실히 표현되고 있어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구석이 있다. 그가 집착했던 건 목격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환상, 일렁이는 수면의 자기 반영이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좀 전에 나는 코로나 시대에서 코로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르시수스의 일화가 이 생각에 대한 우회로를 열어준다. 나르시수스의 일화에서 그의 모습을 카메라와 스크린의 관계로 치환하면 아마도 다음처럼 될 것이다. 영화 관객은 영화 안의 카메라에 자신의 시선을 동화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만들어 낸 가상 시점-가상 카메라는 우리가 카메라에 동화할 수 없게 한다. 정확하게는 신체 감각은 동화하되 현실 감각은 동화하지 않는다. 오버워치와 같은 게임을 하다 죽으면 가상의 공간을 마음껏 누빌 수 있는 관찰자의 시선이 되는데, 이게 디지털 시대에서 가상 카메라가 보여주는 주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카메라는 베르토프의 고정된 자리(Fixed)에서 벗어나 이곳저곳을 누빈다. 베르토프의 그것은 세계 안에서 날뛰지만 우리의 가상 카메라는 쇼트와 쇼트 또는 스크린의 표면을 누빈다. 한 쇼트가 있고 다음 쇼트가 있다면 그 둘 사이에서 카메라의 자리는 얼마든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신기하게도 이는 고전 시네마에서도 발견되는데, 오즈 야스지로가 180도 규칙을 무시하곤 했던 것과 같은 식의 용례를 떠올려볼 수 있다. 오즈의 영화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건, 그게 너무 현실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체 감각과 현실 감각이 일치하지 않아서였던 것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쇼트와 역쇼트는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이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면이 있다. 보이는 면이 있다는 것이지 비현실이라는 게 아닌데, 바로 이러한 점이 오즈 영화를 이상하게 만든다. 현실 속에 자리한 비현실이라는 것,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오즈의 영화가 일종의 극중극처럼 보인다면 바로 이 때문일 테다. 다만 이 논지를 어디까지나 쇼트와 역쇼트를 두고 논해보려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앞을 바라볼 때는 앞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와야 마땅하다. 그런데 만약 앞을 보았음에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실이 무언가 어긋났음을 느끼게 될 테다. 


오즈의 필로우 쇼트들은 이것을 바라보는 이들이 없음을 상정한다. 즉 역쇼트가 없고 그래서 무언가 어긋난 상태다. 다시 말해서 이 역쇼트는 신체 감각과 현실 감각의 불일치를 상정한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자신이 이미 죽었음에도 알지 못하는 이상한 유령들의 존재가 몹시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내가 이곳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나의 모습은 거울에 비치지 않고, 그 어떤 것으로도 확인되지 않는데 여기서 자신을 깨닫게 해주는 건 오직 신체의 감각뿐이다. 요컨대 이를 들뢰즈-가타리의 말을 빌려 [기관 없는 신체]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한데, 그 이유는 후술할 예정이다. 


물질 없는 영화를 생각해보기 어려웠던 것처럼 기관 없는 신체를 상상해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어떠한 손발 없이 무언가를 만진다는 감각이 생겨날 수 없고, 손을 뻗는 장면이 있으면 다음 장면에서는 그에 어울리는 장면이 나와야 두 쇼트는 봉합된다. 우리는 이를 연속성(Continuity)이라 불렀다. 위에서 말한 오즈의 180도 규칙도 영화의 연속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이었고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물질에 의존했던 우리가 물질에 의존할 수 없는 시대가 됨으로써 상상할 수 없던 것들을 상상해야만 할 처지에 놓였다. 이것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어떠한 가정이 아니라 당장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즉, 현상학이 아니라 현상이었다. 손발이 잘렸음에도 통증이 느껴지는 이상한 일이 우리에게 벌어졌고 어떠한 설명을 가져다 붙이는 건 마치 핑계처럼 느껴졌다. 


이어서 코로나에 대해 논해보자. 코로나 시대에 신체와 현실의 감각은 분리된다. 재택근무를 하는 이들에게는 신체가 집 안에 고정되어 있으나 업무는 이전처럼 빠르게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체는 현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뒤처지게 되고, 이는 시선은 앞으로 고정되어 있으나 감각은 뒤로 젖혀지는 것과 같은 의식을 만들어 낸다. 비유해보자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일이 코로나 시대라는 환경적인 둘러쌈을 만들어낸다면, 그 안에서 직접 운동하는 것은 우리 자신, 즉 코로나인 것이다. 


다시금 ‘코로나’라는 원점으로 돌아가보자면, 우리가 코로나를 두려워하는 건 코로나로 인한 죽음 때문일까 아니면 코로나로 인한 격리 때문일까. 현실을 애써 따라가려던 이들에게는 코로나라는 정체불명의 현상이 들이닥친다. 그리고 이들은 어느새 자신이 현실보다 더 빠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느낀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빗대었던 빛의 속도를 한 사내가 등장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만약 인간이 빛의 속도로 달릴 수 있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을 테다. 왜냐하면 빛의 속도가 곧 시간의 속도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면 빛의 속도를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과거로 향할 수 있게 된다.” 다르게 말해, 우리가 빛을 앞지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죽음의 뒤통수를 보는 게 가능하다. 우리 자신이 태어나던 때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세상에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 잠시 영화로 돌아가보자면,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의 뒤통수가 나온 점이 없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다. 쇼트와 역쇼트는 어디까지나 바라보는 힘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지 바깥을 상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화를 통해 죽음의 이후를 그려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운동과 시간이라는 두 개의 조건 안에서만 가정되었었다. 운동이 있으면 시간도 있고 시간이 있으면 운동도 있다. 여기서 들뢰즈는 영화에서 운동은 시간을 따라간다고 지적하는데, 그 이유는 영화에서 상영이라는 행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운동이 마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그 운동은 우리의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해보면 다음처럼 된다. 현실의 시간 안에 영화라는 운동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 운동이 영화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현실과 영화의 시간은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양적인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다. 현실의 시간이 우리의 신체를 에워싼 직접 감각이라면 영화의 시간은 우리의 현실을 둘러싼 간접 감각이다. 여기까지가 고전 시네마의 시대에 오갔던 이야기다. 물론 고전과 현대를 가로지르는 어떤 정전 같은 건 없지만, 편의상 이렇게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 고전과 현대라는 개념은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에 와서는 신체와 현실 간의 동기화와 예술과 현실 간의 동시대성(Contemporary)을 유지하는 일이 더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가 강화될수록 사람들은 비대면으로 하는 일이 많아지고, 비대면의 증가는 곧 무언가를 경유해 간접적으로 하는 일이 많아짐을 뜻한다. 바꾸어 말해 이는 직접 경험 없이 생성되는 감각의 긍정, 즉 간접 경험의 현실화로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볼 수 있다. VR 시네마를 본다고 말할 때 그것을 보는 건 무엇인가. 나라는 사람인가 아니면 영화 안에 먼저 자리하면서 우리를 끌어당기는 예비된(pre-load) 주체인가. 고전 시네마에서도 예비된 주체라는 게 있다는 말은 오갔었지만 VR 시네마의 주체는 그것과 다르다. 고전 시네마에서는 우리가 영화를 보지만, VR 시네마에서는 우리가 그곳에 걸어 들어가야 한다. 즉, 눈을 사용하는 일과 몸을 움직이는 일로서의 확연한 차이가 있는 셈이다.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올해 영화관에 많이 가지 못했다는 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는 비교적 영화의 바깥에 자리해 있으므로 다른 글을 참조해보면 좋을 것이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두려워하는 게 코로나로 인한 격리인지, 아니면 죽음 자체인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영화관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몸을 움직이는 행위 자체에서 비롯되는 현실 감각의 이동에 그 실마리가 있을 텐데, 오히려 코로나가 바꾸어 놓은 비대면 세상에서는 바깥과 안쪽의 속도 차로 인해 이전과는 전도된 속력의 인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짐으로써 영화라는 말은 예술을 지칭하는 것에서 일종의 개념으로까지 나아갔다. 예컨대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으로써 영화가 사라지게 된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코로나에 대한 담론은 이제는 너무 식상한 게 되어버렸다. 코로나가 사멸해서가 아니라, 코로나가 일상이 되어서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이런 진부한 물음을 던져야만 하는 이유는 코로나 시대가 아니라 코로나 자체를 떠올리고, 잊지 않기 위해서다. 무언가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한계로 인해 간접 경험으로밖에 남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에 대해 기억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것들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말은 서서히 잊혀간다는 것에 대한 애도임과 동시에, 그 애도 행위가 바로 우리의 사랑에서 비롯됨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오늘날 코로나에 대한 인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코로나에 걸리면 많이 아프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코로나에 걸리면 세상에 내 존재와 행보가 샅샅이 까발려진다는 점이다. 이때 전자가 죽음의 이후를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이라면, 후자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들어오는 압박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간접 경험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아마도 시네마에 대한 고민과 무관하지 않다. 포스트 시네마라 불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고민이 영화가 이미 죽었거나 혹은 죽음을 앞둔 존재라는 것을 상정한다면, 환경의 상대 차를 통해 생생해지는 감각 안에서 전도된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코로나 시대의 상대성 이론이다. 


요컨대 이 시대에서는 우리가 알아왔던 것들과 정반대의 지점들이 주목받게 된다. 이른바 현실의 역쇼트, 영화란 무엇인가? 가 아니라 무엇이 영화인가? 라는 물음이 던져지고 극장이 영화를 잃은 게 아니라 영화가 극장을 잃어버린 게 되었다는 걸 우리는 이제 안다. 그리고 아무리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아도 죽음 이후를 알 수 없기에 이 질문들은 오직 입안에서만 실효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점 또한 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 질문은 언제나 고민되고 또 곱씹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쇼트와 역쇼트가 한몸이라는 점, 나르시수스의 고민이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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