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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01. 2021

눈에 비치는 세계의 끝자락에서

미구엘 고미쉬의 <천일야화>를 보았고, 시청이 끝난 후에는 두 개의 글이 생각났다. 하나는 영화의 이중구속(double bind)에 대해 말하는 강덕구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함연선이 영화의 일시정지에 대해 썼던 글이다. 여기서 이중구속은 양쪽 모두에 속해있으면서도, 양쪽 모두로부터 배제당하는 모호성의 상태다. 내부가 외부가 되고 외부가 내부가 된다는 점에서는 클라인의 병이 생각나지만 그것과는 달리 이중구속은 하나의 몸이 아니다. 하나의 상황 속에 두 개의 모순된 선택지가 존재한다면 둘 중 무엇을 선택하든 간에 주체는 분열될 수밖에 없다. A를 택하더라도 A가 최선의 선택일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대문자 A는 작은 b를 동반한다. 소문자로 표현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b는 결코 실체화되는 법이 없다. 결국 우리는 이 작은 b를 암 덩어리처럼 달고 다닐 수밖에 없다. 암이 변형과 파괴의 상징이긴 해도, 성장을 멈추고 인체에 잠복하기만 할 수도 있으므로 일말의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암 덩어리는 잔여를 남기기 마련이어서 ‘완치’는 가능할지 몰라도 희망을 ‘완성’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암에 한 번 걸렸다는 인식은, 그것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음에 대한 도래의 불안과 이미 한번 암에 걸렸었기에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전진의 불안을 동시에 낳는다. 


앞으로 전진하는 게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낳는다는 말은 삶을 영화에 빗대기에 딱 좋은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인생은 어쨌거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스탠리 카벨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눈에 비치는 세계』를 저술했다. 카벨의 이 말은 주체와 대상의 구조가 아니라 알 수 없음의 영역에 전적으로 헌신한다. 알 수 없는 미래가 우리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고 이는 그 어떤 철학적 탐구로도 파악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카벨의 이 말은 바쟁의 영화론에 대한 작은 유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쟁은 “영화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기원으로 자신을 데려간다”고 서술한 바 있다. 아마도 카벨은 이 문구를 두고서 “영화를 보며 불안해지는 건 영화가 불안을 생성하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불안은 심리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파악되지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가 없기도 하다. 


그는 영화가 자동으로 전진하기에 불안을 자아낸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 속에서 참호를 따라가는 트래킹 쇼트를 지적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장면을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다. 원테이크, 원시퀀스로 이루어진 이 쇼트는 참호를 시찰하는 군간부의 뒤를 따라가는데, 참호의 여기저기에 널린 병사들의 모습은 다들 지쳐있다. 마치 이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이 냄새나고 축축한 구덩이 안에 언제까지 있을지를 알 수 없어서 그들은 불안해한다. 심지어 누군가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기도 한다. 여기서 카벨은 이 영화의 트래킹 쇼트가 바로 그러한 출구없음의 표식을 지녔다고 말한다. 이른바, 터널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환등상에 빗대는 건 고전적인 은유이지만 그와 반대로 영화를 삶의 끝자락에 두는 일은 비교적 익숙하지 않다. 어쩌면 이는 영화가 사진의 연장선으로 이해되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극복하는 매체라는 말은 누가 보아도 멋지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러한 사실은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결코 죽지 않는다는 점을 떠오르게 한다. (히치콕의 <사이코> 같은 서사적인 면이 아니라) 주인공(Protagonist)은 주도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는 영화의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간의 대변자이자 대행자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는 카벨의 말처럼 어딘가로 나아간다는 점에 대한 불가항력을 보여준다: 우리의 전진은 우리 자신을 이중구속의 처지에 놓이게 한다. 


우리는 옴짝달싹 할 수 없다. 영화가 시작한 이상 영화가 끝나는 순간의 작은 구멍을 향해가는 여정을 우리는 멈출 수 없다. 강덕구가 강조하는 것처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추락의 여정에서는 우리 모두가 앨리스가 될 뿐이다. 이 이상한 이야기는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자꾸만 드러내지만 우리는 이미 그 괴상한 곳 안에 들어와 있다. 토끼를 따라 추락한 굴 안에서 우리는 현실과 비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무중력 상태를 경험했었다. 이 무중력의 감각은 말 그대로 현실로부터 붕 떠버린 것처럼 느껴지게 하고, 바로 이 순간에 우리의 시간은 바쟁의 그것으로 되돌아간다: 영화라는 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 이게 바로 네오-리얼리즘이다. 

함연선은 영화의 일시정지에 대해 언급하며 극장 바깥에서의 영화 경험을 지적한다. 꽤 진부한 이분법이라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극장은 여전히 가속의 표지를 지닌다. 그래서 극장은 관람을 시작한 이상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게 예의인 공간이다. 하지만 우리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모니터를 통해 영화를 볼 때 건어물 쥐포처럼 흐드러지는 것이 그러한 공간에 반대하기 때문은 아니다. 즉 극장은 극장의 바깥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공간이다. 기능도 다르고 출연의 계기도 다르다. 그러니 영화의 역사를 되짚어보기보다는 우리의 현재로부터 극장이라는 카드를 어루만져 보는 게 더 낫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모니터로 영화를 보는 건 확실히 다른 경험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영화를 보는 공간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기술이 발전함으로써, 오히려 영화는 그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간다. 우리 세상에는 영화가 만연해 있고 영화라는 것을 더는 의식하지 않게 된 이들은 자기 삶의 주도자가 되어 살아간다. 이 주도자들은 오늘날 개인화, 파편화 등으로 묘사되는데,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죽지 않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붕괴는 단연 긍정적이다. 레프 마노비치의 급진적인 발언 중에 가장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대목이다. 신이 죽었고, 거대 서사가 붕괴했으며, 네트워크의 시대가 왔다. 


미구엘 고미쉬의 <천일야화>는 우리에게 영어로 더 익숙한 이름인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를 빌려온다. 여기서 이야기라 함은 ‘내러티브’라는 것으로 이해되는 그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하룻밤이 지나면 다시금 내일이 찾아오는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루의 가치이다. RPG 게임에서 하루가 지나면 주인공 캐릭터의 체력이 회복되고 필드에 몬스터가 리젠되듯이, 이 천일밤의 이야기에서는 매 하루마다 각자의 시간이 시작되고 끝나야만 한다는 규칙이 있다. 즉 천개의 밤이란 천개의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천개 삶의 생성과 죽음이 아니라 천 개 삶의 동시진행을 의미한다. 이 영화는 그 모든 사람들을 한번에 보여줄 수 없기에 이런 방식을 택했다. 


이때 관객은 한 명의 삶을 보고 난 후에 다른 이의 삶으로 넘어가야 한다. 오늘날 영화를 보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한 개의 영화를 틀어놓고 보다가 재미가 없으면 다른 영화로 넘어가는 방식이다. 이 채널들에서 각각의 영화들은 계속해서 재생되지만 우리가 그걸 보고 있지 않기에 일시정지의 상태에 놓인다. 이전 시대의 영화가 연속 안에서 순간을 찾아내려 노력했던 반면, 오늘날의 영화는 순간 안에서 연속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이를 두고서 영화가 단자(Monad)화되어 간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영화 유튜버들은 ‘스포주의’라는 이름을 달고서 영화 전체를 5분 내로 축약해 보여주고, 대중은 그것을 즐긴다. 5분여의 요약을 통해 자신이 볼만한 영화인지 아닌지를 파악한다. 즉, 부분에서 전체를 가상적으로 도출해낸다. 


그런데 부분에서 전체를 도출해내는 일은 없던 것을 만들어 붙이는 것이니 일종의 ‘환상통’을 낳게 되는 건 아닐까? 우리는 가져본 적 없는 것을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을까?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여자는 남자가 될 수 없고 남자는 여자가 될 수 없다. 이는 금지의 문제가 아니라 고민과 숙고의 과정을 뜻한다. 아마 들뢰즈라면 이것을 되기(Becoming)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불가능과 가능이 아니라 가져본 적 없는 것에 대한 낭만과 그리움이 오늘날에 만연해 있다. 인싸들은 아싸들의 문화를 훔치고, Z 세대는 X 세대의 문화에 열광한다. 우리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공동체적 가치가 무너졌는데, 그 과거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잘 알기에 아무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 상황은 명백하게도 ‘무너진 낙원’이라 할 수 있다. 



미구엘 고미쉬, <타부, 2012>


2012년 미구엘 고미쉬는 낙원과 실낙원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제목부터 <타부>인 이 영화는 금기이지만 얼마든지 넘어도 되는 허울뿐인 것을 보여준다. 낙원과 실낙원이라는 이중체제를 지닌 이 영화에서 주인공 일행은 둘 중 무엇을 택하든 다른 한쪽이 그를 뒷받침하는 이중구속의 상태에 놓인다. 그래서 그들은 1부 낙원, 2부 실낙원의 사이를 미끄러지며 부드럽게 영화의 밖으로 빠져나간다. 이들 일행이 도착한 곳은 2015년의 <천일야화>다. 경제 위기를 거치며 변화된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는 이 영화는 어떠한 이야기도 없고, 어떠한 과거와 현재도 없다. 이것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들’은 과거도 현재도 아닌 양측 모두에 구속된 상태로 앞으로 나아가게만 되는 미끄러짐의 상태에 놓여있다. 


우리들 중 다수가 2020년을 폐허의 이미지로 기억할 것이다. 씨네21의 2020년 한국영화 연말결산 특집에서 프론트라인에 선 4명의 비평가 중 2명이 폐허라는 말을, 다른 2명은 그와 유사한 단어를 글에서 언급했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넘어지는 이유가 다시 일어서기 위함이라는 문구를 인용하고 싶지만, 이 뻔한 희망은 우리의 극장에서 과거로 남겨진다. 극장에서 영화가 다시 상연되는 매체라면, 극장의 바깥에서 영화는 ‘평생 보지도 않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고를 수는 있는 ‘동시다발적인 선택지’ 중 하나가 된다. 즉 N개 만큼의 평행 시간이 있고, 이들 모두가 그들 각자의 영화관을 성취한다. 


하틀리의 책은 “과거는 낯선 나라다. 낯선 나라에서 과거는 다르게 행동한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폐허가 된 장소를 기억하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은 그들의 과거를 낯선 것으로 만들고, 이 낯섦 속에서 과거라는 시간은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천일야화>에서 연속되는 이야기들의 파편들은 이들 삶의 무대인 ‘무너진 낙원’을 해체하고 다시 세우는 일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 없으리라는 점을 뻔히 예측해볼 수 있다. 단지 변형만이 있을 뿐이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는 오천만 개의 기억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세월호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어느 시골의 노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기억의 형태로 남아있다. 


다시금 <타부>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 미래를 응시하는 불안의 눈동자를 떠올려 보도록 하자. 이 눈동자가 유독 불안해 보이는 것은 영화 ‘속’에서 빗금 쳐진 주체가 되는 관객에게 세계로의 문을 일시적으로 해금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우리’와 관련된 게 아니라면 그냥 한 귀로 흘려보내도 상관없다. 그러나 내 가족이, 또는 내 재산이, 내 생명이 본격적으로 위협받을 때 세간을 떠도는 소문은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이 된다. 아마도 <천일야화>라는 이야기에서 세헤라자데의 생존 방식이 이렇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세헤라자데의 생존방식은 이야기 안에 ‘우리’를 몰입시킴으로써 희로애락의 가치를 공유하고, 이 참을 수 없는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걸 우선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밤이 되면 악몽이 찾아오는 게 두려워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이가 있듯이, 밤이 되면 찾아오는 왕의 트라우마는 이야기 안의 ‘우리’에 편입되고 여기서는 무너진 이야기로부터 생존해나가는 것이 주된 목표가 된다. 그리고는 평소라면 느끼지 못했을 수많은 ‘우리’ 안에 포함되며 느낄 수 없던 것들을 차례대로 느끼게 된다. 물론 <천일야화>라는 영화 자체로만 본다면 낯선 나라의 사회적 배경을 잘 모르는 우리는 이것을 그저 영화로만 바라보게 될 테다. 하지만 오히려 영화이기에 더 잘 느껴지는 것들이 있기도 하다. 


액션 영화의 스펙터클은 대지를 항상 헤집어 놓으려 시도한다. 폐허로 만들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기라도 하는지 옥수수밭을 박살 내고, 좁은 시장 골목길을 망쳐버리고, 폭발물을 펑펑 터트리거나 하는 등 온갖 종류의 폐허를 상연하려 든다. 그리고 이 영화들은 대게 폐허로부터 완벽하게, 또는 반쯤은 희망을 남긴 채로 밝은 미래를 암시하며 끝나곤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늘 과정 중에 있다. 의식을 화살에 비유할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에는 늘 빛을 보고 있는 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빛의 반대말은 어둠이고, 이 어둠은 인식할 수 없음의 영역으로써 죽음이라는 것으로 으레 표현되곤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폐허는 죽음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폐허는 살아있음의 증표이다. 이 폐허 속에서 유실된 것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끝없이 분화되는 의식 아래에서 이 죽음은 죽음이라는 상황조차 극복한다.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가지려 한다는 건 탐욕의 행동이 아니라 환상통을 극복하려는 이들의 멋진 모습이다. 한국인이 포르투갈의 무너진 경제 상황을 지켜본다는 것, 영화가 결코 현실의 표면을 보여주지 않음에도 그것이 현실을 말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눈에 비치는 것만이 전부가 된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법은 당장에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연대를 꾀하는 일이다. 오늘이 가고 내일이 와도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새해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이 달라 보이듯이 대문자 A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달리 보이게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x8wykEr8rqs&list=RDx8wykEr8rqs&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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