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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12. 2021

소실점에 영혼이 팔린 이들

소실점에 영혼이 팔린 이들



폴 비릴리오는 시간의 기술이 발전할수록 시간의 소실점으로 의식이 가속하게 된다고 말한다. 시간의 소실점이라는 것은, 원근법으로 집약되던 시야의 소실을 넘어 우리가 직접 그곳으로 가속하게 되는 지각적 변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핵심은 ‘지각’의 변동이라는 점이다. 시간이 하나의 점으로 집약될 정도로 빠르게 흐른다면 우리의 의식은 신체로부터 점점 멀어질 것이다. 시야는 점을 향해 소실되며 신체는 점진적으로 감각을 잃어간다. 즉,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비릴리오의 이 설명은 인간의 시간이 기술의 시간으로 바뀌어 가는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상황을 고려해볼 수 있다. 신체를 지각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달린다면 우리의 신체는 실제로 뒤처진다. 세계에 대한 지각이 곧 인식이라면, 세계를 지각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은 그만큼 세계의 인식으로부터 뒤처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만큼의 크기를 지닌다. 그러니 이를 그릇이라 표현해도 좋을 테다.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이듯이 아는 만큼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게 꼭 좋은 일이 될 수만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신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신체란 건 형이상학적인 무언가에 가까울 것이다. 반면 오늘날의 기술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 이 즉각성의 기술은 인공위성이나 네트워크와 같은 지각의 확장을 통해 가능해졌다. 요컨대 오늘날 모든 것을 본다는 말은 ‘볼 수 있다’라는 잠재태의 형태로부터 현실로 구현되는 즉각적 피드백에 가깝다. 주문을 알면 기술을 뽐낼 수 있는 마법사의 지팡이처럼, 지각의 확장은 신체의 확장(extension)이 되어 우리의 지각을 신체의 바깥(Extra)으로 불러낸다.



하지만 전능은 분열을 동반한다. 세상 어느 곳도 볼 수 있다는 말은 세상 어디에도 당신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세상 어디에도 존재한다는 말은 ‘없다’. 왜냐하면 공기가 세상 어디에나 있기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듯이 어디에도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기술 시대에 우리의 지각은 이러한 방식으로 구현되고 또 분열된다. 우리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카카오톡 메신저와 Zoom 화상 통화, 티스토리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등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당신이 온라인 상태에 있다는 SNS 상의 알림은 상대방이 우리에게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이는 곧 당신이 항상 세상과의 접속에 ‘대기 상태(Stan-by)’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체의 바깥으로 끌려나온 우리의 지각은 잘게 부서진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것을 계속해서 분열시키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작은 조각들만이 남는다. 동시다발적으로 접속해있을 수 있는 곳이 많아질수록 이러한 상황은 심해질 것이며, 종국에는 그릇에 완전히 금이 가버려 되돌릴 수 없는 지점으로 향하게 될 테다. 이른바, 이제 하나의 당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정신의 분열이라는 말을 깔보지 못한다. 정신의 분열이란 붕괴로서의 소실점이 아니라 미래로의 가속에서 벌어지는 불상사이기 때문이다. 기술 특급에 탑승한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할 때 신체는 점점 더 소실된다. 신체를 벗어나는 지각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이상 신체는 우리의 걸림돌에 불과하고, 시간과의 마찰을 겪는 신체는 소실점에 비례하여 소실된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일까. 신체를 버리는 것, 그릇의 크기를 확장하는 것 등을 떠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신체에 변형을 가하는 건 답이 될 수 없다.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존재자의 존재를 말해주는 건 존재라는 사실 자체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냥 느끼고 있는, 세계 안에 내쳐진 ‘지각’은 우리의 덩그러니 놓인 신체 없이 사고 될 수 없다. 존재가 존재자를 따라잡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존재를 긍정해야만 한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체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점일 테다. 우리가 얼굴의 표면을 ‘눈’을 통해 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체에 사고함에 있어 표면의 관찰은 불가하다. 그렇다면 이 표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무척 궁금해질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표면으로, 세상과의 관계에서는 경계로 작동하는 이 지점은 어떤 장소인가.



경계는 영토를 형성한다. 경계는 영토화와 탈영토화를 반복하게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경계의 사유를 생성의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른바, 인간의 지각이 형성되려면 신체의 경계를 넘나들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들뢰즈의 이 사유는 니체가 말하는 얼굴의 표면을 통해 인간의 삶과 기억에 대한 문제로 넘어간다. 심연의 사유로 잘 알려진 니체의 표면은 신체와 세계를 가로지르는 경계가 다양한 곳에서 발견되고 나누어짐을 말해준다.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본다면, 우리가 세계를 살아갈 때도 세계는 우리를 살아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세계를 향해 내달릴 때 세계도 당신의 반대편으로 내달리고 있다. 그러므로 소실점으로의 가속은 사실상 소실점이 우리에게로 가속해오는 것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를 영원회귀라는 말로 설명한다. 자신을 제외한 세상 전부가 빠르게 가속해 하나의 주기를 형성하고 다시금 원래의 장소로 돌아오게 된다면, 우리는 미래의 기억과 과거의 기억 모두를 알고 있을 테다. 여기서 니체는 인간이 그 모든 것을 기억하기엔 그릇이 부족하므로 세계가 일순한다 해도 미래에 대한 예지는 불가하고, 그러나 이런 운명에 대항하는 게 바로 인간의 의지라고 보았다. 반면 니체의 사유는 오늘날 기술을 통해 가능하게 된 신체의 확장, 즉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확대’를 통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세계가 일순하여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다 알게 된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를 통합해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지금 이곳에 우리가 신체를 지닌 채 서있기 때문으로, 신체를 통해 인식의 파편이 하나로 모아진다고 볼 수 있다.



일순에 대해 말해보자. 같은 내용, 어떤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뻔히 알면서도 그걸 다시금 반복한다는 것. 중요한 건 이러한 반복 속에서 우리가 같은 사람일 수 있느냐는 점이다. 영화를 첫 번째로 보는 우리와 두 번째로 보는 우리가 같은 사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음악 같은 걸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하나의 음악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에 무슨 악기가 치고 들어오는지 등의 세부사항이 귀에 익게 된다. 즉, 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계속해서 생겨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차이에서 반복을 찾는다. 무언가 차이가 있기에 반복이 진행된다는 들뢰즈의 말은 우리의 인식이 항상 신체의 그릇을 초월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반복 속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일은 반복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애초에 모순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유튜브 등지에서는 일 년을 주기로, 또는 십 년을 주기로 지난 시간 동안의 인기 있는 음악을 하나로 엮는 믹스 작품들이 발견된다. ‘End of mix’라고 불리는 이 음악들은 한 시간에서 열 시간 사이의 시간을 두고 지난 세월에 있던 음악을 고장 난 테이프처럼 쏟아낸다. 음악과 음악의 사이는 말끔하게 봉합되며, 이러한 봉합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시간과 순간에 존재하던 음악을 하나의 소실점에 놓게 된다. 연말에 이루어지는 연말정산 성격의 이 믹스 작품에서 우리는 파편화 된 시간이 소실점의 자장에 끌려 봉합되는 기묘함을 느끼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을 반복해서 듣는 일은 또 어떤 현상을 불러일으킬까. 분산화된 지각이 한 곳에 모이고, 본래의 맥락에서 빠져나온 것들이 하나의 순간에 성좌처럼 배열된다.



벤야민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초월해 지금의 순간이 존재한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빼돌려진 순간은 몽상가들의 키치로서 활용되기도 한다. ‘드림 키치’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헤테로토피아를 찾아 헤매는 이들이 만들어낸 조악한 유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편들을 그러모으는 행위가 조악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테다. ‘봉합’은 한 자리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있게 하는 능력을 지녔다. ‘봉합’은 실재의 가장자리를 찢어 자본주의의 유산으로부터 가라앉은 꿈들을 빼내온다. 당신이 유튜브의 연말 믹스 음악을 듣는 동안 세계에 가라앉은 지각들은 하나로 정렬되어 시간의 소실점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음악들에서 어떠한 리듬을 발견하고, 순열정렬된 이 리듬은 우리의 파편화된 지각이 하나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다.



리듬은 신체가 된다. 가브리엘레 브란트슈테터는 신체의 흔들림으로부터 세계의 지각이 엇나가는 현상을 목격한다. 발레와 같은 신체적 리듬에서 발견되는 지각의 분열은 손끝에서 발끝으로, 다시금 발끝에서 신체의 말단으로 움직이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모습은 지각의 비대함과 분산으로 묘사되지만 그 모든 것이 리듬을 통해 하나로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서는 신체가 눈보다 먼저 세계의 궤적을 쫓으며 이는 우리가 소실점으로 향하는 지각보다 먼저 신체를 닿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예컨대 분열되었던 사기그릇의 파편을 하나로 모아 더 큰 사기그릇의 모양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전과 같은 그릇의 모양새를 한다는 보장은 없다. 반복에서 차이가 발견되는 게 아니라, 차이를 통해 반복을 발견한다는 말은 역사의 우연한 일치가 ‘두 번째’라는 반복으로서 이해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사기그릇을 두고서 모작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그것은 반복되었고, 어떠한 차이를 통해 그걸 알게 되었다. 바꾸어 말해 우리에게 차이는 필연적이다. 전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인식의 균열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이고 이것은 소실점으로의 가속이 차이를 생성해내는 과정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술은 생성을 가속하는 기술이기도 한 것이다. 백 년 전 쥘 마레가 신체의 운동을 기록했을 때 그것은 소실점을 향한 차이의 분열로 이해되었었다. 그러나 오늘날 소실을 향해가는 우리의 신체가 겪게 되는 의식의 점진적인 상실은 세계가 일순하여 돌아오는 사이의 궤적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영화의 종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미래의 기억을 엿본 듯한 행색을 하는 건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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