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Feb 08. 2021

5인 이상 집합 금지 시대의 <휴일>


*이 글은 금두운의 #이만희챌린지를 위해 작성했다.


5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 나는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현대의 가족은 5인을 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핵가족의 시대에 가족 구성원은 엄마, 아빠, 아들, 딸이라는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자녀를 세 명 이상 낳으면 한 명은 대학 등록금이 공짜라는 오늘날에 ‘5인’ 가족이라는 단어는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은 4명을 기본 전제로 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5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 명령이 왜 유효한지를 보여준다: ‘5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 것은 삶의 최소 단위인 것이다. 가족이 4명이기에 가족끼리 모인 상태에선 저런 집합 금지 명령이 적용되지 않는다. 친구나 지인은 몰라도 가족과는 떨어져 있으면 안 되니 우리는 집합해야 한다. 고로, 5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은 가족 이외의 것에 한눈팔지 말라는 ‘평균에 기반한’ 권고인 셈이다. (사실 정부는 동거 중인 가족에 한해 5인 이상 집합을 허용하고 있긴 하나, 글의 전개를 위해 넘기도록 하자.)



4인 가족이 결코 가족의 표준은 아니지만, 통계상으로 볼 때 4인 가족이 가족 형태의 다수를 이루기에 이런 생각은 이해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조치를 발효하기 위한 최대한의 효율을 택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모름지기 평균에서 벗어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이른바 통계의 함정이라 불리는 것이 평균이라는 단어에 담겨있다. 4인 가족 이외에도 5인, 6인, 그리고 3인 가족이나 2인 가족 등의 형태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바꾸어 말해 우리는 평균을 벗어나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통계에만 머무를 게 아니라 보통 상황에 어긋나는 여러 예외적인 경우를 포괄한다: 명절날 귀향길에 오르는 이들에게 5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은 아예 모이지 말라는 것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할머니 할아버지로 구성된 본가는 이미 2명분의 사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단 두명 만이 본가에 방문할 수 있고, 이는 부부만 방문하거나 혹은 부부 중 한 명이 아이 한명을 데리고 다니는 등의 제한적인 상황만을 허용한다.



그런데 5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의 시대에도 예외는 있다. 그건 바로 이동하는 상황이다. 비행기나 기차처럼 다수의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밀집하는 상황에서는 5인 이상의 집합이 허용된다. 이때 이 집합이 일시적인 밀집, 즉 ‘대중’을 상정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중은 형용할 수 없는 존재다: 모던 사회의 출현과 함께하는 대중의 역사는 흩어지고 파편화하는 분산의 역사와 궤를 함께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가족과 대중의 결정적인 차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더니티의 대표격에 해당하는 산보객은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존재인데, 그렇기에 이들의 산보 행위는 특색이 없고 방향도 없다. 공항이나 기차역의 대중들도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를 산보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산보객의 감정은 재난과 같은 파국을 피해 간다. 산보자가 다다른 장소는 여행지의 낯섦만을 줄 뿐 그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감정은 주지 않는다. 즉 산보자, 혹은 여행자에게 이곳의 땅은 잠시 머무르는 땅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가족이란 본가를 기반으로 하는 4인의 단체로서, 그들의 모국(Motherland)은 아주 확고하다. 그래서 이들은 재난 상황에 극도로 민감하다. 이들에게 재난이란 그들이 머무르는 땅을 해치기에 거부되어야 할 상황이다. 문제는 바로 이 대목에 있다. 모던 사회에서 가족은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다. 모 애니메이션 영화의 제목처럼 이것은 “움직이는 성”이자 “떠다니는 집”이다. 여행과 산보가 기본 옵션이 된 모던 사회에서 가족은 움직이는 집이 되어 이 땅을 떠돈다.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에서 본가를 떠나 도쿄로 여행을 떠난 노인이 문득 죽어버리는 건 이러한 부유성이 지적하는 예리한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선은 가족의 붕괴가 아니라 부유하는 대지의 성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서울이나 부산과 같은 지명은 점진적으로 탈락되고 단지 그곳을 본가로 둔 이들의 마음만이 남는다. 오래전에는 고향을 떠난다는 게 다시 돌아와야만 함을 전제로 하는 지리 기반 행위였지만, 오늘날에 고향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요컨대 우리는 부유하는 땅을 딛고 서 있다.



부유하는 땅에 대해 말해보면 우리는 가족과 대중이 어떻게 다른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가족은 하나의 땅에 기반한 여러 명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집합 금지 명령’이 적극적으로 적용된다. 반면 대중은 각자의 땅에 기반했기에 얼마나 모이던 1m의 거리만 유지하면 된다. 이런 이유로 대중교통, 극장, 음식점과 같은 곳은 사회적 거리두기만 확보된다면 무엇이든 허용된다. 대중에게는 단지 시간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모던 사회의 부유하는 성질은 시간감각을 흩트려 놓으며, 결과적으로는 안팎을 하나의 땅으로 허물어 놓는 효과가 있다. 밤 아홉 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말은 이 부분에 적용된다. 술에 취해 무아지경이 된 이들, 혹은 거리의 무장소성에 취한 이들은 시간의 감각을 해친다. 손상된 시간 감각은 장소를 허무는 것으로 그들을 강제적으로 하나의 땅에 몰아넣는다. 이 과정은 마치 가족의 조건을 충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장소를 폐허로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에 일종의 ‘무너진 낙원’을 형성하는 행위이다. 낙원은 무너지고, 이 현실의 잔해가 남은 장소에서 그들은 심리적 저항성을 빼앗긴다. 산보자가 잔존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폐허를 무너진 낙원으로 만든다. 그리스의 망가진 신전은 당대에는 폐허였지만 오늘날에는 무너진 낙원이 되는 것들의 좋은 예시다. 이때 무너진 낙원은 어감상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시간을 빼앗긴 것들의 무덤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부유하는 상태에서 고정된 지점으로 나아갔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무너진 낙원은 잔존물들의 공동체이다. 즉, 유사가족이다. 모던 사회의 대중은 시간이 열화되는 장소인 폐허에서 가족이 될 수 있다. 비록 유사라는 제한조항이 붙기는 해도, 가족이 사라진 자리에서 가족을 생각해보는 일은 참으로 그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테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두고서 현혹이나, 기만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공동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옳다. 하지만 이 공동체의 가치는 산보객으로서의 대중을 부유 상태에서 잔존 상태로 끌어내림으로써 폐허의 안쪽으로 끌어들인다는 숙명을 띠기도 한다.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이 되기를 택한 천사가 세상의 모든 고통을 생생한 감각으로 느끼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 천사의 표정은 행복해 보인다. 어째서일까? 이곳은 폐허가 아니라 무너진 낙원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생각해보건대, 영화를 본다는 건 시간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흩트려 놓는 장소인 극장에 방문한다는 점에서 무너진 낙원을 가정하는 행위인 듯하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산보객들은 스크린을 필두로 집합했다가 다시금 흩어진다. 잔존의 형태로, 서로 거리를 두며 앉아있는 관객들의 모습은 유사가족처럼 보인다. 따라서 극장이 우리의 모국이자 본가인 이유는 이곳이 폐허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폐허에서 시간 감각이 사라지고 나면 그곳은 무너진 낙원이 된다. 무너진 낙원은 하늘의 천국이 지상에 추락하며 생긴, 파편들이 흐트러진 장소이다. 이는 관객이 스크린에 매혹되지만 사실은 객석에서 거리두기의 형태로 파편화되어 있는 극장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는 스크린 안에서 환상적이지만 우리의 눈에 들어올 때 이리저리 분산되고, 관객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스크린 안에서 시간은 균일하지만, 객석으로 흘러나오면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오늘날 가족의 부유가 바로 그러하다. 무빙 이미지로서의 영화가 계속해서 떠도는 것처럼 가족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가족의 시간은 대중의 시간이 되며, 가족은 서로 다른 이들을 일시적으로 가둬놓을 뿐인 대중교통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확장되는 것처럼 가족의 범위 또한 넓어졌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가족이 붕괴한 자리는 마치 폐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산보객들을 하나로 이끄는 낙원이다: 이만희의 <휴일>은 그런 의미에서의 모더니티를 품은 영화라 할 수 있다. 아직 가족이 되기 이전의 씨앗,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미분화 상태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커플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기본적으로 폐허는 모든 것이 무너져내렸기에 모든 것을 다시 세울 수 있는 리부팅의 장소다. 폐허는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기에 장소의 가장 마지막 모습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위에 모든 것을 세울 수 있기에 가장 새로운 장소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도입부가 “우리는 일요일마다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로 출발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일요일은 일주일 중 가장 마지막에 자리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금 돌아온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소멸해가는 자리이면서도, 다음 일주일이 새로 시작되는 장소인 것이다.



성경에서 일요일은 하느님이 모든 창조를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날이다. 그와 동시에, 성경에서 일요일은 예수의 부활이 이루어진 날이기도 하다. 즉, 일요일은 모든 것의 끝이자 시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우울한 배경은 폐허가 아니라 무너진 낙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처음에 이 영화를 보면 거리를 거니는 남자의 모습이 일종의 산보객처럼 보인다. 산보객은 거리를 거닐며 사물의 세계를 분산하여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무정형, 파편화된 존재라 할 수 있다.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낙태를 권장한다는 점에서 이때의 분산은 가족이 되지 못하는, 혹은 가족의 가치가 허물어가는 한국의 근현대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벤야민의 말처럼 산보객은 다가올 구원의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때, 구원의 순간이라는 건 이전 세상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다음 일주일로 넘어가 다시금 시간을 보내는 반복의 행위가 바로 구원이다. 그래서 폐허는 구원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산보객은 폐허를 거닐며 파편화된 자신이 장소에 동화되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폐허에 도래할 리부팅의 순간을 기다린다. 무너진 낙원은 이렇게 시작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실점에 영혼이 팔린 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