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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10. 2021

컬트와 혐오로서의 코로나 극장




*콜리그의 플랫폼 확장을 기념하며 쓴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466304


상상의 한계이자 상상하기 불가능한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상상되어야 할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야 하고, 언어에 대해서도 침묵인 동시에 또한 말해야 할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 아직은 모르지만 언젠가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능력들에 대해서도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한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1]-

0.

만약 우리 주변에 연쇄 살인마가 있다면 일상을 영유하는 건 끔찍한 나날이 될 테다. 이는 자신이나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살인마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비(非)인간적인 존재가 ‘우리’의 범주에 속해 있는 것을 꺼리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즉, ‘우리’라는 범주를 무엇으로 보는지에 따라 기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 기사를 통해 미국의 어느 마을에 살인마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접하는 우리는 그저 심드렁하게 페이지의 스크롤을 넘기기만 할 뿐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되기에는 너무 먼 곳이다. 반면 ‘우리’ 동네나 ‘우리’ 나라에 연쇄 살인마나 아동성범죄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미간이 찌푸려진다. 내가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는 준거집단에 그러한 배타적인 가치들이 진입하는 것이 기분 나쁜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이것을 프로이트적 맥락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가 배변의 과정을 관찰하며 정립한 ‘나’가 아닌 것은, ‘내 것’이지만 그걸 인식한 순간부터 이미 ‘나’가 아니기를 바라게 되는 무언가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걸 인식할 정도로 사물이 구체화되었다는 점은, 그게 이미 우리의 몸을 떠나 있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몸에 붙은 혹이나 자라나는 손톱 같은 게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들을 절제하거나 분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생각해보면 된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순간 신경에 거슬리게 된다는 말을 연쇄 살인마 등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눈에 보이게 됨으로써 신경을 거스르는 것들은 도덕과 윤리를 가리지 않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장애인 복지 시설 등의 사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들 사회의 구성인원 중 하나인 이들에게 세상은 각박한 태도를 보인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동네에 그러한 시설이 들어오는 걸 꺼려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굉장히 우스운 일이다. 첫 번째,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그들’이 있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배제한다는 점이 그렇고. 두 번째, ‘우리’가 그들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일종의 배설물 취급을 한다는 점이 그렇다. 요컨대 우리는 그런 것들을 똥처럼 취급한다. 결과적으로 연쇄 살인마처럼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이가 도덕과 윤리에 의해 배제되는 반면, 장애인 등의 문제에서 도덕과 윤리는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적용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이쪽은 조금 더 본능에 가까운 문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능에 가깝다는 건 무슨 뜻일까. 여러 관점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듯싶다. 본능이란 것은, 나를 향하는 감정이다.

1.

코로나가 한창인 2020년을 떠나보내면서 나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폐허’라는 단어의 부각이었다. 여러 미디어에서 폐허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영화계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한자리에 모이기를 꺼리는 것이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영화관이라는 장소는 수 시간 동안 사람을 잡아 둔다는 점에서 불쾌한 무언가가 되었다. 영화제처럼 착석이 강제되는 성격의 행사들은 모두 취소되거나 뒤로 미루어져야만 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전파가 몇 차례 이루어짐으로써 종교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졌고, 별다른 상관관계는 없지만 영화를 위해 모이게 되는 공간의 제의적인 성격이 어쩌면 그러한 모습으로 비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영화제라는 단어에서 ‘제’라는 단어가 ‘제의적(festival)’인 뜻으로 사용됨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영화관이라는 장소는 영화에 대한 몰입을 유도함으로써 일종의 숭배적 가치를 끌어냄을 고려해볼 수 있다: 극장의 구조상 사람들은 영화를 내려다보게 되는데, 이러한 시선의 위계는 우리가 영화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 즉 영화보다 위에 있다는 느낌을 주기 십상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영화란 ‘매혹(attraction)’의 존재다.

우리는 영화에 의해 유도되며, 그러므로 극장에 간다는 건 내가 아니라 영화를 위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 것일까? 이것은 마치 본능에 충실하지 않은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감독의 의도를 찾아가는 이 미궁에서 우리는 게임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그곳에 자신을 대입한다는 점을 통해 파훼 된다.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에 우리가 있고, 이 시선의 끝자락에서 어떤 사유가 피어난다. 이것은 ‘실존’이라는 안개로 작동한다. 이는 우리의 시선이 곧 우리 자신의 연장선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즉, 영화를 본다는 건 우리가 영화를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건 우리가 그곳까지 다녀와 보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세계는 인식 가능한 지평까지로 철저히 국한되어 있다. 그래서 이 인식의 범주 안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혹은 내가 행동하고 사고하는 것의 지평에서 벗어나는 것이 들어오게 될 때 극도의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평과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나면, 오히려 낭만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아마 그건 거리 두기가 자아내는 이상한 향수 같은 것일 테다.

2.

근래의 한국, 시기상으로 보면 2010년부터 2020년까지라는 근 10년 동안 벌어져 온 성별 상의 대립은 세계에 두 개의 고속도로를 놓았다. 이 둘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서 영원히 닿을 수 없다. 하지만 서로를 맞대고 있다는 점에서 각자에게 프론트라인으로 기능한다. 요컨대 이곳에는 마치 두 개의 세상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지금 이분법이 아니라 평행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둘은 계속해서 서로를 마주 보지만 결코 만날 수는 없다. 서로 무슨 말을 하든 직접적으로 교류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전쟁은 지속된다. 참호에 틀어박힌 1차 세계대전의 군인들처럼 그 누구도 영광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이야기를 우회하여 폐허의 장소라는 말을 꺼내 보려 한다. 폐허라는 건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를 맴돌 때만 비로소 파악되는 장소이다. 폐허의 중심부는 늘 항상 어두운데, 말하자면 그 어둠이 너무 무서워서 주변을 빙글빙글 우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중심부로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죽음의 중앙으로 들어가는 일은 어지간한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행동이다.

폐허로서의 극장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지점을 떠올려보게 된다. 코로나 시대에 극장은 집단 밀집의 장소로서 방문하기가 망설여지는 곳인데, 역설적으로 영화를 보기 위해서라면 ‘그럼에도’ 가야만 한다는 제의적인 성격이 강화되었기도 하다. 남들이 가지 않기에 오히려 내가 가야만 한다는 것, 이 감정은 사람이 방문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안전하게 된 거리 두기의 현장과 묘하게 겹쳐진다. 그런 점에서는, 어쩌면 영화를 본다는 건 ‘거리 두기’라는 숭배의 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극장에 가서 영화가 시작하는 걸 기다리고 있노라면, 앞자리 좌석을 발로 차지 말라거나,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해달라는 관람 예티켓 안내 광고가 나오곤 한다. 이것들은 모두 영화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가 바깥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영화와 친해지기를 주장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외부와의 교류를 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격리의 시간이 불안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둠으로 들어가는 일은 어딘지 모르게 괴로워 보인다.

3.

어둠으로 들어가려면 어둠을 바르게 직시해야 한다. 바꾸어 말해, 폐허를 목격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폐허에 대한 응시가 있다. 이따금 폐허를 응시하지 않고서 자신이 폐허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나오곤 하는데, 이건 꽤 재미있는 일이다. 자기 삶의 터전이 무엇 때문에 망가졌는지를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파괴는 필연적인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 전체의 구조를 바꿀 힘을 지닌 사람은 몇몇 소수일 뿐이다. 설사 있더라도 그들의 영향력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진다. 내가 생각하기에, 극장에 대한 저항이 이 시대의 새 물결이 아니라 오랜 파랑의 연장선에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인 것 같다. 현실과 극장은 서로 좁혀질 수 없는 견해차를 보이면서 나란한 평행도로를 달려왔다. 극장이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장소라면 현실은 극장으로부터 벗어나는 장소로서, 한 곳에 공존할 수 없는 내피와 외피의 관계처럼 여겨졌었다. 헌데 어쩌면, 이곳에 필요한 건 서로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수평선의 너머를 살피는 지혜가 아닐까? 수평선은 현실 문제를 마주하지 않지만 우리 현실의 일부이고, 한마디 보태자면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거리를 둔다는 건, 대상을 숭배한다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대상을 혐오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소위 ‘숭배’라는 속뜻을 지닌 영단어 ‘컬트(cult)’의 용례는 여기에서 나왔다. 너무 혐오스러운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에 오히려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만약 사람들이 컬트영화를 보며 숭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두고 ‘힙스터’라는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힙스터는 몰아치는 파도에 올라타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벽을 짓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는 주류 문화에 휩쓸리지 않도록 세계로부터 자신을 배제하려는 속성에 가깝다. 이들이 폐허 속에 있을 수는 있지만, 굳이 폐허가 아니더라도 벽을 짓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컬트라는 것은 오직 폐허 속에서만 가능하다. ‘우리’에 속하지 않은 것은 세계로부터 분리되었고 그래서 질서가 통용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어떠한 원리와 결과를 도출해내는 게 불가능하다. 바로 이 무질서의 상태가 폐허의 속성과 닮아있다. 폐허는 기존에 있던 무언가가 무너져내린 장소라는 점에서 ‘무언가’가 있었음을 상정한다. 다시 말해서, 폐허라는 것은 강한 지표적인 성격을 띤다. 결국 영화 극장이라는 단어가 주는 향수 어린 기운은 우리가 지은 그 벽이 바로 극장의 속성을 띤다는 점을 말해준다.

4.

그렇게 본다면, 누군가는 힙스터 또한 주류문화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하위쌍이라는 점에서 ‘무언가’에 깊이 의존하는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추론은 옳지만 폐허라는 것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무효다. 주류 문화는 결코 폐허일 수 없다. 오늘날 서양의 문화에서 로마가 결코 폐허라는 말로 사용되지 않듯이, 폐허라는 것은 우리의 곁에 없는 장소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니 ‘우리’에 속해있지 않아야만 폐허가 된다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의 핵심인 듯 보인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와는 다르게 정말로 현실 안에 자리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자리한다. 즉, 헤테로토피아는 그 자체로 울타리로 지정될 수 있는 분리와 배제의 공간이다. 따라서 코로나 시대의 극장이 바로 헤테로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시기의 극장은 방문이 꺼려지는 장소임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문하고 싶어지는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자. 코로나 시기의 극장은 방역의 단계에 상관없이 방문이 꺼려지는 장소다. 밀폐되고,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보통의 장소는 아닌데, 이곳은 일상의 바깥에 자리한 곳이면서도 영화를 보는 현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모순적인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들 중 누군가가 극장이 폐허가 되었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그는 사람들이 극장에 방문할 이유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할 테다. 하지만 위에서 로마를 폐허로 부를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오늘날의 영화는 모두 극장이라는 하나의 길로부터 출발했기에 결코 폐허가 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나는 극장이 모든 영화의 기원이라는 극장주의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코로나 시대의 극장이 우리가 이전까지 알아 왔던 지리정보적인 성격을 역전시킴으로써 외부와 내부를 뒤집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위험한 현실로부터 도피해 극장을 찾던 이들의 문화가 영화의 이전에 해당한다면, 극장이라는 위험한 현실을 찾아 마스크를 주섬주섬 챙기는 이들의 문화는 영화의 이후에 해당하는 것 같다. 굳이 극장이 아니더라도 여러 동시개봉 영화들을 볼 수 있는 이 시대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아야만 하는 이유를 우리의 바깥이 제공해준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바깥에 있는 것들을 혐오와 배척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똥’ 같은 영화 극장에 구태여 방문하는 행위는 명백하게 역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마치 연쇄살인마처럼 우리 세계를 떠돌지만 인제서야 인식의 범주 안에 들어온 것들을 구태여 찾아가게 되는 모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에 빠지게 되었다.

5.

살인자 잭 더 리퍼는 안개로 자욱한 런던을 떠돌았다. 그러나 안개가 폐허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폐허라는 단어는 전쟁과 같은 무시무시한 상황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기에 어딘지 모르게 꺼려지는 것 같다. 하지만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죽고 다친다. 죽음의 상황은 늘 항상 우리 곁에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사는 게 곧 전쟁이라는 말은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전쟁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인식에서 멀어진 오늘날에, 전쟁이라는 단어는 오직 역사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개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전쟁이라는 단어는 오늘날의 우리와 평행선을 달린다. 그런데 지구 전체를 초토화하고도 남을 핵무기가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오늘날임에도 전쟁이라는 단어를 쉽사리 떠올리지 못하는 건 생각해보면 꽤 이상하다. 아마도 그 이유가 바로 전쟁, 그리고 폐허 또한 ‘우리’의 바깥에 자리하게 되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바꾸어 말해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영화 극장이라는 단어가 멀티플렉스로의 영화 공간 개념에 점점 자리를 내어주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영화 극장이라는 단어를 쉽사리 떠올리지 못하던 것은 확실히 이상하다. 영화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영화를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는 말이 오히려 영화가 ‘우리’ 밖으로 나돌고 있음을 말해준다.

영화 극장이라는 연쇄 살인마가 우리 마을에 살고 있다. 그 놈은 1895년부터 우리 곁을 떠돌았지만 어느샌가 추적이 불가해졌는데, 왜냐하면 기술이 발달함으로써 점진적으로 평범한 외모(appearance)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 영화는 오히려 우리의 현실에 도착하려 하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그럴듯함의 형성은 컴퓨터의 세계가 우리의 현실이 되었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대면 사회를 현실로 겪는 우리에게 비대면 영화는 가능하다. 서로를 대면하지 않고서, 얼굴 화면의 표면을 우회하고서도 얼마든지 폐허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만들어냄으로써 경이로움을 선사했던 고전적 시네마는 이제 말도 안 되는 현실 때문에 말이 되는 이야기를 보고 싶어하는 코로나 시대의 관객들을 양산한다. 코로나 시대의 관객들은 화면과의 거리두기, 즉 ‘비대면’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마음에 평정심을 얻는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있지만 직접 대면하는 것은 아닌 이 상태가 ‘우리’의 바깥에 자리하는 이미지의 산물들인 ‘영화’를 만들어낸다. 요컨대 우리는 늘 영화를 상상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세상은 바로 그렇게 영화가 된다. 그 언젠가는 오늘이다.

6.

우리는 영화가 기술적으로 말도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지던 1895년의 시오타 역으로부터 출발해 기술적으로 얼마든지 말이 되는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는 2020년대의 현실에 도착했다. 유토피아가 극장이던 시절은 이제 헤테로토피아가 극장인 시절이 되어 과거의 모든 유산을 ‘있었음’이라는 지표적인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곳에는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고 그렇기에 누군가는 ‘향수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는 결코 낯선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낯선 나라에서 과거는 익숙하게 행동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낯선 나라의 한복판에 떨어진 우리는 과거의 시네마가 우리에게 다가설 수 없다는 사실과 동시에 우리가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나란한 두 개의 길이 있는데, 이 길은 정작 문제의 중심부인 폐허로는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주변부를 빙글빙글 도는 것만이 허용될 뿐이다. 왜 그런 것일지를 생각해보면 폐허가 너무 깊고 어둡기에 그런 건 아닐지를 떠올려보게 되기도 하지만, 본래부터 영화는 동굴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이 의견은 기각된다. 사실은, 오히려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영화의 기원이 아니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어둠에서 벗어나기, 코로나 시대의 영화 극장은 누구도 방문하기 싫은 장소이자, 누구도 방문하고 싶어하는 회복의 표식을 그 안에 품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을 터널에 비유하는 이들이 말하는 바처럼 극장이 우리의 세상으로 나와야 하는 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좀 전에 내가 영화의 안팎이 뒤집히고 있다고 말했듯이, 오히려 영화는 폐허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러므로 영화는 처음부터 어둠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폐허 속에서 탄생한 영화가 품은 잔존물들은 우리의 시각에서 벗어난 무언가가 아니라, 기존에 있던 것들이 무너져내린 잔해들이다. 이 어둠 속을 떠돌아다니는 연쇄살인마들이 티브이가 아니라 우리 동네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이곳은 우리 마음속에서 배제된다. 내가 사는 곳이라는 첫 번째 지점과 내가 살기 싫은 장소라는 두 번째 지점이 중첩됨으로써 우리는 이곳과 완전한 평행을 이루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은 오직 단 하나만이 존재하기에 우리가 영화와 이루는 평행은 평행 세계 같은 게 아니라 명실상부한 현실이다. 거리를 두고 싶더라도, 함께 살아가야만 하고 어떤 면에서는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그런 장소이다.

[1]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서울: 민음사, 2004)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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