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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26. 2021

우리의 전쟁


2020년은 우리 모두에게 이상한 해였다. 그리고 이는 ‘우리 모두’에게 이상한 해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코로나19의 국경 없는 전파를 통해 지금이 ‘세계화 시대’임을 체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만약 세계화가 되지 않았다면, 코로나바이러스의 전파 또한 느렸을 테다. 그와 반대의 생각도 가능하다. 세계화가 된 오늘날에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경험은 하나로 통합된다. 지구를 하나의 마을로 만들어버린 인터넷 기술의 발달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단 하나의 판본만을 허용한다. 우리가 생각해볼만한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질병의 최초 발원지가 곧바로 특정되었고, 전파의 과정도 데이터 분석을 통해 가능해진 오늘날에는 ‘기원’이라는 게 정말로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 기원은 정말로 확실한 것일까. 


과거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흑사병이 오늘날에야 하나의 호칭으로 통합된 반면, 코로나19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코로나19 였다. 우리는 코로나19의 치료법을 몰랐지만,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과학자들의 능수능란한 솜씨는 이것이 코로나바이러스의 아종이라는 점을 곧바로 밝혀냈고, 그래서 우리는 ‘우한 코로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재밌는 건 이 명칭에서도 기원에 대한 생각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우한 코로나에는 ‘우한’이라는 최초 발견 지역의 이름과 ‘코로나’라는 바이러스 이름이 하나로 합쳐져 있다. 즉, 지역의 이름과 종의 이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이는 마치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해 지역과 종의 관계를 따로 분리해 보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환경이 종을 결정하는 것이지 종이 환경을 결정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이 환경을 결정한다. 인간은 환경을 결정하는 유일한 종이다. 저명한 철학자들은 이를 두고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비관론자들에게 지구 멸망의 시계 초로 잘 알려진 이 개념은 우리의 기원을 지구의 역사에 빗댄다. 즉, 오늘날 가장 유명한 서력(Anno Domini)이 인류의 역사를 대표한다면, 인류세는 지구의 역사 안에서 인류를 바라본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환경을 결정하는 ‘유일한’ 종이라는 호칭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로 보면 인간은 뭔가 대단해보이지만, 지구의 역사로 인류를 바라보면 인간은 고작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 그러니 종이 환경을 결정한다는 말은, 지구의 역사를 기록한 게 인간이라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바꾸어 말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은 정신분석학을 발명해냈다. 정신분석학은 육체에 갇힌 영혼이 육체의 바깥에 대해 사고하는 학문이다. 자신의 바깥을 사고한다는 점에서 이게 얼마나 특이한 것인지가 드러난다. 대표적으로는 거울을 보는 행위가 있다. 거울을 보면서 그 안에 있는 게 자신임을 알아차리는 동물은 몇 없다. 과거에는 오직 인간만이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그게 가능한 몇몇 동물들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울을 은유로써 사용하는 건 오직 인간뿐이다. 동물들이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본다면, 인간은 거울을 가지고 논다. 쉽게 말해 인간에게 거울은 유희의 대상이다. 만약 동물들이 오목 거울이나 볼록 거울을 보았다면 이 괴상한 이미지를 보며 겁에 질렸을 테지만, 인간은 그냥 “으스스하고 기이한 것”쯤으로 여기고야 만다. 


미묘하게 왜곡된 이 이미지들은 일찍이 바로크 시대 등에서 으스스하고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일조하기도 했는데, 어쨌거나 우리에게 이 거울은 ‘바깥을 통해 자신을 사유하는’ 장치로 작동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바깥을 통하지 않으면 자신을 사유할 수 없는데, 그 바깥을 보는 일이 정말로 즐겁게 되어버렸고 그래서 거울은 무섭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바깥을 보는 일은 우리의 내면과 구별이 가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거울을 보는 게 너무나도 즐거워서 우리는 그게 거울이라는 점을 잊어버렸다. 즉, 우리의 몸이 영혼의 탈 것이라는 점을 쉬이 잊게 되는 것처럼, 거울을 보는 우리는 그것이 바깥에 자리한다는 점을 잊어버렸다. 공포영화 등에서 거울 속의 자신이 거울을 보는 자신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게 ‘공포’스럽게 묘사되는 것을 떠올려보라.


이 재미있는 사례는 우리의 안과 밖이 확실하게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해, 안과 밖에서 동일한 이미지가 생산되는 건 둘 사이에 동기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작업에 오류가 생긴다면 어떨까. 우리가 알다시피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할 때는 반드시 손실되는 에너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안에서 밖으로 이미지를 전송할 때 어떠한 패킷의 손실이 일어난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오늘날 단말기의 화면을 구성하는 디스플레이 패널 성능은 픽셀의 매칭 정확도에 따라 결정된다. 0과 1로 나뉜 디지털 신호가 개개의 픽셀을 어느 타이밍에 정확히 여닫는지에 따라 이미지의 선명도가 결정된다. 만약 디스플레이에 신호를 전송하는 과정이 어긋나게 되면 이미지의 품질은 급격하게 하락한다. 


우리의 눈에 비치는 세계가 눈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는 이미지의 손실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그에 수반해 손실을 상쇄하려는 반작용이 몸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다시금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종의 기원이란 인간이야말로 유일한 환경 개발자(Developer)임을 말해주었다. 그런데 이 증명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종의 분화를 보여준 것이지, 인간에 대한 증명을 곧바로 해낸 게 아니다. 예컨대 환경의 반대편에 인간이 있다. 환경이 보여주는 세계를 인간은 보정해서 받아들인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이미지의 역사에 잘 반영되어 있다. 으스스하고 기이했던 자연환경은 처음에 라스코 동굴벽화 같은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것은 숭배(Cult)의 대상이었다. 반면 오늘날에는 으스스하고 기이한 이미지를 인간이 만들어내고, 이것은 오컬트다.


이는 인간이 예전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환경을 바꿀 수 있기에 같은 이미지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 것이다. 즉, 이미지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 기원을 상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안과 밖의 간극을 상정하며 살아가기에 자체적으로 두 지역을 매칭해주어야 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 이미지는 얼마든지 산란되어 들어올 수 있으며, 그런 산란을 하나로 모아주는 게 프리즘의 기능이다. 그런데 오늘날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해짐으로써 이러한 기능이 다시금 분산되고 있다. 예를 들어, 미디어가 만들어낸 우리의 바깥은 현실세계와 모호한 경계를 갖는다. 스크린 안의 현실은 우리가 사는 곳과 동일한 무대이지만, 다른 공연을 상연중인 다른 시간대의 우주인 듯하다. 주변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도 스크린 안에서는 무척 자연스럽다. 


칸 영화제 7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그들 각자의 영화관>에서는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간극에 대한 여러 개인적인 체험이 나온다. 휴대폰으로 전송되는 영화도 있고, 흙바닥에 앉아서 보는 영화도 있다. 이들 모두가 영화에 대한 기원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영화는 세계의 위에 드러난 실재의 균열처럼 여겨졌지만 오늘날의 영화는 오히려 우리의 실재를 드러내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 처음으로 보여지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경험이 즐거운 것이 되어야만 하기에 이들은 늘 신선한 이야기를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이 신선한 이야기는 우리가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만든 게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킬 만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정말로 인간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바쟁은 영화가 예술의 한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영화를 그런 기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규정한 바 있다. 바쟁의 이 진단은 영화란 결국 예술의 일종이면서도 새로운 아종으로 파악되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그의 말처럼 기원과 기원 사이에 자리하는 것은 어떠한 변형을 수반하며, 이 변형의 과정을 자유로이 통제하는 게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코로나19에 대한 모종의 확신 같은 게 있었던 듯하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끝없이 변형하는 존재이지만, 이미 우리는 자연을 변형하며 살아왔기에 그 위에 얼마든지 올라탈 수 있다고 말이다. 영화가 최초의 발명 지역이 알려진 예술이듯이, 코로나19는 최초의 출몰 지역이 우리에게 알려진 바이러스다. 그래서 이 종의 기원은 코로나19가 왜 하나의 바깥이 아닌지를 말해준다.


코로나19는 전 세계를 뒤흔든 사건이었고, 심지어는 분위기이기도 했는데,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은 하나가 아니었다. 코로나19는 전 세계에 하나의 공통된 경험을 선사했지만, 이 경험은 각 나라의 현실과 일대일로 매칭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리가 기존에 알던 이미지를 완전히 흩트려 놓기도 했다. 즉 코로나19는 이미지의 세기에 우리가 보고 들었던 것들을 투과하는 프리즘과도 같았다. 서구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의외의 장소에서 희망이 발견되었다. 누군가는 이미지의 추락을 겪었고, 누군가는 이미지의 선명해짐을 겪었으며, 누군가는 자신이 바라보는 거울 안의 모습이 자기 생각과는 다르다는 점을 깨우쳤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 종의 기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점검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네트워크로 뭉쳐졌지만, 그게 우리의 끝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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