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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05. 2021

홍상수 영화의 실시간 혹은 테러리즘

문득 봉준호와 홍상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봉준호의 영화가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엿보는 형태를 취한다면, 홍상수의 영화는 무언가를 귀담아듣고 엿듣는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지면이 허락하는 한에서 짧게 설명해보고자 한다. 먼저 봉준호에 관해서다. 봉준호 영화의 <괴물>에서는 괴물의 한강대교를 들여다보고, 티브이 뉴스를 들여다보고, 하는 등의 모습이 나온다. <인플루엔자>는 아예 들여다보기를 컨셉으로 잡은 작품이며, <기생충>과 <박쥐>는 저택과 그 안의 인간들을 들여다보려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특히 <마더> 같은 경우는 아들은 엄마를, 엄마는 아들을 들여다보려 한다는 점에서 가족 이전의 고독한 개인을 조명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홍상수는 어떠한가. <해변의 여인>이나 <옥희의 영화> 같은 영화에서 여자들은 듣는 존재로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인들이 막연하게 듣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여인들은 반향정위를 위한 회절점이 된다. 쏘아보낸 소리가 다시금 자신에게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측정하여 사물의 위치를 짐작하는 이 감각은, 그녀들 스스로가 일종의 사물이자 대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작품 안에서 그녀들의 청취는 모든 정보가 모이고, 다시금 흘러나가는 집약점의 형태로 기능하는데, 이들은 이야기를 정직하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해석을 가미한다는 점에서 기계장치의 일종인 것이다.




내가 홍상수 영화를 반향정위의 세계로 보는 건 이것이 일종의 구조주의적 형태를 띠기 때문이 아니다. 홍상수 영화에는 시작의 지점이 없고 출발의 지점이 없다는 점이 그 이유이다.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어느샌가 왔다가 어느샌가 다시금 사라진다. 이 찰나의 감각은 현대적 의미로 보면 여행자처럼 보이기도, 근대적 감각으로 보면 노예라는 배제의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든 근대든 간에 우리는 이 둘을 합쳐볼 수 있을 테다: 여행자는 공간의 노예다. 여행자는 공간을 떠받들고 숭배하기에 그 무엇보다 비루해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 자유롭다.




이에 따르자면, 홍상수 영화에서 사물이자 대상인 그녀들을 기계장치로 생각하는 것에는 어떠한 의문 하나가 남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마따라 기계가 어떠한 기능을 하는 분절의 양식이라면, 그녀들은 별개의 주체이면서도 세계를 분절하는 기계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두고서 초, 분, 시 등을 별개로 보지 않듯이 홍상수 영화 속의 여인들도 내러티브 전체와 분리해 볼 수 없다. 여기서 떠오르는 건 사물과 대상으로서의 개인이다. 근래에 홍상수 영화의 주요 화자로 여성이 부각되고는 있지만, 이는 반향점으로서의 여성들과는 무관하다. 쉽게 말해 홍상수 영화에서 화자, 혹은 주체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고 대신 그/녀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주변인물이 훨씬 더 중요하다.




주변인물로 남자들이 나오면, 화자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기에 그 나름의 투명성을 획득한다. 주변인물로 여자들이 나오면, 화자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에 그 나름의 투명성을 획득한다. 같은 말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 전자가 망망대해를 떠도는 느낌이라면 후자는 끝없는 미끄러짐의 감각에 가깝다. 그렇게 보면 이들은 여행자의 한 부류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여행자에겐 공간에 대한 분절의 의식이 없다. 즉, 여행자는 공간-기계가 아닌 공간 그 자체를 본다. 그에겐 시작의 지점도 출발의 지점도 없기에, 우리는 이 주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게 된다. 여기서 하나의 추론이 가능해진다.




영화 밖의 우리는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지만, 영화 안에서 주체는 자신의 추후 행보를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생각하기에 홍상수 영화의 멜랑꼴리는 바로 이 단차에서 비롯된다. 영화 안의 세계가 이미 결정된 것만 같은 생각이 들 때, 인물의 행동은 일종의 영원회귀적 지점에 다다른다. 그러나 영화 밖의 우리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우리가 홍상수 영화를 어떠한 종류의 투명성으로 파악하든 간에, 결과적으로 이 영화와 우리의 현실은 예측과 불허의 지점으로 갈라서 버린다. 푸코에 따르면 여행자와 광인은 얼추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인물상인데, 차이가 있다면 여행자는 유토피아를 광인은 헤테로토피아를 거닌다는 점뿐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성공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직 실패만이 있다. 여행의 경험은 유토피아에 닿을 수 없기에 늘 실패로 끝나며, 광인의 경험은 헤테로토피아라는 외꺼풀을 뒤집어쓰기에 비참한 실패로 끝난다. 허나 문제는 그들 스스로가 이러한 실패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홍상수의 맥락으로 옮기자면 이것은 “살아간다”는 의식이다. 정답이라는 건 세계를 잘 흘러가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단어라서 우리가 정답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실패라는 건 세계에 어떤 파열과 균열, 단절이 일어났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라서 우리는 그걸 느낄 수밖에 없다. 좋은 유지보수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유지보수팀을 해고하면 어떤 일이 곧바로 생겨나고야 만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여행은 일종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 모던 사회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기원한 동물 상태로 되돌아가 세계가 찰나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역설적으로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해주었듯이, 동물적 인간들에게 전쟁이란 자신의 존재감을 세계에 뽐내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정짓는 반향적인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홍상수의 영화가 ‘듣는다’는 단어로 축약될 때 그건 마치 수동적인 태도, 폐쇄적인 무언가를 의미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공격적인 태세이다.




홍상수의 이 공격 태세가 일종의 추진력으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영화의 전진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영화를 자동기계로 보는 것, 홍상수의 세계를 우리 현실의 실재를 재현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홍상수의 영화는 봉준호의 ‘엿보기’에 더 가까운 게 되어버리고야 만다. 그러니까, 홍상수의 주체를 여행자로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우리였던 셈이다. 봉준호의 영화와는 달리, 홍상수의 영화는 들려오는 소문에 따라 작품 속의 이야기와 형태가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는 장소와 공간을 연구하는 확장된 영화 등의 고려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게 아니라, 서사와 담론의 층위로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담론은 서사와 연대기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홍상수의 영화는 그가 <풀잎들>에서 보여준 예측과 실패의 경험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어떤 현실이 예측되는 때가 있다면 그게 다시금 불허되는 실패의 경험을 우리는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홍상수의 영화는 구조주의를 벗어난다. 특히나 매체의 경계에 관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오늘날 많은 측면에서 매체의 경계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 중에 가장 무서운 건 근대를 액체성의 시대로 설정함으로써 미래 또한 으스스하고 기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바우만의 논의이다. 바우만의 책 『모두스 비벤디』에 붙은 한국어판 부제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근대의 지옥은 어떠한 형태로서, 오늘날에도 연대를 무시하고서 곧바로 나타난다.




유동하는 세계의 불확정성은 아인슈타인이 쏘아올린 꽃가루 분자 운동에서 출발해 양자역학의 세계로 이어진다. 우리는 그동안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에 대해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양자는 우리 세계를 표현하는 하나의 단어일 뿐 그 모든 걸 설명해주진 않는다.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단 하나 뿐일 것이다. 관측 전과 관측 후 모두를 믿을 수 없다면 그 사이의 상태만이 오로지 진리일 것이라고 말이다. 예컨대, 우리는 전의 시간도 후의 시간도 아닌 실시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시대는 플루서의 말마따라 비트를 조합하는 자가 이기는 조합게임이 강세를 보인다. 비트로 구성된 주체는 자기 폴리곤의 선명도를 높이거나 줄일 수 있으며, 이는 투명함의 일종이다.




이 이야기를 홍상수의 영화에 적용해보자면 다음처럼 소리내어 읽을 수 있다. 홍상수 영화에서 듣는다는 건 비트를 조합하는 조합게임이다. 그렇다면 이 비트를 만들어내는 추상게임의 주도자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주도자는, 주변인물들에 의해 간접적으로만 확인될 뿐 화면 상으로는 투명하게 보인다. 홍상수의 영화가 수상해지는 건 이 대목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세계를 추상화하고 있는가? 구조주의의 지지자들은 관객이 이런 역할을 주도하고 있다고 말할 테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가 우리 세계를 빠져나가는 실시간의 터널처럼 보이게 될 때 이 추상성은 비로소 이해된다. 홍상수 영화의 세계는 우리가 엿듣는 것으로 구성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제공한다.




너무 유명한 영화 속 장면이라서, 영화를 보지도 않았음에도 이미 본 것처럼 기억하는 일이 근래에 자주 일어난다. 이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스펙터클이 어떻게 기억의 일종으로 전환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세계는 본다는 것의 의미가 그 무엇보다 커져만 가는 중이지만, 반대로 엿듣기의 행위가 반강제적으로 자행되는 전쟁상황과도 같다. 전쟁에서 자행되는 수많은 침탈 행위는 강간, 수탈, 분할, 징병과 같은 비집어 들어오는 상황 속의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스트레스가 투명함의 일종으로 변모하는 게 바로 테러인 것이다. 말하자면 테러라는 건, 폭력의 상시화이자 투명화이다. 같은 맥락에서 홍상수의 영화는 일종의 테러리즘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의미에서의 투명성으로 풀이된다. 첫 번째는 자신의 몸을 볼 수 없음에 대한 투명함이다. 이는 루소가 말하는 자연 상태와도 같아서, 주체는 자신의 신체를 확인받고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하게 된다. 두 번째는 세상이 보이지 않음에 대한 투명함이다. 이는 오늘날의 가상세계가 그 무엇보다 드넓은 공간을 제공하지만 정작 고립된 자신을 제공해줄 뿐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루소의 동물적 인간이 자신이 소속된 무리를 만들고자 하는 것, 즉 강제로든 비강제로든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포스트 모던의 동물적 인간은 무리에 소속된 자신을 만들고자 한다. 홍상수의 영화가 들려오는 소문에 따라 자신의 형태를 결정한다는 건, 이런 뜻이다.




누군가는 홍상수의 영화를 테러리즘을 규정짓는 건 너무 거칠거나 생뚱맞은 제안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테러의 흐름을 따라간다는 건 기본적으로 대안이 없는 사회, 자유낙하의 중력을 바탕으로 하는 포스트 모던 사회의 이후 세계로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는 홍상수의 ‘영화’가 아니라 영화가 통과해가는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붕괴하고 있다는 건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안이지만, 나는 이것을 붕괴가 아니라 소실, 혹은 마모라는 단어로 표현해보고 싶다. 소실과 마모는 걸리적거리는 모난 지점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의 상태, 이를테면 조약돌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즉, 소진된 게 아니라 소진되어 가는 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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