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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25. 2021

당신의 잃어버린 일 년을 돌려드립니다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던 중의 일이다. 적당한 속도로 시내를 움직이는 이 이동수단에서 나는 바깥을 구경하고 있었다. 도로와 인접한 인도에는 여러 종류의 상가들이 있었는데, 현수막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당신의 잃어버린 일년을 돌려드립니다.” 정중앙에 적힌 이 문구는 정황상 코로나 이후의 일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주변에는 영어 학원 홍보 글귀가 있었고, 따라서 이 글은 자녀들을 걱정하는 학부모를 상대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공부에 지장이 있었고, 이에 따라 뒤처진 만큼의 공부를 해야만 남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이 문구는 보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정말로 잃어버렸을지에 관한 의문이다. 코로나는 우리의 지난 일년을 앗아간 것일까? 이 질문은 너무나도 추상적이다. 코로나로 인해 일을 못 하게 되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코로나로 인해 외출에 제약이 생겨서 생계유지가 곤란해졌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전자의 경우는 두 가지 사례를 들 수 있다. 단순히 일하기가 불편해진 건지, 아니면 일하는 게 불가능해진 것인지다. 이를테면 코로나로 인해 본격화된 재택근무의 도입은 생존에 관한 문제이기보다 일의 능률에 관한 문제에 더 가깝다. 사람들은 한자리에 머물 수 있는 특권을 잃어버린 것일 뿐, 유동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재택근무라는 것은 약간의 불편함을 제외하면, 아니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될 수도 있는 이른 현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코로나로 인해 제약이 생긴 여러 현장의 영업들, 음식점이나 노래방과 같은 곳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들에게 코로나는 직접적인 문제이고 따라서 금전의 상실, 그에 따른 정신적 피해가 확실하다. 그러니 이런 경우라면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충분히 사용 가능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경우조차도 잃어버렸다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심스레 말하자면, 잃어버렸다는 건 본래 가졌던 것을 상실함을 의미한다. 돈 문제에 관해서는 코로나가 그들의 수입을 잃어버리게 하지는 않았다. 원래부터 가졌던 돈은 아니었고 따라서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무언가 모호하다.



물론 잠재 고객을 차단했다는 점에서는 상실이라 볼 수 있겠지만, 여기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나는 경제학에 대해 잘 모르기에 이것이 잠재적 손실로 해석될 수 있는지, 따라서 잃어버림과 보상에 관한 문제로 읽힐 수 있는지는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미 확정된 수입과 앞으로 들어올 수 있는 수입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안다. 생계를 목적으로 자신의 미래에 투자하는 이들에게 투자한 만큼의 보상이 돌아온다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말 그대로 투자이기 때문이다. 금융기관에서 보장하는 오천만원 한도의 예금자보호 상품이 아니라면, 그 어떤 투자도 원금 손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말하자면 투자 행위에 대한 실패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자신이 예상했던 수익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상실감을 느낄 수 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마음 말이다. 생계 문제를 투자에 빗대어 설명하는 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니 화제를 바꾸어보려 한다. 위에서 언급한 영어 학원 현수막을 다시금 살펴보자. 이 광고는 학부모들을 상대로 그들의 자녀가 지난 일년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학부모들은 잃어버린 일년을 보상받기 위해 자녀들을 학원에 보내야 하며, 이를 통해 상실된 학습 진도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논리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투자의 논리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아이들에게는 앞으로 해야만 할 교육과정이 있겠지만, 이 교육과정은 앞으로 들어올 지식을 의미할 뿐, 아이들이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말해주진 않는다.



따라서 지난 일년을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틀렸다. 아이들은 원래 가져야 했던 것을 잃어버린 게 아니다. 만약 학부모들이 해당 문구에 반응한다면, 자신의 자녀가 원래 가져야 했던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일 테다. 그렇다면 원래 가져야 했던 것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평균적인 학습 수치일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교육과정에서 지정하는 학습진도가 있고, 여기서 뒤처지면 그들로서는 원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이기에 평균에 못 미치는 학습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자녀들이 가져야만 할 학습량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 아이들이 지식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투자 상품처럼 바라보는 일은 이상하다.



아이들에게서 회수해야 할 원금 같은 건 없다. 바꾸어 말하면, 아이들에게 투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사실 아이들을 일종의 투자 상품처럼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길을 가다 현수막을 보고, 그에 반응하는 학부모들에게는 아마도 그런 심리가 있었을 것이다. “내 아이는 (정해진 학습량을) 잃어버렸어!” 이 심리의 이상한 점은 교육을 정해진 원금이 없는 투자 상품처럼 생각한다는 사실에 있다. 정해진 진도를 다 나갔다는 말은 교육부의 교육과정을 통해 합리화되지만, 이는 강제적이라기보다 일종의 가이드라인에 더 가깝다. 그래서 진도에 뒤처지는 사람이 있다면 선행학습을 하는 이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도에 뒤처지거나 앞서 나가는 일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즉 교육의 문제는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으며 공부의 효율 또한 정해진 바 없다. 이러한 사실은 근래에 불거진 비트코인을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는데, 다음을 살펴보도록 하자. 비트코인에 투자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몇몇 이들의 성공 신화가 들려올 때, 이를 접한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는데 벼락거지가 되어버렸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들은 돈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돈을 잃어버렸기에 상실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본래라면 자신에게도 있어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상실감을 느낀다고 말하면 가장 처음으로 떠오르는 사람은 라깡이다.



자크 라깡은 세상의 모든 감정을 상실에 따른 반발로 생각했고, 이에 따라 남근은 무의식 항해의 상징적 기표가 되었다. 그렇게 보면 가상화폐라는 건 화폐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게 아니라, 가치가 화폐화된 게 아닐까? 고객을 보호해줄 원금보장제도가 없다는 점이 오히려 보장해야 할 원금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보장해야 할 원금이 있다는 생각으로 이 판에 뛰어들었고, 곧이어 이 생각은 말 그대로의 ‘가상화폐’로 이어졌다. 가상/화폐는 사물 교환 가치를 현실에 기반하지 않고서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문제는 역시나 가상일 것이다. 가상이 가치를 얻을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에 나오는 것과 같은 부류인 듯 보인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것들이 과연 현실에 기반한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같은 맥락으로 교육이 과연 현실에 기반한 가치인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한 번쯤은 의문을 품게 된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부모들은 학원에 아이를 보낸다. 정부에서 교과서도 발행한다. 그런데… 교육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게 이 문제의 맹점이다. 교육은 교육이라는 가치로서 세상에 유통되지만 교육 자체에 어떤 현실 작용이 있는 건 아니다(교육 잘 받은 이도 살인을 저지르곤 한다). 사람들은 교육과 능력을 일대일로 교환할 수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학원에 가지만, 사실 교육은 어떤 가치에 더 가깝다. 학원들은 학생의 가치를 평균화하여 우등반, 평균반, 열등반 등으로 나누어 차등 교육하는데 이는 S, A, B, C의 등급 순서가 아니라 상쇄와 갚아줌의 논리를 따라간다고 할 수 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일인분을 해낼 수 있느냐의 효용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를 부여하는 건 누구인가? 이를 국가, 회사, 부모 등으로 세분화해볼 수 있을 테다. 이러한 점은 누구나 발행 주체가 될 수 있는 가상화폐의 가치부여주권을 연상케 한다. 가상화폐의 가치부여주권은 표현과는 다르게 부여주체가 곧 가치가 되지 않는다. 주식이라면 회사가 곧 주식의 가치를 보증하는 것이겠지만, 가상화폐는 화폐의 신뢰를 사용자들 전체에 분산시킴으로써 부여주체와 가치주체가 달라진다. 이와 유사하게 교육의 문제에 있어 아이와 학부모 간의 관계는, 부여주체와 가치주체 간의 문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부모는 아이에게 가치를 부여할 주권이 있지만 이 행위가 곧 아이를 화폐로 만드는 건 아니다.



아이는 교육을 통해 자기만의 삶의 지평을 넓히고, 이러한 앎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신뢰된다. 이 견고한 보증 체계는 가상 화폐가 어떻게 투명성을 유지하는지와 동시에 아이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러니 현수막에 쓰였던 ‘잃어버린 것’이라는 말은 ‘갚아주어야 할 것’이 아니라 ‘되찾아야 할 것’으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평균에 못 미치는 삶에 대한 공포일 수도 있고, 또는 상실이 전제된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생성하여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 있는 주체로 만들고자 하는 회복의 움직임일 수도 있다. 흔히들 기호학에서 언표와 기표를 구분한다고들 하는데,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는 상실이라 쓰고 회복으로 읽어야 한다.



두 번째는 영화에서의 잃어버린 일 년에 관한 것이다. 버스 안에서 바라본 시내의 현수막 중에는 최현우 마술쇼의 홍보 플랜도 있었다. 현수막 가장자리에는 거리 두기를 준수한다는 내용이 걸려있었는데, 거리 두기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거리를 두는 일과 공동체가 되는 일은 공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안토니오 네그리가 말했던 다중을 떠올려볼 수 있을 테다. 다중은 서로 간에 다른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어떻게 하나의 목표에 몰두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들은 뭉치면 하나인데 흩어지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임이 틀림없다. 흩어져서 아무것도 아니라면, 서로가 하나의 목표를 갖는다는 점을 어떻게 확인하는 걸까?



인터넷을 통해 현실 사회의 움직임을 끌어내는 일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계속되고 있다. 카카오톡에서 유포되는 가짜뉴스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떠도는 여러 풍문도 사람들을 광장으로 내몬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성별도 나이도 가려진 채로, 그 뒤에 있는 게 단지 사람이라는 점만이 확실할 뿐인데 이들은 세상에 나온다. 하지만 시위가 끝나면 언제 있었느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지고서 다시금 인터넷에 나타난다. 이런 일은 오늘날 그렇게 이상한 풍경이 아니지만, 위에서 언급한 현수막이 홍보하던 게 마술쇼였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마술쇼를 보러 가면서 거리 두기를 실행하는 관객이라는 건, 어쩌면 영화관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영화라는 의미가 추상미술처럼 되어가는 오늘날에 보다 중요해지는 개념이 바로 영화관이다. 왜냐하면 영화가 상영되는 장소가 영화관이라고 가정할 경우, 영화를 무엇으로 규정하는지에 따라 우리 세계 전체가 극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극장이 만들어내는 환영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어떤 면에서는 실효성을 잃기도 했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극장의 환영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터넷으로도 영화를 볼 수 있는데 왜 굳이 어두컴컴한 장소를 고집하느냐는 식의 비판이 아니다. 말 그대로, 영화가 주는 환영에 취했던 이들을 지칭한다. 자신의 세계가 자의식에 의해 투영되고 있고 이를 통해 안락한, 객석의 쿠션에 누울 수 있다고 믿는 이들 말이다.



여기서는 다음 사례를 검토해보도록 하자. 최근 키노라이츠라는 영화 관련 서비스에서는 영화를 온라인으로 함께 보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넷플릭스 아이디를 가진 이들만 입장할 수 있고, 모니터 한편에는 사람들과 채팅할 수 있는 채팅방이 마련된 이 기획은 친구들을 한곳에 불러모아 웃고 떠들며 영화를 보던 감성을 재현하는 듯 보인다. 이 경우, 영화는 단순히 본다기보다 영화관에서 친구들과 함께한다는 쪽에 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영화를 같이 보는 건 어떠한가. 우리는 익명의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본다. 생판 모르는 이들이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다.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특정 장면에서의 반응을 녹화한 것을 한데 모아 영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물론 불특정 다수의 한자리 집합이라는 말은 전통적인 영화관의 시대에도 적용되는 것이지만, 온라인에서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어떤 장면에 대한 유튜버들의 반응이라는 제목으로 흔한 이 영상 문화는 영상물을 즐기는 개인으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모두가 얼추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려 하는 듯 보인다. 이런 동기화를 통해 이들 모두가 마치 한자리에 같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즉, 서로가 보는 영화는 정말로 다르다 해도 후처리를 통해 가상의 영화관을 세울 수 있게 된다. 거리를 둔 이들이 거리 두기를 하는 개인들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코로나 시대의 극장은 서로와 거리를 두어야만 한 곳에 입장할 수 있는 특수한 법칙을 현실화해버렸다.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후반부 장면은 코로나로 인해 배우들의 집단 촬영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개별 촬영분을 하나로 합성하여 완성되었다. 이들 촬영분에 접속할 수 있었던 건 잭 스나이더가 자신이 생각하는 궁극적 영화의 판본을 가진 덕택이었다. 이처럼 완전히 닫혀있던 과거의 영화관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입장 주소만 있다면 얼마든지 참가할 수 있다. 입장하거나 퇴장하면서 소리가 날까 조심스러워할 필요도 없고, 창만 여러 개를 켜두면 되므로 1관과 2관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편리성은 입장 주소를 탈취해 영상 송출을 방해하는 줌바밍(Zoombooming) 같은 일도 벌어지게 했는데, 이들의 심리는 흐름을 끊자는 점에서 송출에 대한 재밍이나 마찬가지다.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말했던 방송국 테러 사태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게 무슨 말인지를 잘 알 것이다. 그는 조현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범인의 뇌 속에서는 영화가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고 그는 이 영화를 현실에 구현할 요령으로 방송국에 뛰어들었다. 이 영화란 일종의 스펙타클에 해당한다. 거칠거칠해서 현실과는 괴리가 있고 또 그만한 파급력을 지닌 것,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에 불과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범인의 영화에 대한 생각은 현실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우리는 2001년에 영화에 대한 생각이 현실에 받아들여진 사례 하나를 알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수하들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줄곧 떠들어댔던 미국 침공을 현실에 구현했으며, 파급력은 엄청났다.



그 후로 미국 사회에서 아랍계, 혹은 그런 외모를 한 이들을 배격하는 움직임이 새로 생겨나 버렸다. 불특정 다수를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생각하는 일은 구분할 수 없는 공포를 만들어낸다. 이라크에 대한 영화 소탕 작전에서 미군들은 누가 테러리스트이고 민간인인지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사실상 마을 전체가 테러리스트 소굴이라고 보아도 좋을 지경이었고, 어떤 경우는 이게 현실이 되었다. 이때 우리는 나타났다가 사라짐을 반복하는, 하나의 영화를 기반으로 뭉치고 흩어지는 관객들이 바로 테러리스트임을 알게 된다. 이들에게 영화를 현실로 구현하는 일은 일종의 공동체적 참여에 가깝다. 그들은 세계에 구현되는 과정을 교란하는 재밍에 저항하면서까지 한자리에 모이게 될 테러리스트들이었다.



즉 이들에게 영화란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그런 환영을 붙잡아둘 현실 기반 매체였다. 이 현실 기반 매체는 이들이 영화를 꿈꿈에도 어디까지나 현실을 바탕으로 활동해야 함을 전제했고, 이는 실제로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영화 게릴라들은 현실이 아니라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행동한다. 가상현실에서 게릴라를 포착할 방법은 사실상 없지만, 다행히도 게릴라들은 전쟁에 있어서 침투전이 아니라 전격전을 수행한다. 한 사람이 여러 장소에 머물러 있을 수는 있는 세상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혼자서 은밀하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 대열을 이루어 깃발을 쟁취하는 일이다. 관객들은 거대극장에 숨어든 빨갱이가 아니라 혼자서 모든 것을 주도할 수 있는 작전세력이다.



현실에 기반해 영화를 보던 관객 개인은 사라졌지만 영화를 통해 소환될 수 있는 이들의 수는 점진적으로 늘어난다.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는 하나의 영화가 여러 곳에서 동시에 존재함을 보여주며, 영화를 보는 순간에 집중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어쩌면 이러한 일이야말로 지구화 시대에 점점 더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테러 현장을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 각자의 영화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테러를 일으키는 이들의 모습은 전지구화라는 하나의 풍경에도 개인의 사연이 담겨있음을 말해준다. 누군가는 맞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완전히 옳다는 착각이 이곳에선 빈번하다. 영화에 대한 믿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라는 이름의 신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모두가 하나의 영화를 보고 있지만 이들 개인마다 객석이 정해져 있고, 따라서 개인들은 자기 생각만을 온전히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개인이 극장을 소유하는 건 전통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비싼 금액이 들겠지만, 오늘날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영화 클립을 잘라 유튜브에 업로드하고, 또 장면을 캡처하여 블로그 포스팅에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서 어떤 영화들은 본래 맥락을 벗어나 완전히 웃긴 장면으로 망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이렇게 망쳐진 필름은 영화 물질 자체에 대한 저항의 퍼포먼스가 아니다. 이들은 각각의 단서들 자체를 팩트체크하지만 이를 통해 만들어진 거대 흐름 자체에는 아무런 의심의 눈초리도 보내지 않는다.



이들은 영화의 고전 시기로 돌아가 무엇이 영화인지를 묻는, 영화가 어떤 종류의 리듬들에 접속할 수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탐구한다. 여기서 핵심은 이 리듬들이 어쨌거나 영화는 멈추어져선 안 된다는 점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영화들이 계속해서 재생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일은 디지털 시네마 시대에 착오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감시 카메라와 몰래카메라가 성행하는 사회에서 기록이 중단된다는 건 곧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사라진다는 걸 뜻한다. 이에 따르자면, 영화들을 포기한다는 건 곧 현실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누구나 간편하게 세계의 영화, 그럴싸한 음모론이나 가짜뉴스를 선보일 수 있는 시대에 극장은 현실 기반 공동체가 된다.



이러한 영화 매체 대중화는 우리의 포스트 시네마가 어쩌면 시네마를 포스팅하는 일로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자아낸다. 영상과 사진을 편집하여 포스팅에 사용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영화 이미지의 유동화로부터 멀어지고, 또 그래서 자신이 이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소유되지 않는다. 미술관 벽에 걸려있고 스마트폰 안에서 재생되는 영화는 상영되는 게 아니라 대여되고 전시된다. 즉, 잠깐 동안만 우리에게 노출될 뿐 본체는 늘 자신을 숨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영화는 환영의 마법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공공연하게 자신을 허구로서 드러낸다. 이게 오히려 영화가 사람들을 현실 구석으로 몰아버리게 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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