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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02. 2021

우리에게 문제 제기를 허하라

*콜리그에 투고한 두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509033



1. 상상한다는 건 일탈한다는 것



시대적 한계 속에서는 시대를 넘어서는 생각을 하기란 힘들다. 인간 존재란 태어남으로써 사회에 소속됨을 전제하는데, 이에 따르자면 인간의 일생은 매 순간 사회 구조에 영향받는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 사회 안에서 태어난 우리가 사회의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조 바깥의 것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이나 구조 밖을 상상하는 능력도 자명하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상상하는 존재이며, 상상력이라는 건 말 그대로 상상하는 힘을 의미한다. 우리는 구조의 바깥을 잘 모르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기에 더 자유로이 상상할 수 있다. 구조가 우리를 제약하는 규칙인데, 구조의 바깥에는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즉 상상력이란 무규범의 힘이다.



‘만약’이라는 물음 하에 진행되는 여러 상상은 모든 콘텐츠의 기원이 된다. 적절한 상상력은 우리에게 쾌감을 주는데, 이는 평소라면 하지 못했던 일들을 대신 수행해주는 것에서 비롯된다. 허나 상상하는 힘의 무서운 점은 그 자유로움에 제약이 없다는 점이다. 규칙이 없는 장소에 풀려난 개인은 처음에 혼란스러워하지만, 이내 자신을 규약하는 장치나 제도가 없음을 인식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이 문제의 핵심은 이렇게 펼쳐놓은 상상이 현실로 넘어올 때라 할 수 있다. 무규범의 상태에서 기원한 것들이 규칙이 존재하는 현실에 들어올 때 우리의 현실은 이하의 두 가지 수모를 겪는다. 첫 번째를 먼저 말해보자면 무규범이 현실 규칙을 망쳐놓는 것을 바라만 보게 되는 경우이다.



무규범은 일종의 일탈이라 할 수 있는데, 현실 구조의 바깥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축제의 본래 의미가 무규범이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날이었음을 떠올려보라. 축제는 무료한 일상에서 큰 기쁨을 주는 기간이다. 축제는 일정 기간에 진행되며, 기간이 끝나면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규범이 현실 구조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이유가 이와 같다. 무규범은 일탈이고, 현실 구조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만약 이것이 현실 구조 안으로 들어올 때는 가지런히 정렬된 규칙들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새로운 규칙이 생겨날 것이며,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규칙 중에는 새롭게 쓰인 구조에서 일탈로 치부되는 것들도 있을 테다.



2. 일탈을 통해 문제 해결하기



당대에는 일탈이었는데 오늘날 돌아보면 일탈이 아닌 것들이 있다. 이는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여성의 투표권은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당연하다.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당연한 걸 옛날에는 몰랐을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러한 부류의 일들은 무규범이 규범의 자리를 성공적으로 쟁취한 올바른 사례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에 파생되는 두 번째 문제가 있다. 그건 바로, 우리가 무규범을 규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정 정도의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규칙이 있는 곳에서 작동하지 못하는 여러 이야기가 있고, 현실로 들여오는 과정에서 이런 것들을 적절히 타협해야만 하는데, 이 타협의 과정에서 마찰이 일어난다.



상상하는 건 자유지만, 이를 통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건 별개의 일이라 할 수 있다. 흔히들 우리가 하나의 사회를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하나의 규칙만이 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규칙이 있고, 정해진 선이 있다. 즉 우리 사회에는 정말로 많은 규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규칙을 부수어냄으로써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부수어진 규칙이 우리의 현실을 지탱하는 핵심 기둥일 때,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낀다.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약한 고리는 무너진다 한들 전체 사회에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핵심 기둥이라면 다르다. 다수와 연결된 핵심 고리가 무너질 때 현실 구조가 무너진다. 그리고 이내 바깥과 안쪽이 뒤섞이는 파국이 벌어진다.



무규범 상태에서 생겨나는 여러 힘이 우리의 구미를 자극하는 건 아주 분명한 사실이나, 우리가 바라고 되기를 욕망하던 것들이 현실 세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는 그것들이 사회 규칙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을 피해갈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들을 안전하게 현실로 들여올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쾌감 없는 책임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상력이란 현실 규칙을 위반함에서 비롯되는 쾌감인데, 그 말인즉슨 위반 없는 책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즉 상상력은 책임을 동반한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은 이 상상력을 통해 발전한다. 상상력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물어 우리의 현실을 모두와 공유하게 해준다.



3. ‘문제 해결’을 욕망하는 사회



상상력은 위반에 대한 욕망이다. 수잔 벅 모스는 『꿈의 세계와 파국』에서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상품사회의 번성은 대중 유토피아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주장에 따르자면, 상품은 우리의 꿈이 물질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를 기만하는 사이비 생산품이다. 그에 대한 증거로는 우리가 원하는 물건을 산다고 해서 욕망이 정말로 충족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물건 자체가 욕망인 것만 같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욕망할까? 상품을 판다는 건, 상품이 아니라 상품을 획득하는 자신의 모습을 판매하는 것과도 같다. 즉 우리는 그 꿈을 손아귀에 넣는 자신의 모습을 구매한다. 따라서 우리가 말한 상상력은 이 욕망의 범주에 든다고도 볼 수 있다.



상상력이란 현실 규칙을 위반하는 것에서 유발되는 쾌감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규칙을 위반함으로써 다시금 새로운 규칙이 생겨나기에 이런 위반에는 끝이 없다. 즉, 위반은 일종의 마약과도 같다. 무규범 상태에서 만들어진 욕망이 현실 사회로 넘어올 때, 욕망은 현실에 세워진 여러 규칙들을 쓰러트리면서 환각을 만들어낸다. 현실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강력한 주장은 바로 이 부분을 우려한 것이다. 현실과 상상력의 경계를 지켜주지 않으면 두 세계는 완전히 혼합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현실과 상상력 사이에 검문소를 설치했는데, 이게 바로 사상 검증이다. 사상 검증이란 불온한 사상을 지닌 이들을 미리 솎아내어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사상 검증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전 시기를 떠올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 벌어지는 여러 갈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냉전이 크고 조용한 전쟁이었다면, 오늘날은 작고 시끄러운 국지전이라 할 수 있다. 여자는 되고 남자는 안 되는 일,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되는 일 같은 건 이제 더는 없지만 여자는 여자고 남자는 남자라는 편 가르기는 여전히 존재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기편인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상대방과 대화를 시도하곤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은 어딘가 이상하다. 분명, 대화를 먼저 시도해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일 텐데도 이들은 사상 검증을 먼저 시도한다. 요컨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만을 안전하게 투과시키는 셈이다.



4.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기



그러므로 이들은 겁쟁이다. 이들은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이 현실로 넘어오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현실 사회에서 난민의 위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난민은 우리 영토의 바깥에 자리한 이들이고, 사회 규칙에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이며, 상상이 넘실대는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이들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충분히 있을 법하다고 생각하고, 법이 존재하는 현실에서도 법망 바깥에 자리하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걸 알지만, 정작 그들에 손을 내미는 건 부담스러워한다. 왜냐하면 난민을 받아들이는 일은 상상력과는 달리 쾌감에 대한 책임을 마땅히 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책임 없는 쾌감만을 원한다.



난민은 상품이 아니다. 난민은 골칫덩어리이자, 이물질 덩어리다. 사상 검증의 측면으로 볼 때 난민과 빨갱이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난민은 받아들여지길 원하는 존재지만 빨갱이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난민을 받아들일 때는 우리 사회에 잘 녹아들 수 있는지를 검사하지만, 빨갱이들에겐 무조건 사살이라는 원칙이 적용된다. 이들과의 소통은 불가능할뿐더러, 그냥 내버려두기엔 너무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빨갱이에 대한 무조건 척살을 외친다. 반면 난민들은 언어나 문화가 다르니 소통에 애로사항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냥 내버려두기엔 너무 가여운 존재들이다. 현실 사회의 바깥에 자리한 이들에게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 우리의 동정표를 산다.



소위 말하는 빨갱이 사냥은 위기가 닥쳐오기 전에 먼저 싹을 잘라낸다는 방어의식에 귀인한 것이었다. 각자의 체제는 항구적으로 유지되어야 했고, 이 안의 사람들 또한 큰 변동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오늘날에는 어차피 자본주의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기에, 경쟁을 생각하기보다는 세계의 멸망이나 소멸과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적극적으로 은폐하려 든다. 사회 구조를 은폐하면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우가 불합리하다는 걸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해진 왕도 같은 건 없다고 말하면서 능력만 좋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성공은 사회 구조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5.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가?



냉전 시기의 사상 검증이 현상유지를 위한 검열 정책이었다면, 오늘날의 사상 검증은 현재를 지속하려는 이들의 움직임에 가깝다. 오늘날의 사상 검증은 현재로서 영원하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대목에서는 현상유지와 현재 지속의 정의를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 현상유지가 단순히 자신들의 영토를 유지하려는 억제력의 논리를 따른다면, 현재를 지속하는 건 사회 구조가 불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가짐에 의한 것이다. 계급 이동이 불가능한 사회가 영원하기를, 부자에게 유리하고 약자에게는 불합리한 사회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다. 어쩌면 오늘날 칸트의 항구 평화론은 합의를 실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갈등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만 같다.



평화 유지에 필수적인 건 자신이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는 일이다. 냉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국과 소련 양측이 뒷 세계 공작들을 많이 했지만 양자가 그런 일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건 당했기에 갚아준다는 식의 논리구조다. 이 논리가 성립하려면 일차적으로 ‘당했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른다면 가해 사실은 없었던 게 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피해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게 아니라, 피해 사실만이 의도적으로 남아버린다면 이 피해는 대체 어디서 온 건가? 예를 들어, 오늘날의 외과수술은 절개의 흔적을 최소화한다. 흉터가 남지 않으면 수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힘들다. 즉, 피부 피해가 은폐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술 흔적을 숨기고 싶어하는데, 전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적군에 대한 미사일 타격은 최대한 소리소문없이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자신이 그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로 하여금 알기 힘들게끔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이 은밀한 행위들은 피해의 흔적을 최소화하려는 가해 측의 움직임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누가 가해자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 사회는 전쟁의 위협에 찌든 피로 사회가 된다. 이런 식의 평화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거짓 평화는 우리를 현혹하는 상품과도 같다. 상품 사회의 스펙터클이 위반에 대한 욕망을 무한히 자극하듯이, 피해를 은폐하는 공작은 항구적인 평화를 담보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우리를 갉아먹는 사이비 체제다.



6. 문제가 되는 것들을 문제가 되게끔 하라



피해 사실을 주장할 때 사람들은 피해자가 된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당한 것인지의 경계가 모호할 때, 피해 사실 자체도 덩달아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현실과 상상력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둘 사이에 간극이 남지 않게 되면 피해 사실은 영구적으로 각인되어린다. 이 경우, 파편화된 마음이 이곳의 폐허에 영원토록 잔존한다. 물론 가하는 쪽보다 당하는 쪽이 자기 형태의 변형을 겪을 확률이 더 높기에, 우리는 가해자보다 피해자의 편에 서기를 선호한다. 피해자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누구라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그런데 피해 사실은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현실과 상상력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오늘날 우리는 여러 스펙터클을 마주한다. 이런 과잉 속에서 우리의 감정은 분열되고 파편화된다.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을 넘어야 한다. 현실에 상상이 깃들어있음을 알지 못하도록 은폐하는 이들로부터 상상을 탈환하여, 현실에 변화를 불러올 요령을 담아 상상의 힘인 상상력을 실천해야만 한다. 하지만 무규범의 상태로 들어가자는 건 아니다. 상상을 꺼내오기 위해 무규범 지대로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경계가 해체되고 현실과 상상력이 혼합되면 이곳은 폐허가 되는데, 이곳의 잔해들은 그들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 가치 있어진다. 오늘날의 폼페이가 그러하듯이 폐허에 남은 것들은 언제까지나 폐허일 뿐이기에 되려 살아있는 것들보다 더 장수한다. 그러므로 굵직한 기둥들을 솔선수범해서 붕괴시켜버리는 편이 좋다. 우리는 어서 이곳을 폐허로 망쳐놓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겪는 여러 갈등은 삶의 터전을 폐허로 만들고 있지만, 이들이 하는 행동은 현실을 망쳐놓기보다는 기억해야 할 것들을 영구적으로 각인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말하듯이 폐허의 영광은 “자신을 응시하고 수축하며 소유”하려는 이들의 궁극적인 수렴점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니 우리는 역사는 균일한 시간을 공유한다고 말하면서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같은 선상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세 개의 시간을 같은 자리에 두어야만 비로소 시간의 간극을 해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전혀 사실이 아닐 것 같은 것들도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상상력은 이해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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