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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04. 2021

세계는 단 한 번의 폭발로 끝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된다. 문장을 정확히 고쳐 적자면, 방점은 ‘살다 보면’이라는 곳에 찍혀있다. 무언가를 마주하는지 아닌지는 우리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살아가기를 포기할 수는 없으므로, 이러한 마주침에 관해서는 필연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마도 다음과 같다. 이들을 어떻게 대할지와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전자의 경우는 이해되지 않는 것에 다가서는 일을, 후자의 경우는 이해되지 않는 자신을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에 의문을 표할 사람이 있을 듯하다. 이해되지 않는 건 ‘저것’인데 왜 나를 포용해야 하지? 하고 말이다.



d몬의 웹툰 <브랜든>은 어느 날 갑자기 외계인들 세상으로 넘어가게 된 남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우화에서 핵심은 인간의 기준을 무엇으로 정의하는지다. 만약 우리가 돼지들의 나라에 가게 된다면, 그리고 우리 눈에 돼지로 보이는 것들이 우리를 두고서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돼지가 되지 못하는 우리는 돼지보다 못한 것이 되는 걸까. 예컨대 인권이라는 말이 만약 생명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권리라면, 그 앞에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에 관해서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너무 당연하게 인간을 택해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우화는 인종차별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논해졌지만, 생물학의 틀을 벗어남으로써 점점 더 철학에 가까워지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나치의 골상학은 생물학이었지만 그에 파생된 우생학은 철학에 더 가까웠다. 이들은 생물적으로 설명이 안 되면 철학으로 자리를 옮겨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생물학을 벗어나 철학에 가까워진다는 건 서로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깃덩어리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치는 우생학을 통해 그들 자신이 유대인들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포용이 아니라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절차에 불과했다. 이들에겐 이미 유대인은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이 있었기에, 단지 그들이 발견한 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이들에겐 이미 세계가 하나의 결론이었고, 그것 이외의 대안 같은 건 없었다.



따라서 제대로 생각한다는 건, 그것 이외의 대안은 없다는 걸 의미한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사회적 동의에 달려있다. 사람들은 지구가 동그랗다는 걸 제대로 된 지식으로 여기지 지구평평설을 정론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만약 지구평평설을 진지하게 논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걸 두고서 대안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지구가 동그랗다는 것 이외의 대안은 없는 세상에서 이미 지구는 하나의 결론이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우리가 무엇이 진리인지를 이미 기준 삼고 있다는 점에서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무엇이 ‘제대로’인지를 우리는 확신할 수 있을까?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제대로란 ‘본래 상태 그대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무엇이 과연 본래 상태인가?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제대로’란 것은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사회적 기준, 혹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는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기준이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인간 취급받지 못하고, 이에 따라 월급을 적게 줘도 상관없게 된다. 인격적으로는 말이다. 이런 일이라면 그래도 법이라는 안전장치가 인권을 명확하게 하고 있지만, 장치 밖에서 작동하는 여러 사회적 규율들에 관해서는 어떤 판단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20세기 이후로 물질과 사회가 점점 분화됨으로써 우리가 속한 곳은 단순히 하나에만 불과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 당신은 회사원이자 커뮤니티 회원이자 동호회 소속이기도 하다.



제대로의 기준은 사회마다 각각 다르다. 따라서 여러 사회를 다니는 이들이라면 무엇이 제대로인지에 대해 고민이 들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소속되었다고 느끼는 주류집단이 있고, 다른 사회에 대한 평가는 주류집단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이는 오타가 아니다). 물론 과거와는 다르게 주류집단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오늘날 주류집단은 준거집단과는 다르다. 자신이 소속되어있다고 해서 무조건 주류가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직장에 다닌다고 해서 직장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한국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게 된 현실이 바로 오늘날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서는 자신이 주류 사회와는 거리를 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자신이 주류 사회와는 거리가 있다고 말하고 다니는 이들에게는 힙스터적 면모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냉소주의가 더 만연해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처럼 “허위된 계몽의식”은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믿게 한다. 하지만 무엇이 제대로 된 것인지에 관해서는 정작 토론이 오가지 않는다. 이들은 어차피 결론나지 않을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이들이 좀 더 늘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하나의 세계를 두고서 일종의 땅따먹기를 행하는데, 종전 없이 휴전만이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차라리 분단을 고민하게 된다.



요즘 젊은 세대는 북한과의 통일보다는 차라리 분단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들 말처럼 하나의 세계를 두고 싸우기보다는 차라리 제 갈 길을 가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어 보인다. 이것은 마치 이세계 장르처럼 하는 행동이나 문화는 비슷한데 종족이나 국가가 다른 곳을 상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이세계를 두고서 그럴듯하게 꾸며놓은 허위세계에 몰입하는 게 이해가 안 간다고 비판하지만, 디즈니랜드의 운영교리가 ‘현실 세계에 가장 완벽한 꿈을 데려다준다’는 것이듯이, 이세계에 열광하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어딘가에는 낙원이 있으리라고 믿는 도로시의 경우가 더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낙원이라는 건 없는 것이기에 상상되는 반면, 이세계는 바로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폴 그린그래스의 제이슨 본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기억을 잃은 채 현실에 떨어진다. 그는 자신이 출중한 실력의 요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사실 출생의 비밀을 깨닫는 고전적 스토리의 변주에 불과하다. 그러나 출생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것은 우리들 세상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현실도피의 창구를 원하는 이들은 만화적으로 트럭을 만들어냈고, 종교적으로는 내세를 만들어냈으며, 문화적으로는 재배치를 만들어냈다. 현실에서는 도로시와 같은 마법은 벌어지지 않지만 오히려 그보다 마법에 더 가까운 일이 자주 일어나곤 한다. 이를테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무한히 달려야만 하는 게임 말이다. 이상한 나라에서 붉은 여왕은 다음처럼 말한다. “더 빠르게 달려! 그래야만 살 수 있어!”



가속주의 사회에서 결말이라는 건 결코 다가오지 않을 미래처럼 여겨진다. 무엇을 상상하든 우리는 제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만 같다. 계속 달리는데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제정신을 논한다면 상식이란 무엇인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무엇을 기준 삼아 생각해야 하는지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세상은 이세계가 된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장소에 재배치되어버리고 기억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환상에 젖어 살기,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둘 중 무엇을 택해도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 마치 트롤리 딜레마처럼 우리는 모두가 행복할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마크 피셔는 “세계는 한 번의 대폭발로 끝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세계는 단 한 번의 폭발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멸망은 단 한 번의 폭발만으로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전자를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후자를 생각하면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 번만 맞아도 힘든데 얼마나 더 맞아야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물론 이는 죽음을 원하는 이들의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 한 번의 폭발을 견뎌내는 일이 쉽다는 건 아니다. 우리는 내외적으로 테러를 마주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테러는 인위적으로 일으킨 재난이라는 점에서 예측의 성격이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 견디기 힘든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힘을 믿는다면, 인간의 힘에 배신당하는 일은 더욱 절망스럽다.



<진격의 거인> 만화 전체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인간의 힘을 믿는 쪽과 인간의 힘을 배신하는 쪽이 갈리는 분기점, 3기 마지막의 해변에서 나누는 대화이다. 아르민이 바다를 보며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는 반면, 에렌은 “바다 너머에 적이 있다”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이 장면의 숨겨진 진의는 아르민 또한 거인 능력자 베르톨트를 먹었기에 바다 너머에 적이 있다는 걸 아는 상태였다는 점이다. 물론 당시로써는 기억을 되찾지 못했던 수도 있지만, 하나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의 판단 기준을 내세우는 일이 낳은 앞으로의 파국을 생각해보면 이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혐오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계는 결코 멸망에 이르지 않겠지만, 혐오는 결코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많았다거나 하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싶지 않다. 또는 이상한 나라의 붉은 여왕처럼 “더 빨리 가속해!”라며 지옥을 횡단하자고 제안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가 폐허를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이다. 폐허는 결코 실패를 의미하는 장소가 아니고, 반대로 과거의 영광을 담고 있는 미래의존적 장소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이 해변에서는 에렌과 아르민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둘 다 냉소주의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땅고르기가 아무것도 솎아내지 못하는 만신창이일 뿐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는 일을 더 경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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