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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9. 2021

화폐왕자와 웃지 않는 시바견

*콜리그에 투고한 세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519336




묘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어느 시바견 한 마리를 본 적 있는가? 이른바 ‘시바 멍뭉이(Shibe doge)’라고 불리는 이 인터넷 밈은 특유의 새침함 덕분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인터넷 밈을 끌어와 만들어진 가상화폐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바로 ‘멍뭉코인(doge coin)’이다.


우리가 멍뭉코인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많겠지만, 그런 말 중에 가장 중요한 건 아마도 다음과 같다. 이것이 단순한 놀음이 아니라 ‘도박놀음’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일런 머스크의 말 한마디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코인 시세를 두고서 도박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말은, 멍뭉코인이 일런 머스크 한 사람에 의해 보증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가상화폐는 화폐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사람 한 명이 화폐 전체의 신뢰성을 보증해주지는 못할 텐데 말이다. 그러니 이를 먼저 살펴보자.


첫 번째. 기본적으로 화폐란, 이를 통해 무언가를 수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통해 교환가치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과는 달리 멍뭉코인에는 아무런 수행의 기대감이 없고, 오직 ‘재미’와 ‘그냥’ 만으로 돌아가기에 신성한 코인판을 ‘도박’이라는 오명에 몰아넣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단순히 재미를 추구하는 것만이 도지 코인의 존재의의일까? 현재까지는 그런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째 의의를 누락했다. 그건 바로, 이것이 ‘가상(Virtual)’이라는 점이다.


왜 이런 짓을 하죠? “그냥! 재밌으니까!”


일런 머스크는 지속적으로 멍뭉코인에 대한 기대감을 불어넣었고, 이는 한낱 ‘코인쪼가리’에 불과하던 멍뭉코인의 가치를 훌쩍 띄워 놓았다. (갑부긴 하지만) 일개 개인에 불과한 이의 말 한마디에 가치가 오락가락 한다는 점에서 이 코인의 신용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다. 그런데 여기서 신용(Credit)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게 무언가를 맡기고, 그에 보증을 세운다는 점을 의미한다면 멍뭉코인은 애초에 신용성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멍뭉코인은 ‘가상’화폐이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가상의 3번째 정의는 다음과 같다. “겉으로 나타나 있는 덧없고 헛된 현실 세계.” 가상에 대한 이 정의는 가상이라는 말이 적어도 두 개의 함의를 내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1) 가상이란 현실이 있어야만 성립하는 개념이라는 점. 2) 가상이란 덧없고 헛되고 겉보기에만 불과하다는 점이다. 요컨대 가상이란 어디까지나 현실을 위해 예비된 세계로써, 거짓되고 허위된 곳이므로 오래도록 머무를 공간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가상’ 화폐에 신용이 있을 리가 없다. 이곳은 현실을 보증해주지 않으며, 우리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살아가기에 가상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니 가상화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용이라는 말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과연 무엇이 사람들을 모험을 떠나게 하는가? 모험가들의 탐사욕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말이 가상화폐 전체에 적용될 수 없기에 멍뭉코인이라는 예시를 들었지만, 적어도 모험이라는 말에 한에서는 “그냥! 재밌으니까!”라는 대답이 정말로 정직하다. 1914년 어니스트 섀클턴이 남극탐험원정대를 모집했을 때, 모집 포스터에는 현실적인 보수와 그럴싸한 홍보문구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여정에 동참하기를 원했으며 결과적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장난이 아닌데도 말이다. 비슷한 이야기로, 일런 머스크의 화성탐사대 홍보는 SNS 상에서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다. 화성행 편도 티켓이라는 이 홍보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돌아올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화성에 거주한다는 이상향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홍보를 보고서 혹한 이들은 현실을 저버리고 화성이라는 가상(현재로서는 정말로 그렇게 느껴지는)에만 몰두한 것일까? 남극탐험과 화성 이주는 적어도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말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별다를 바가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둘 다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라는 점이고 하지만 당시로서는 아니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 홍보 문구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험을 떠나게 하는 것이었으며 무언가 신용을 담보하지는 않았다.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사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


물론 화성탐사대에 응모한 이들 모두가 진지한 마음인 것은 아니었을 테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에 존재하는 많은 선례를 알고 있기에 이를 그냥 간과할 수만은 없다. 황금의 땅 엘도라도에 대한 환상은 실존하는 장소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오리라는 기대감, 어디를 가든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이들을 환상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가상화폐에서의 ‘가상’이라는 건 마치 아름다운 가상인 듯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우리가 밟는 길에 끝이 존재한다는 믿음, 역사적 변화에 획득 가능한 목적인이 있고 미래의 어느 날, (…)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사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환상”을 품었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현실은 장밋빛 미래를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고, 이에 따라 아름다운 미래를 추구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미래는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미래가 현실에 다가오는 순간 미래는 현실 안에서 더럽혀지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아름다운 가상이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였다면, 화폐에서 아름다운 가상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라 할 수 있다. 가상화폐 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2017년을 떠올려보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는 마치 흘러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의 자리를 치환하는 듯 보였는데, 이에 따르자면 흘러간 과거는 곧 그들의 미래로 부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 반대방향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다가올 미래는 곧 흘러간 과거라는 사실 말이다. 트럼프의 이 문구는 (실망감을 기대감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기대감이 실망감 때문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상화폐 붐 또한 그러하다. 가상화폐에 대한 기대감은 현실에 대한 실망감의 정확한 반례이다.


2차 가상화폐 붐이 시작된 2020년으로 돌아와 보자.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질병이 세계를 휩쓸자 우리 세계에 감춰져 있던 질병들이 겉으로 부상했다: 가짜뉴스에 시달리던 이들은 오히려 가짜뉴스로 인해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가짜뉴스의 부상은 오히려 우리가 진실을 더 잘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가짜들에 지친 나머지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다. 이런 사실은 재미에 대한 극도의 추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17년에 우리는 딥페이크 기술이 사람들을 홀리고 미워하게 만들 것을 우려했지만, 2021년의 우리는 딥페이크 기술이 우스꽝스러운 노래 부르기 영상 등에 적용되는 것을 보며 낄낄댄다. ‘다메다메’ 영상을 보면서 그 누구도 ‘안돼’를 외치지 않는 이 모습은 어딘지 모를 불안감을 남기기도 하는데, 이들이 돌려주는 대답은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기술을 악용하는 사람이 나쁜 것이지 기술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니, 뻔한 비판 말고 다른 쪽으로 접근해보자. 딥페이크는 어쩌다가 재미 추구의 산물이 되었을까? 일런 머스크가 구수한 사투리를 쓰고 온갖 유명인들이 외국어 노래에 입을 맞추는 이 영상들은 무지성적으로 생겨난다. 이것들은 마치 생산자 공급 우유처럼 목장에서 소비자로 직접 전달된다. 플랫폼을 거치지 않아도 모두가 발언대에 오를 수 있는 오늘날에 영향력이란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의 영향력은 전파력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 점이 코로나바이러스와 디지털 간의 유사점이다. 미투 시대의 가능성이 발언의 자유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떠올려보자. 트위터와 같은 동조 네트워크의 설립, 혹은 청와대 청원 게시판 등지에서는 “나도 고발합니다.”라는 내용의 발언이 이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발언할 수 있는 자유 자체보다, 이 발언 행위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질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다는 점이다. 이 전파력은 단순히 상대방의 처지에 공감한다는 바이러스의 침투력만이 아니라, 사람들 간에 밀집되어 있고 또 청결을 게을리한다는 감염에 취약한 환경 때문에 강력해졌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군체의식과 무지성 개인


온라인상에서 사람들은 많은 타인을 만나고 그들과 의견을 교류한다. 이 교류는 시간과 때를 가리지 않아서, 감염의 가능성만 있다면 얼마든지 OK다. 요컨대 그 무엇보다 삭막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따듯한 장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따듯한 장소는 바이러스가 살기 좋으며, 따스함에 마음을 주는 이들은 이내 몸조차도 내주게 된다: 디지털 스팸이 이메일과 휴대폰 문자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살포된다면, 디지털 바이러스는 유머를 모아놓는 게시판들에, 인스타그램이나 카카오톡과 같은 SNS를 통해 재미의 형태로 은밀히 잠입해온다. 유튜브 영상들은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현상을 부추기며,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한다.


재미는 행복의 가치가 아니다. 바로 그렇기에 행복하지 않은 이들이 재미를 추구한다. 가상화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코인판에 뛰어들지 않는 게 바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는 자신이 돈이 없고 불안해서 코인을 한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이 아름다운 가상은 각자의 눈에 다른 환영으로 비쳐진다. 누군가에게는 페라리, 누군가에게는 그래픽카드, 누군가에게는 노후자금 등. 생각해보건대, 이들의 불안이 미래에 대한 아름다움으로 포장된다는 점에서는 달콤한 치료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바이러스는 오히려 달콤함 안에서 증식한다. 날이 덥고, 당분이 많고, 개체끼리 밀집된 공간에서 유병률이 높아지는 건 필연이 아니던가?


현실세계에서는 나이 들고 병든 이들이 ‘한물간’ 것처럼 여겨지지만 가상공간에서는 얼마든지 시대의 우상이 될 수 있다. 현실에서 바이러스는 서로를 밀어내고 미워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지만, 인터넷에서 바이러스란 ‘나이지만 내가 아닌 것’들을 만들어내는 강한 전파력의 상징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며, 그리하여 다른 이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것도 보다 쉽게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공감의 행위가 필터링을 거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두가 한마음이라는 건 다른 마음을 지닌 이가 끼어들 틈새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합하는 것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비판을 제기할 이가 없다면 안에 고인 물은 쉽게 썩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 시대에 가능해진 쉬운 공감은 현실에서의 흑사병에 대입된다. 바이러스가 몰고 간 자리에는 그 어떤 생명도 남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감력을 행사하는 파도타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사이버 쓰나미 피해 현장만이 남을 뿐이다. 이른바 사이버불링이라 불리는 이 폭력행위는 나와 다른 타자를 짓밟고, 내가 속한 집단을 본격적으로 치켜세우려고 든다. 그리고 이 집단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우리 세계를 집어 삼켜버린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은 비판적 사고가 불가능한 무지성 상태가 되어버리며, 다른 이들을 손쉽게 미워하게 된다.


‘좋아요’가 아니라 ‘싫어요’라는 말이 더 쉽게 된 현실에서 우리는 취향을 잃게 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잊고서 다른 이들의 공감만을 무지성적으로 추구할 때, 그 중심에 선 자신은 사라진다. 중심이 사라지고나면 하나의 거대한 군집만이 남으며, 이는 군체의식(Hive mind)에 다름없다. 군체의식은 하나이지만 집단이기도 한 자신을 만들어내기에, 집단에 대한 공격은 곧 자신에 대한 공격이 된다. 즉 우리는 집단에 동조하게 되며, 그 안에서 개인으로서의 입지는 상실하고야 만다. 마치 픽셀이 모여 만들어진 토렌트 파일처럼, 모두가 모여있을 때는 무언가를 보여주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오직 멀리서 보아야만 비로소 하나의 실행 가능한 파일이 되는 것이다.


예스터데이 원스 모어


멀리서 본다는 것, 이른바 거리두기를 한다는 것. 이들은 자신이 타인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에 별다른 입장을 찾지 못한 채, ‘그냥’이라던가 혹은 ‘재밌으니까’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건, 서로가 정말로 밉다는 사실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다.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아름다운 가상이라면, 이에 실망한 이들은 가상에 깊은 혐오감을 내비친다. 서로에 대한 생각은 진정 잊은 채, ‘그것’을 전혀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가상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세상이 봉쇄되자 사람들은 자신을 막아두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실재의 구름은 걷혔다. 이윽고 실재에서 빠져나오자 그곳엔 <매트릭스>의 저항군들이 당신을 맞이하게 위해 서 있다. 이들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실은 아프다.” 다른 한편,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들의 가치는 하나둘씩 널뛰기한다. 믿음주들의 가치는 재무제표가 아니라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환상에 그 뿌리를 둔다. 그러니 사실 이들의 참된 가치는 ‘그냥’이라거나 ‘재밌으니까’라는 말로만은 설명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살고 싶으니까”가 더 옳은 표현은 아닐까?


다가올 미래가 정말로 우리 스스로 쟁취한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세계는 아름다운 가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 아름다운 미래에 대해서 “현실을 보는 눈을 가린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생겨났다. 이에 따르자면 현실이 더럽고 추악하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이들은 사기꾼에 불과하다. “어른이 되려면, 현실이 더럽고 추악하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어른 제국의 역습>).” 그런 점에서 가상화폐의 가치는 곧 불안의 척도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오래전의 튤립 파동이 그러했듯이 사람들의 불안감이 곧 돈이 된다. 살기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환상은 지금 이 순간이 불안한 경우에만 발동되는 함정이고, 그래서 가상화폐는 불안을 보증 삼아 작동한다.


까마귀가 배를 떨어트렸다고 의심하는 게 바보 같은 일이듯이, 가상화폐의 등락에 어떤 믿음의 가치를 보내는 건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불안을 느끼는 모든 이들이 믿음을 보여주는 건 아니기에, 세상은 여전히 불안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불안에 아무런 근본이 없는 것처럼 재미 또한 아무런 근본이 없다. 그러니 멍뭉코인이 일런 머스크라는 한 사람에 의해서만 좌지우지되는 건 아니다. 멍뭉코인은 서로에 대한 신뢰 네트워크를 통해 작동하는 가상화폐라기보다, 당신도 불안에 떨고 있느냐고 묻는 불안 네트워크를 통해 작동하는 가상에 더 가깝다. 결국 가상화폐 붐은 이 불안의 터널을 빠져나올 때야 비로소 끝날 것이다.



Somewhere Over the doge co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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