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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6. 2021

해변과 최후의 인간에 관한 단상


질 들뢰즈는 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바 있다. “의식은 자신을 구성하는 삼중의 환상, 즉 목적성의 환상, 자유의 환상, 신학적 환상과 분리 불가능하다.”(『스피노자의 철학』, 민음사, 2001, pp.35-36) 생각해보건대 들뢰즈의 이 말은 그가 차이와 반복에서 지적했던 해변의 모습을 지시하는 듯하다. 먼저, 해변은 무한히 뻗어 나가는 지평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장소에서 우리는 하늘과 구분되지 않는 바다, 그리고 이 중간을 나누는 지평선의 존재를 보게 된다. 즉 이곳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비교적 뚜렷하게 목격되면서도, 그 끝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이전과 이후, 시작과 끝을 마주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시간(Jetztzeit)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를 줄곧 나누면서도, 이러한 시간이 언젠가는 끝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해변은 우리의 시간선에서 늘 최전선에 위치한다. 


바꾸어 말해 해변의 감각은 지금 시간의 감각이다. 해변에서는 바다 너머로부터 몰려오는 것을 피해 달아나는 일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더 도망칠 곳은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후퇴하거나 혹은 버텨내거나 둘 중 하나만이 가능하다. 그렇게 보면 왜 해변이 늘 절망적인 상황에서 탈출구로 제시되는지를 알 수 있다. 해변은 지리학적으로 대륙의 가장자리에 해당하며, 이에 따라 대륙에서 탈출하려면 해변으로 가야만 한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때 해변은 항구라는 측면에서 다른 곳으로 오가는 통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상륙 작전의 경우처럼 저지하는 힘과 분쇄하는 힘이 부딪히는 격론장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후자를 살펴보는 일도 흥미롭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건 전자의 경우다. 해변이 무언가를 저지하는 장소가 된다면, 그 ‘무언가’란 과연 무엇인가? 


아마도 우리가 해변에서 마주하는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미래, 혹은 지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는 해일과 폭풍과 같은 것일 테다. 이는 실질적인 현상일 수도 있고, 은유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해변의 인물들이 더는 도망갈 구석이 없는 절박한 처지에 내몰렸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요컨대 이들은 절멸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해변은 완전한 단절인 바다와 등을 맞대고 있는 최후의 저지선이다. 다시 말해서 해변은 단절에 대한 최후의 저지선이며, 해변을 통해 이전과 이후가 나뉘게 된다는 것은 이후를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해변을 통해 나가는 것들은 이후의 너머로 넘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보았을 때, 해변에서 바다와 등을 맞대고 있는 이들은 용기가 없는 게 아니라 단절에 저항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단절에 대한 저항이란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행위 자체가 이곳에 해변이 있음을 고착화한다. 달리 말해서, 단절을 넘어서려면 이러한 이전과 이후의 개념들을 횡단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횡단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그에 대한 해답은 아마도 폭발에 있을 듯하다. 우리가 대표적인 단절로 꼽는 하늘에서 카이로스와 이카로스라는 두 개의 개념이 생겨났음을 떠올려보자. 카이로스란 우리가 흔히 일순간이라 부르는 찰나의 감각을, 이카로스란 단절을 넘어서려는 이가 창공을 향해 항해했던 소멸의 감각을 의미한다. 알다시피 이카로스의 항해는 단절을 넘어서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단절의 과정을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절에 저항하는 것이 곧 횡단이라는 단서 하나를 얻게 된다. 


단절에 저항하는 일이 곧 횡단이라는 말은 단절 안을 걷는 이들의 모습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디디 위베르만의 어둠 속의 걷는 사내는 이에 대한 좋은 사례 중 하나다. 위베르만은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기’라는 미명 하에 어둠 속을 걷는다는 감각을 설정한다. 그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지만, 이곳에서도 반딧불이 살아남았다고 말하면서 반딧불의 잔존은 어둠 속을 걷는 이가 아니라면 볼 수 없는 풍경임을 지적한다. 위베르만이 이를 통해 지적하는 건 어둠 속에서도 우리가 시각을 포기하지 않는 것, 즉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바라보는 행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건 특수한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게 아니다. 불가능함을 가능함으로 바꾸는 것은 부정함을 부정함으로써 시작과 끝의 개념을 없애는 일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곳에서는 연대기라는 신화적 힘을 발휘하는 영웅 같은 게 없고, 이에 따라 동시대의 배경에 자리하던 인민들이 전면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위베르만의 해변은 고독하지 않다. 위베르만의 해변에는 절멸을 피해 온 인민들이 난민의 형태로 모여있다. 그리고 이 난민들은 그들이 마주하는 게 바로 대폭발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안을 횡단하고자 앞으로 나아간다. 난민이 그리 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은 이를 통해 증명된다. 누군가는 난민의 이 선택이 절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조치였음을 지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 횡단은 역사가 단절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새로운 천사를 무찌른다는 점에서 용감하다. 벤야민은 기관차에 제동이 걸리는 파국의 순간에 천사가 찾아온다고 말했지만, 이들은 천사가 가로막아선 폭풍에의 항해에 더 매료된다.


우주왕복선의 사례에서 우주비행사가 중력에 짓눌려 정신을 잃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단절의 순간인 피크노렙시(picnolepsie)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기본적으로 횡단은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 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주어지는 피크노렙시의 순간이란 카이로스적 시간에 다름 아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단절의 순간이 곧 절멸의 순간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확실히, 어둠 속을 헤쳐나가는 일은 거대한 단절을 동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다면, 이 단절을 헤쳐나가 또 다른 대륙에 도착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비릴리오가 피크노렙시의 조건으로 말했던 무한에 가까운 시간, 즉 시간의 소멸이라는 대목에 반론을 제기해야만 한다. 빠르게 가속하면 단절에 가까울 정도로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지만, 우리의 모험은 이러한 소멸점 너머로 향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이 바다를 건너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바다에 넘실대는 파도가 의미하는 것은 시간의 소멸이 아니다. 들뢰즈가 말했듯이 일종의 영원처럼 보이는 이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이 있음을 깨우치게 한다. 즉 어둠이 절멸에 대입되듯이, 지평 너머의 대폭발은 우리가 대륙을 등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넘어가야 할 구역이다. 따라서 폭발은 변화의 국면이라 할 수 있다. 이 변화의 국면에서는 낡은 것이 사라졌지만 아직 새로운 것이 오지는 않았기에 일시적인 혼란이 도래하는데, 이때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임으로써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 생겨날 수 있다. 이때 이후에 생겨난 것이 이전의 것과 유사해 보이더라도, 그건 완전히 분해되었다가 재구축된 것이므로 이전과의 연속성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즉 폭발을 중심으로 세계는 개변한다.  


폭발은 필연적으로 이전과의 단절을 수반한다. 즉 폭발은 하나의 연속된 흐름을 끊음으로써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경계를 만든다. 하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처럼 보인다 해도, 이전 세계에 있는 것들과 이후 세계에 있는 것들은 서로 다른 시간선에 있다. 그러나 이 경계는 변증법을 전제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경계는 해체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 폭발을 횡단함으로써 우리는 이전과 이후 모두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선을 횡단하여 모든 시간대에서 하나의 자신으로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해변에 선 최후의 인간들의 모습을 절멸이라는 말로만 읽어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포기해 자신을 비운 최후의 인간은 절멸 앞에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바다를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이주하고자 마음먹은 소진된 인간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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