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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8. 2021

재난 유토피아와 이대남 현상

재난 중에 달성한 유토피아는 어쩌면 미래에는 평상시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지난 2021.06.24일자로 KBS 뉴스가 보도한 “KBS 세대인식 집중조사”을 보며 떠올리게 된 하나의 생각이 있다. 그건 바로 능력과 경쟁 간의 상관관계다. 네 개의 파트로 이루어진 보도 중 세 번째 파트는 “‘이대남’‘이대녀’론의 실체”을 다루는데, 이곳에서 20대 남성들은 예외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튀어 보였다. 공정이라는 단어를 주축으로 배치된 세 번째 파트에서 ‘공정’은 우리가 알던 뜻과 거리가 멀어 보였고, 어떤 면에서는 진화론적 세계관에 귀인한다는 느낌이 더 컸다. 경쟁에서 패배한 유전자가 도태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멸’하지 않으려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진화론의 논리에 따르자면 환경에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 것이므로 약육강식이라는 의미에서의 경쟁이라는 단어는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공정이라는 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걸까? 일반적으로 경쟁을 공정하게 해야 좋은 승부가 된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았던가? 육상 경주 트랙에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출발선 이 더 앞쪽에 배치되는 것처럼 말이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개인적인 경험 하나를 고백하자면, 나는 대학원 관련 커뮤니티에서 인문계열 전공을 해봐야 취업이 안 되는데 왜 굳이 인문계 대학원에 진학하느냐는 비아냥 섞인 글을 본 적이 있다. 인문계 전공자인 나로서는 기분이 나빴지만, 인터넷에 흔히 있는 글이라서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사건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상기한 커뮤니티와는 다른 곳에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던 나는 은연중에 내가 기분이 상했던 바로 그 말을 이미 나의 것으로 내재화해버렸다는 점을 발견했다. “들어간 자원만큼 미래를 돌려받는다는 확신이 없어서 불안하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게시물에는 당신의 고충을 이해하지만, 그런 생각은 열정을 지니고서 대학원에 진학한 인문계 전공자들을 비하하는 것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댓글을 보며 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고, 무엇이 나를 패배주의에 찌들게 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논리의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인문계 대학원은 이공계 대학원처럼 랩실에서 힘들게 근무하지 않는다. 즉 노력을 그만큼 하지 않는 것이므로, 인문계 대학원생은 이공계 대학원생보다 더 나은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 생각은 같은 양의 노력을 들이지 않았으므로 결과물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존 경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 경험은 실제로 20대 남성에 해당하는 나에게 ‘이대남’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만약 이대남들이 공정을 중요시한다면, 무엇이 공정이란 말인가? 여기서는 이런 생각이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패배주의에 찌들었다면, 그 이유는 공정하게 경쟁했음에도 우리가 졌다는 것, 말하자면 노력이 그만큼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는 자기 비관 때문이라고 말이다. 즉 여기서 공정이라는 말은 생존 자체를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철저히 따른 결과물인 듯 보인다. 좋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구원론적 믿음이 아니라, 노력해야 미래가 도래한다는 진화론적 믿음 말이다. 사실 진화론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테다. 하지만 이것이 “노력한 만큼 받아야겠어”라는, 힘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가져간다는 능력주의의 소산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적자생존과 능력주의는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뜻을 지녔다. 적자생존은 환경에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것이고,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라 돌아가는 게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적자생존을 능력주의와 착각한다는 점에 있다. 강하기에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만이 있을 뿐이라는 진화론의 가르침을 무한 경쟁 속의 강자들과 연결지어버린 셈이다. 


살아남은 이들이 모두 강자라는 생각은 언뜻 보았을 때 진화론의 가르침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능력을 지닌 이들만이 살아남았다고 가정할 때는, 그러한 능력을 초과 달성함으로써 더 많은 생존을 거머쥘 수 있다는 생각 또한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는 노력의 결과가 곧 생존이라는 하나의 결론만이 아닌, 그러한 생존에도 가치가 있고 등급이 있으며 상위 계급은 하위 계급에 명령할 수 있다는 계급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생존에도 등급이라는 게 존재할까? 재난 상황의 생존자들을 두고서 다시금 생존의 위계질서를 세우는 일은 정말로 이상해 보인다. 정직하게 접근하자면 우리는 재난 상황의 생존자들이 서로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재난 상황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 구조와 규범이 무너짐으로써 오직 생존만이 최우선시되기 때문이다. 이곳은 죽은 자와 산 자라는 두 개의 상태밖에 없으며, 산 사람들은 재난을 겪고 나서도 살아남은 구조와 규범들을 바탕으로 죽은 것들을 보완해야 한다. 이를테면 식량 공급 구조가 무너졌을 때, 재료를 구해와 음식을 요리하여 그것을 공동체에 배분하는 일 등이 그렇다.  


그렇다면 경쟁의 무대를 재난 상황으로 파악하는 것은 합당한가? 일반적으로 재난이라는 말은 일종의 예외상태에 해당하므로, 규칙을 가지고 경쟁하는 상황을 두고서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건 무리인 듯 보인다. 하지만 편법을 사용하여 규칙 너머에서 군림하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 이들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다수의 사람이 이를 비겁하다 여기지만 소수의 몇몇은 그것조차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법 테두리 안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는 반면, 한편으로는 그러한 구조를 횡단하여 공정이라는 틀을 벗어나는 이들도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같은 보도에 실린 전문가의 인터뷰는 이대남들에게 공정이라는 단어가 “생존”의 뜻을 지닌다고 말했다. 다른 세대가 공정이라는 말을 결과의 평등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이대남들은 기회의 평등으로 생각한다고 말이다. 이에 따르자면 결과의 평등이란 재난 상황에서 살아남았다는 공동체 의식으로, 기회의 평등이란 재난으로 인해 초기화된 삶의 터전에서는 삶의 경주를 재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풀이된다. 즉 기회의 평등은 일종의 리부팅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다. 


세상을 리부팅하자고 주장하는 일은 테러리스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기력한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이세계로 전이된다거나 하는 식의 만화를 보고 나면 이 이야기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갑작스레 삶의 터전에서 벗어나게 된 주인공이지만, 원래 있던 곳에 남겨둔 가족이나 친구 같은 건 전혀 걱정하지 않는 모양새다. 오히려 그는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발견하고서 현실 세계에서 느껴보지 못한 성취감과 인연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야기만 놓고 보았을 때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둘이 아닌 통칭 ‘이세계 전이물’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리처드 로티의 말마따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라는 점이다. 먼저 이들은 우연한 기회에 리부트된 세상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여러 아이러니한 상황을 겪으며 이전 세계에서의 자기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파티원이나 마을 주민들과 연대함으로써 이 모험에서 자신을 지지해줄 공동체가 있음을 몸소 느낀다. 즉 현실 세계에서 재난이 벌어진 이후에 생성되는 공동체가 바로 이세계에서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해, 현실 세계에서는 재난이 아직 끝나지 않았거나, 혹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재난 공동체의 형성은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둘 중에서는 전자를 살펴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난 공동체의 형성이 불가능함을 말하는 일은 재난 공동체라는 게 가능한지, 말하자면 재난 유토피아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을 바탕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영원의 재난이란 재난의 종결 지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즉 예외 상태의 영구적 존립을 의미한다. 그래서 항구적 재난은 예외 상태에서 정상 상태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동반하는데, 이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이들은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재난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걸까? 방법은 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지 않았던 테러리스트의 길이다. 세상을 리부팅하는 이세계물에서는 개인이 다른 세상으로 가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현실 자체를 전복하는 일만이 가능하다. 예컨대 미완의 재난을 더 크고 확실한 재난에 처하게 함으로써 재난의 종결 지점을 인위적으로 확보하고, 그 위에 다시금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자 한다. 이때,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이들에게 재난 공동체의 형성, 혹은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 개인주의라고 볼 수도 있겠고, 혹은 이기주의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일의 배경에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팍팍한 생존경쟁이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생각은 젊은 세대가 가상화폐를 계급 상승의 수단으로 바라본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얼핏 보았을 때 오르는 것과 내리는 것에 아무런 지표가 없는 가상화폐는 공정이라는 말과 무관해 보이는데, 이것이 순전히 운으로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운 좋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몇몇 이들과의 경쟁이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정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금수저를 공격할 것이라면, 운에 따라 수익이 결정되는 가상화폐에도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했다. 운은 공정의 지표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생존의 관점에서 이를 바라보면 맥락은 달라진다.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말하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노력이 ‘도전권’으로 치환된다. 노력을 많이 한 만큼 도전권을 얻고 나서, 이 도전권을 통해 던전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던전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고 나면 랜덤한 종류의 보상이 주어진다. 여기서 핵심은 던전을 클리어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 랜덤하다는 점인데, 이는 곧 ‘노력’의 결괏값이 평등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력을 많이 해서 도전권을 많이 얻으면 그만큼 재도전을 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얻은 기회 중에 한번이라도 대박이 터지면 그만이다. 이것이 바로 젊은 세대가 말하는 공정의 정체이다. 


이제 우리는 재난과 공정이 연결되는 지점을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다. 재난 상황은 살아남았다는 잔존의 감각을 통해 재난 유토피아라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를 믿지 않는 이들에겐 다시 한번 재난을 일으킴으로써 생존의 경주를 재시동하려는 마음이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히 살아남았다는 운명론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모종의 숙명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행보를 이기주의라고 칭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진화론에서 말하는 생존이란 이기심에 의한 게 아닌, 그냥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멸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결과의 평등을 말하는 이들이 잔존에 중점을 둔다면, 기회의 평등을 말하는 이들은 절멸에 중점을 둔다. 잔존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함께 버텨냈다는 공동체 의식이지만, 절멸에서 중요한 건 현재가 끝나지 않는다는 영원의 의식이다. 따라서 이 영원 속에서는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회귀’의 시도가 줄곧 이루어진다. 즉 이들이 테러리즘을 지지하는 건 어차피 현재가 끝나지 않고, 세계가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무한시동의 의식에 사로잡혀있어서다. 그때마다 모두가 제로로부터 시작한다면 개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며, 행여나 실패하더라도 다시금 세계를 제로로 되돌린다면 기회는 한 번 더 주어지는 게 되니 말이다. 


노력한 만큼 같은 결괏값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한 만큼 많은 도전권을 얻어야 한다고 이들은 믿는다. 이에 따라 노력이라는 단어는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 도전할 수 있는 입장권을 가리키는 게 된다. 따라서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 노력이라는 단어를 두고 이견이 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닌데, 기성세대가 말하는 노력의 가치가 일종의 임무 완수 보상에 해당한다면, 젊은 세대에게 노력의 가치란 단순히 입장권에 불과할 뿐 아늑하고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젊은 세대가 소위 말하는 금수저들에게 불평등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입장권을 쌓아두고 게임에 도전하는 것은 무한한 기회, 즉 “나올 때까지 뽑으면 된다”라는 소모전의 양상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점을 뜻한다. 도전권으로 ‘재도전’을 하기에는 물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가 없는 젊은 세대는 이러한 소모전에서 밀릴 수밖에 없으며, 이에 던전에 입장 제한을 둠으로써 최대한 자신들의 도전기회를 확보하려 든다. 하지만 이 입장 제한조차 사람들을 자세하게 나눌 수는 없기에 공정에서 배제되는 이들이 생겨나고, 이는 보편적인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그런 평균에 못 미치므로 얼마든지 도태되어도 된다는 논리를 형성하며, 평균에 못 미치는 사람과 같은 ‘도전의 기회’를 얻는 게 창피하다는 말로 이어진다. 


물론 이러한 제한에도 한계는 있다. 던전에 입장할 때 어떤 장비를 구비하는지까지를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떤 모험가는 무자본으로 시작하지만, 어떤 모험가는 현금을 투자하여 고급 장비와 상급 물약을 들고 온다. “믿을 건 자신뿐”이라는 개인주의의 논리는 바꾸어 말해 “자신을 강화하는 것만이 곧 생존의 지름길”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던전에 입장제한이 있는 경우에는 파티원을 뽑기보다 그냥 혼자 도전해서 던전을 완수하는 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동료 없이 혼자서 다니는 일이 외롭거나 힘들지는 않을까?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도전할 기회만 주어진다면, 던전에서 얼마든지 더 좋은 아이템을 뽑아 그러한 과금러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이는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게 된다. 이는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결합의 불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 더 가깝다. 어떤 면에서는 노력으로만 금수저를 물리쳤다는 쾌감이 있을뿐더러, 더 나아가면 그 금수저조차 결과는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통쾌하다. 던전에 도전한 결과물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던전에 도전하여 임무를 완수했다 하더라도 어떤 아이템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 바로 공정인 것이다. 예컨대 이는 무자본이든 금수저든 간에 얼마든지 계급이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다는 점, 다시 말해서 이들은 출발선이 다를 뿐 결말 지점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금수저가 경주에서 승리한다면? 이들은 금수저를 끌어내리며 재경기를 재촉할 테다. 자신이 이기면 공정한 경주이지만 금수저가 이기면 불공정한 경주가 되는 셈이다. 명백히 모순되는 이 심리에는 노력에도 가치가 있다는 바로 그 말을 전제로 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사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대학생들이 모인 에브리타임이라는 커뮤니티에서 나왔던 말이다. 익명의 유저는 “유튜버들은 공부도 열심히 안 했는데 저렇게 돈을 쓸어담는 것은 불공정한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리고 댓글란에는 “지금은 유튜브의 시대이며, 오히려 개인의 능력에 대한 평가가 성적이나 집안 같은 수치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답변이 달렸다. 이윽고 이 게시물은 극단으로 치달아 BJ 철구가 버는 돈과 대학병원 의사가 버는 돈의 가치는 같으냐는 말로 이어졌다. 이때, 극단주의자들의 논리는 아무리 성공했다 한들 그 사람들 간에도 노력의 우위가 있으며, 유튜버들의 노력과 성적 우등생들의 노력이 다르기에 그들의 생존 또한 달리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유튜브는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공정한 것이 아닐까? 공부라는 것은 사는 곳과 지역, 혹은 성장 환경 등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지만 유튜브는 재벌부터 꼬마 아이까지 모두 제로부터 시작하지 않던가? 즉 출발선이 같지 않은가? 그래서 이는 굉장한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누구나 유튜브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러한 노력에는 최소한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말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어온 우리에게 정말로 이상하게 들린다. 


이 문제는 잘 나가던 유튜버나 연예인들이 네티즌들에 의해 과거가 파헤쳐진 후 몰락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유튜버들이 콘텐츠를 잘 만드는 만큼 그들의 성공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그러한 성공은 타인에 대한 착취나 학교 폭락 논란과 같은 배경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국회에서 새로운 취임자들의 배경을 조사하여, 이 인사배치가 합당한지를 따져 묻는 공청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정직이 곧 생명이라는 정치의 가르침이 말해주는 것은, 좋은 결과만 내면 그만이라는 능력주의 사회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게 아니었던가? 말하자면 자질에 대한 검증이 공정사회로 가는 관문이라고 가정할 때, 이 자질을 두고서 능력이 아닌 평균에 초점을 맞출 때는 평균에 못 미치는 이들을 끌어내리고자 하는 파멸의 움직임으로 이어지고야 만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는 무엇을 평균으로 규정할 것인지다. 일반적으로 평균이라는 말은 어떠한 것을 1부터 100까지를 줄 세워 보았을 때 정 중앙에 자리하는 값을 의미한다. 그 말인즉슨 여태까지 나온 표본들에서만 데이터값을 추출해야 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어떠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능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여태까지 마주했던 것들 안에서 선별되고 계산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한번도 마주해보지 못한 재난을 마주하게 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해나갈 최소한의 자질이란 어떤 것일까? 


만약 노력에도 등급이 있다면, 평균이라는 말에는 큰 의미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노력을 수치화하여 데이터로 산출해내는 게 평균인 것에 반해, 그러한 노력에 자체적으로 등급이 있다면 노력을 수치화하는 일 또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력과 생존에 등급을 매기는 일은 평균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와 모순되는 주장임이 틀림없다. 평균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의 노력이 같다는 점을 전제한다. 모든 사람의 노력이 같지 않다면 평균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평균이라는 말은 정중앙의 중립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을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질을 뜻하는 게 된다. 평균이라는 말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공정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 이를 통해 확인된다. 2021년의 한국에서 공정이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재난 사태를 헤쳐나갈, 예외적으로 특출난 누군가의 등장을 기대하는 것만 같다. 이때의 공정이란 재능이나 출신이라는 말보다 무자본이라는 말에 더 가까우며, 그러나 정말로 무자본 상태에서 시작할 수는 없다는 점이 이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런 이유로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는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만이 정사가 되어버린다. 


말하자면 검을 뽑는 자가 곧 용사가 된다는 아서왕 신화처럼, 누구든지 영웅이 될 수 있지만, 막상 검을 뽑은 자가 자신들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면 가차 없이 반대 의사를 표한다. 그래서 선출자는 자신이 뽑힌 이유를 사람들에게 증명하려 드는데, 이것은 일종의 ‘후불제’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보통 물건을 구매할 때는 재화를 먼저 지불하고 물건을 나중에 가져오지만, 후불제 선출에서는 일단은 물건을 써보고 난 후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재화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는 긴급함에 대한 호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정치성과 윤리성 사이를 저울질하며 무엇이 더 옳은지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라면, 정치를 위해서는 윤리성을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도 무리는 아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긴급한 상황이더라도 윤리성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정치를 희생시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비재난 상황인 평시에도 통용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서 백신이 장기간의 임상검증 없이도 곧바로 사용하도록 조치된 것처럼, 어느 정도의 부작용은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 모두들 동의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 대가가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왜 유독 이대남들의 통계만 개인주의에 치중해 있는지까지는 알기 힘들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이러한 개인주의가 공동체에 무언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발현된 게 사실이라면, 이들이 생각하는 공동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여태까지 논해본 내용을 보면, 그것은 운명론적 공동체가 아니라 숙명론적 공동체에 더 가까워 보인다. 우리가 같은 멸망의 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믿음이 희망의 연대가 아니라 절망의 연쇄로 발현되는 집단 말이다. 그렇다면 절망을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해볼 수 있다. 누군가가 “우리가 모두 힘을 합쳐 이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할 때, 다른 누군가는 “좋았던 시절은 끝났다.”고 말하면서 도래할 날보다 가버린 날을 상상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버린 날을 묻어두고 도래할 날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지난 과거사를 두고서 무턱대고 화해를 종용하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나는 공정하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정이라는 말이 허구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공정이라는 말이 허구라고 해서 공정에 대한 희망이나 정의조차 저버릴 필요는 없다. 만약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공정해질 수 없다면, 더 높은 등급의 노력이나 재능을 가진 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은 어떨까. 애초에 모두가 같을 수 없다면, 같지 않은 책임의 총량을 지니고 살아감으로써 우리 사회는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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