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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30. 2021

주인공은 없다

*콜리그에 투고한 네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533564







근래에 여성을 다루는 글을 읽을 때마다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단어를 자주 마주하곤 한다. 손희정이 이 단어를 최초로 다룬 건 2015년 동명의 논문인데,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건 2017년 동명의 저서가 출판되고 난 이후이다. 이 책에서 그는 2015년을 전후로 한국 여성계의 페미니즘 조류가 바뀌었음을 지적하면서 상황을 ‘리부팅’한다는 의미로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래서인지 이를 마주하면서 가장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리부팅에 관한 의문이다. 이전과 이후를 리부팅이라는 단어 하나로 딱 잘라 구분하는 일은 가능할까?



사실 이 물음은 가장 근본적인 것이어서 페미니즘 리부트가 다루는 내용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으레 마주하곤 하는 시대에 관한 의식들은 그런 의문을 남긴다. “동시대(Contemporary)를 살아가는 우리”라고 말할 때, 동시대라는 건 과연 무엇일까. 조선 시대 사람과 현대 한국 사람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으리라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현대 한국 사람 사이에서도 거리감은 있다. 소위 세대론이라고 불리는 갈라치기는 사람들 사이의 ‘동시대’를 계속해서 뒤집어 놓는다. 이 과정에서 동시대라는 말은 동년배라는 편한 단어가 되어 우리의 일상에 깃든다. “내 동년배들은 이 사안에 대해 그렇게 생각 안하던데?”라는 말을 하면 다른 누군가는 “아닌데? 내가 아는 동년배들은 그렇지 않던데?”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연대기(Chronicle)와 연대(年代)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자가 일종의 서사가 담긴 시간이라면, 후자는 그냥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다.



우리가 소위 세대론이라고 말하는 건 전자에 해당하는데, 바꾸어 말해 이는 사람들의 삶을 알지 못하면 이 이야기 속에 깊이 이입할 수 없다는 걸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이 이야기가 ‘횡단’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오디세이아와 겐지 모노가타리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대기는 그 안에 다양한 주제들을 내포하며 그것들을 하나로 묶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연대기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중심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대개 주인공의 몫으로 남는다. 한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며 보여주는 다양한 면모, 그리고 그가 겪는 다양한 사건들이 연대기의 주된 흐름을 구성한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연대를 횡단함으로써 자기만의 연대기를 쓴다.



사실 주인공이라는 말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이라는 뜻을 내포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한 가지 모순되는 지점이 생겨난다.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는 점 말이다.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면 이 시대에 주인공은 하나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주인공 같은 것은 없다. 이때,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론이 존재한다: ‘주인공’의 죽음은 거대한 이야기가 불가능한 시대인 탓도 있지만,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써가는 사회가 도래한 탓도 있다. 여기서 전자는 영웅을 필두로 한 세계관의 형성으로, 후자는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에세이 장르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둘을 한 자리에 놓고 보면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비관적인 감정 하나를 보게 된다. 그건 바로,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말과 “주인공은 없다”라는 말이 다르게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



오디세이아 같은 연대기 안에서 주인공은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다. 반면 삼국지와 같은 연대 안에서 주인공은 난립한다. 이때, 둘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 연대기에서 주인공은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 절대로 죽지 않는 반면, 연대 안에서 주인공은 얼마든지 중도에 하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연대는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서브’ 주인공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두의 이목을 한눈에 받는 전자의 경우가 더 좋아 보인다. 그러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말은 단순한 비관론이 아니다. 주인공이 죽을 수 없다는 말은 그 중간에 일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게 아니던가? 말하자면,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움직여야만 하는 게 바로 주인공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움직인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생이 너무 험난해서 삶을 그만두고 싶어하는 이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싫증을 느낄 테다. 그래서 그는 인생에서 어떤 경로로든 하차하고 싶어 하지만, 이야기는 그에게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도록 지시하고, 또 기대한다. 연대기라는 말의 무서운 점은 바로 이렇게 중도하차를 불허한다는 점이다. 즉 연대기는 사람들에게 주인공이 되기를 강요하는데,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으므로 그들은 좌절한다.



이와 정확히 반대되는 게 바로 연대이다. 연대기가 개인의 시간을 필두로 쓰인 이야기라면, 연대란 사회의 시간 안에 내포된 이야기다. 따라서 모든 개인이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는 가정하에, 연대기는 연대 안에 내포된 개념이다. 예컨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주인공은 없다”는 단어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애초에 주인공이라는 게 없으므로 모순덩어리인 문장이 되어버린다. 연대 안의 주인공은 연대기를 쓸 수 없으며, 개인으로서는 죽을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지만 시대 안에서는 얼마든지 죽은 상태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도 있다. 연대기와 연대는 서로 시간을 지칭하지만, 이 둘을 이어주는 것은 바로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물론 주인공은 없다면서 둘 사이를 이어주는 게 주인공이라는 말은 모순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주인공의 ‘부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빗금 처진 상태로 읽어야 한다. <기생충>의 포스터에 나온 모자이크처럼, 빗금은 있는 것을 삭제하지 않고서도 우리 현실에서 배제하는 효과가 있다. 오늘날의 주인공도 현실에서는 삭제되지 않았지만 현실에서는 배제된 채로 우리 곁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 없다는 말은, 사회 뉴스 1면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의 주인공이 비단 화면 속의 이야기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우리가 티브이 속의 어떤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사건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사건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그들이 사회를 이끄는 신화적 인물은 아니더라도,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개인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죽는 게 나 자신일 수도 있으며, 그렇게 생각하면 티브이 속의 죽음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게 된다. 더군다나 이들은 사회 안에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나가던 주인공이 아니던가? 바꾸어 말해, 타인의 이야기가 좌절되는 일은 경쟁자의 제거가 아니라 근본적 승리자가 없다는 ‘주인공이란 없다’의 현상이 아니던가?



이때 근본적 승리자가 없다는 말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은 자명하다. 승리 없이 패배만이 남았다는 게 아니라, ‘살아남았다’는 잔존(Survive)의 감각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주저앉는 모습을 보면, ‘잘 살아간다’라는 말의 기준은 성공하는 게 아니라 패배를 피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패배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을뿐더러, 생존의 감각 속에서는 무언가를 이겨내는 것 자체가 곧 성공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인공이 없다는 절망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희망을 내포한다. 그래서 티브이 매체 등에 나오는 주인공이 패배할 때마다 우리는 희망을 느낀다. 사회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유명인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끌어내리고 싶어한다. 그들이 패배하는 것을 보며 근본적 ‘주인공’은 없다는 점을 떠올리고, 이를 통해 오늘 하루를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



타인의 불행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일은 잘못됐다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주인공은 없다”는 단어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손희정이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지적한 것은 희생제의였다. 연대기에서 신탁을 받은 주인공은 신들의 제물이 되어 하늘로 바쳐질지 아닐지를 자기 손으로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대개 신성하며, 파멸하더라도 그 자신의 손에 의한 것이기에 동정표를 사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티브이 안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누군가를 위해 바쳐지는 제물이 아니다. 이미 신이 오래전에 죽어버린 상황에서 제물은 “너는 파멸할 것이다”라는 예언으로만 생각된다. 따라서 오늘날 티브이에 보도되는 제물의 형태는 ‘주인공이 없다’는 사회에서 바로 그런 빗금에 의해 살해당한 주인공의 모습을 한다.



잔존의 사회에서는 살아남은 사람이 승리자지만, 그 누구도 승리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살아남았다는 감정은 너무나도 비참한 것이기에 그 승리는 패배와도 같다. 이를테면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떤 이가 주인공이 되는 장면이 바로 살해의 순간이다. 주인공이란 게 없는 사회에서 이는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동시대를 살아가지만 티브이에는 보도되지 않는 이들의 삶이 조명을 받는 유일한 순간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빗금 처진 주인공의 살해를 지켜보는 이들에겐,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는 마음이 아니라 “또 이렇게 오늘을 살아(남아)버렸다”는 비애감이 생겨난다.



그런데 ‘살아남아버렸다’는 말은 이미 패배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목격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미래의 한순간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그것이 죽음의 인식론적 문제라고 여긴 걸까.



이들은 정해진 미래 안에서 현재의 자신을 최대한 보전하면서 살아가는 듯 보인다. 살기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은 환상이 되어버렸고, 그 무엇보다 알 수 없는 영역일 죽음이 가장 생생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비단 여성계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다. 잔존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이 문제는 우리가 ‘오늘날’이라 부르는 시대의 전역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은 없다’는 말은 이미지의 문제에서 ‘원본은 없다’는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건의 진행 또한 유사하다. 미술계에서 주인공의 문제는, ‘주류 미술’이란 없다는 말을 내세우며 공간이 곧 작품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실재의 귀환’이 벌어졌고, 이들은 ‘빗금 처진’ 주인공이 귀환함으로써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특정한 시기를 필두로 페미니즘에 리부트가 벌어졌다는 말은 일종의 은유처럼 보인다. 2015년이라는 시기를 특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빗금 처진 주인공들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빗금 처진 것들에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지냈지만 의식하지 않았던 다수의 것이 포함된다. 하지만 이들이 돌아오는 게 부재한 주인공의 자리를 쟁탈하기 위함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엿본 미래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한다. 이들이 일으킨 대폭발은 검은 잔해를 남기는데, 이때의 검댕이야말로 자신이 이전에 엿보았던 미래의 한순간이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리부트가 과연 위기를 넘어서는 대폭발이 될 수 있을까? 리부트라는 말은 폭발이 벌어진 날을 기점으로 역사가 새로 쓰인다는 맥락을 내포한다. 하지만 이전 사회를 살던 우리가 리부트된 사회에서도 이전과 동일한 가치관을 갖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세계가 완전히 초기화되고 몇몇 설정만을 간추린다고 가정했을 때, 결과적으로 리부트라는 것은 이전 세계에서 미래 세계로 우리를 뛰어넘게 해주는 게 아니라, 과거의 나를 단절하고 평행 세계의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식은 단절된다. 그리고 의식이 단절된다면 이전의 내가 이후의 나와 같은 존재라는 걸 보증할 수 없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오직 주인공과 함께해서만이 대폭발을 횡단하는 것이 가능하다. 주인공이 없다면 우리는 개변된 세계에서 이전 세계의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혹자는 폭발을 넘어서면서도 자신을 유지할 방법이, 어떤 면에서는 아픈 기억을 모두 안고 가는 것이기에 가혹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리부트라는 것에 있어서는, 혁명의 성공 여부가 아니라 주인공이 있다는 강력한 믿음에 더 지지를 보내야 한다. 혁명의 성공 여부보다 소중한 건 그렇게 바뀐 세상에서 우리가 있을 수 있느냐는 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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