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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03. 2021

혼돈에는 더 큰 혼돈을

학부 때의 전공은 영상 문화고 대학원에서는 영화 이론을 공부하고 있는데, 남들에게 말해주면 ‘그게 뭐냐’고 되물어볼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도 생각에 잠기곤 한다. 영상 문화는 무엇이고 영화 이론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영화를 보는 것에 이론까지 필요할까? 그런 맥락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그거 영화 평론” 같은 거냐고 물어보곤 한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옳지만, 영화라는 개념의 범주가 점점 넓어짐으로써 영화 이론은 더는 영화만을 다루는 게 아니게 되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당장 영화 이론을 공부한다고 하면 영화 보고 비평하는 것만 정답이 아닐뿐더러, 영화 이론을 전공하지 않아도 영화 이론을 충분히 공부할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연세대학교 미디어 대학원에서는 미디어 분과 아래에서 영화 이론을 세부 전공으로 택하게 되어 있다. 혹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는 협동 과정으로 영상 문화 전공이 개설되어 있기는 하나, 이곳의 주임 교수는 기호학자이며 “영화를 공부하려는 사람은 여기 오지 마시오.”라고 홈페이지에 떡 하니 쓰여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라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되고 있음과 동시에, 그만큼 남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내가 학부 때의 전공 때문에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어쩌면 나는 영화 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영화란 무엇인지를 궁금해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영화보다는 영상 문화 전반에 관심이 있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생각하는 이유는 미련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알고 싶다는 욕망 같은 것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영화를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다. 약간의 고뇌를 거치고 나니 의견은 다음처럼 정리됐다. 선두로 나갈 질문 하나. 영화는 공부의 대상인가? 상당히 애매한 질문이므로 전제를 보다 자세히 할 필요가 있겠다. 단순히 영화를 잘 보기 위해 공부가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영화란 학문으로서의 연구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전자를 이야기해보자면, 영화를 잘 보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은 어느 정도 일리 있다. 영화를 공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왜 공부를 하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답을 들려주곤 한다: “모르는 만큼 더 알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요.” 그러나 이 말은 영화를 단순히 데이터와 수치의 조합으로만 여긴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사랑에 빠진 상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하나, 이를 두고서 공부한다고 표현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영화를 모르기에, 그만큼 더 공부하고 싶다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 영화를 알려 들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영화에 대해 천천히 알아간다는 느낌으로 접근하는 게 나을 것이다. 예전에는 누가 요즘 뭐 하고 사느냐고 물어보면 영화를 공부한다고 대답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공부라고 생각했던 것을 계속하다 보니 갑작스레 의문이 들었다. 일단 영화라는 말 자체가 두루뭉술하다. 영화란 무엇인가? 언젠가부터 영화라는 말은 ‘영화적’이라는 표현을 가리키는 게 되었다. 꼭 원본 없는 원본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이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데, 영화가 영상 매체의 발달사에서 중핵을 이룬다는 점이 그렇다. 이에 따르자면 영화는 곧 영상이라는 말에 쉽게 등치될 수 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영화를 공부한다고 말하는 건 영상에 대한 공부나 마찬가지다. 달리 말하자면 드라마나 코미디처럼 영화라는 말은 일종의 영상 장르가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영화란 카메라 필터나 비율, 프레임이나 배급 방법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을 따라 정의된다. 촬영기기의 보급화가 이루어진 디지털 시대에서는 영화가 보여주는 특정 구도, 편집, 필터 등을 단순히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영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다. 


결국 영화 또한 장르적 선호에 따라 취사 선택될 수 있는 결이 되었다. 그러므로 영화를 영화이게 하는 것은 더는 물성이 아니며, 영화라는 말이 영화 장치를 의미하는 게 아니게 되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한다. 본다는 게 착각이 된 이상, 어쩌면 영화란 정물화이기보다 풍경화에 더 가까워진 것일지도 모른다. 즉 무언가를 본다는 게 유명무실해진 세상에서 우리는 ‘그것(that)’이 아니라 ‘이(this)’ 풍경들을 보려 한다. 풍경 안에 진리가 담겨 있다고 말했던 동양화의 세계로 돌아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마치 김병규 평론가가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에 대해 한 말처럼, “부서진 세계와 인물은 그렇게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 남겨진다”고 할 수 있다(씨네 21, 2021.04.06). 오래전 영화 <큐브>에서처럼 여러 방마다 다른 원리가 적용되는데, 이 세계들은 이미 부서졌고-서로의 방으로 넘어가는 것도 불가능해져 버린-분열되고 소진된 사회 말이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는 “카메라가 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긴장을 투과하는 실내극”(김병규, 비공개 서한)이라는 표현도 가능한데, 영화를 창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곧 무수히 많은 방이 그에 대응한다는 점을 전제하며, 이 방 안에 틀어박혀 떠나가버린 재현과 다가오지 못한 감각 사이를 진자처럼 운동한다고 말이다.

 

즉 우리는 ‘그것’이 불결하다는 생각과 ‘이것’은 살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를 ‘그것’과 ‘이것’으로 나누는 일은 정신적 분열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렇다면, 이를 김병규의 맥락에서 세르쥬 다네의 테니스 비평을 읽는 법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마테리알, Vol.2). 테니스가 상대방의 말을 감각적으로 받아친다는 점에서 (경기조작이 아닌 이상) 근본적으로 시각적 우연성에 기댄다면, 이러한 태도는 영화가 우리를 찔러오는 순간에 대한 숭고의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다. 물론 동시대 미술과 점점 혼합되어가는 영화들을 보면 영화에서 특정 장면을 목격하는 일은 불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테니스 경기가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은 옳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디지털 네트워크가 우리를 전송하는 게 아니라, 분해해서 재조립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분해 후에 재조립된다는 건 그때마다 별수 없이 데이터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점을 의미하고, 이는 자아의 균열을 동반한다. 즉, 오늘날 영화가 처한 상황은 테니스 경기가 성립하지 않는 분열이 아니라, 재현의 영역에서 벗어나 버린 시각적 분열의 사회이다. 


바꾸어 말해 이는 우리가 목격한 ‘영화’가 진실을 재현하더라도, 각자에겐 다른 장르로 보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겐 법정물, 누군가에겐 스릴러, 누군가에겐 멜로드라마 등. 이런 분열 안에서 영화가 테니스 게임으로써 성립하지 않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공이 너무 멀리 나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탁구 채에 갈려 나가는 탁구공들의 분열적 운동에 가깝다. 그 어떤 사람도 숏들의 움직임을 정직하게 따라잡을 수 없으며, 이것들 모두를 사로잡는 일은 그물망처럼 너무 포괄적인 이야기만이 될 뿐이다. 예컨대 영화를 보다 더 정교하게 보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동양화의 사례처럼, 텅 비었음이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양화가 가진 매력은 우리 눈이 사로잡지 못한 공백을 여백으로 치환하는 일, 즉 세계를 압축하고 전치하여 실재로 만들어버리는 일이었다. 따라서 실내극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내 제안은 다음과 같다: 영화를 공백으로 본다는 건 현실에 포착되지 않은 여백으로 영화를 보는 일과는 다르다. 테니스 게임에서 공은 궤도를 형성하고 그래서 꼬리를 밟히지만, 바둑 게임에서 이미지는 온전히 보는 사람의 것이며 그 판단은 상대방과 공유되지 않는다. 


즉,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의 스크린을 마주하며, 이곳에서 이미지는 오히려 하나의 장면화를 거부하고-공백을 형성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영화 담론은 사실상 튜링 테스트에 가깝다. 스크린 너머에 있는 게 인공지능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쉽사리 판단할 수 없는 건, 인공지능이 손실까지 그대로 따라 해버리기 때문이다. 습관이라던가 비속어라던가 하는, 법칙 안에서 포획되지 않는 변형태까지 영화가 모조리 흡수해버릴 때 영화는 비로소 더는 “영화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사라져 간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격벽을 유지하는 게 도움이 된다. 격벽을 해제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인간이든 기계든 별 상관없고 약간의 의심만이 남을 뿐이지만, 격벽을 해제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인데 기계 같거나 기계인데 인간 같다는 미심쩍은 마음을 계속 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의 골자는 말 그대로 우리가 ‘각방’을 쓰는 게 낫다는 것이다. 각방을 쓰는 일이 영화 담론 사이의 물질적 교환을 막는 것은 아닐지 우려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세계는 이미 픽셀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우리가 깨우치는 것은 근본적 이미지란 없다는 점이다. 


그러하니 영화가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생각은 어쩌면 주체의 자기애에 불과할 뿐이라며 비관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진리가 죽었다고 해서 그것이 신이 떠나버렸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화 장치가 영화의 의미 작용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면, 오늘날에도 영화 장치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여전히 의미 작용을 하며, 영화를 해석하는 것이 오늘날의 관객에게는 주된 유희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해석한다는 것이 곧 공동체의 형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들에겐 신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다. 물론 모든 관객이 영화를 해석하려 드는 게 아니라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지만(영화 해석의 구조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영화가 더는 시각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단순히 영화를 본다는 것만으로는 풀어나갈 수 없는 문제들이 많아졌고, 이 난관을 헤쳐나가려면 영화를 시각의 문제 이외의 것으로 보는 게 중요하다. 영화가 사라진 자리에 영화적이라는 풍경이 들어섰지만 오히려 우리는 영화란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분명 영화란 무엇이느냐는 질문과는 다르다. 이 말이 영화의 물질적인 부분을 지적했다면, 오늘날 영화라는 단어는 일종의 현상으로써 주변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영화가 마치 미래를 예지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영화를 두번 보아서가 아니고, 영화를 우리 현실의 어떤 면을 닮은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것이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일지라도 우리의 기시감을 빗겨나가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이 기시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우리가 이미 영화의 결말을 한번 다 보고 난 후에, 다시금 시작 지점으로 돌아와 이 삶을 다시금 살아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느끼는 생생함-그 과잉의 감정은 감각의 착각이 아니라 우리가 목격하지도 않은 현실이 이미 겪어버린 상황이라는 점에 대한 신체적 반응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란 두번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영화가 시작될 때, 두 번째는 영화가 끝날 때다. 하지만 둘 중 그 어떤 정지 상황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쾌한 감정의 원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런 감정들과 함께 살아가게 될 테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겪는 일은 마치 영화라는 개념이 소멸하고 난 후에 찾아온 혼돈처럼 보인다. 문제는 우리가 돌파하고자 시도하는 과정에서는 광속에 가까워짐으로써 시간이 정지 상태에 들어선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이것은 블랙홀이다. 


하지만 우리는 카메라가 꺼진 순간이 곧 영화가 끝장난 것으로 여겨야만 하는 걸까. B가 도래하지 않은 중간 시기가 혼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본래 있던 것이 죽었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다는 희망이 부여되기에 이를 혼돈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번데기(cocoon)는 자신을 세계 밖으로 배제한다. 그는 탄생점인 동시에 소멸점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결코 끊어질 수 없는 뫼비우스의 형상을 띠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멸과 혼돈 사이 간격은 진화를 위해 필요한 변태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소멸 이후에 도래하는 게 혼돈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영화가 소멸하고 난 후에 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게 혼돈을 뜻한다면, 우리가 영화에 그만큼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는 영화 없이 영화를 생각해보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서 영화가 죽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영화가 없을 때 영화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야말로 곧 돌아올 영화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에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를 공부한다고 해서 영화에 대해 꼭 더 잘 알게 되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말은 그리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를 모르는 상태로 보는 게 더 나을 수 있는데, 영화에 대해 무언가를 안다는 건, 영화를 보는 방법론이 내재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게 ‘영화’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되는 일은 흔하다. 우리가 영화를 두고서 벌이는 설전은, 이따금 우리가 영화라고 알아왔던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연속되는 흐름을 두고서 궤적이라 부르는데, 만약 영화가 특정한 궤적을 그리는 게 사실이라면, 하나의 이야기가 불가능해진 오늘날에 영화의 궤적 또한 하나로만 읽힐 수 있는 없을 테니 말이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이라 생각했던 게 사실은 시간의 흐름을 극도로 느리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이는 증명된다. 말 그대로 절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계속 이어지지만 너무 빨리 가거나, 혹은 극도로 느려진 것이라서 완전한 정지를 이루어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런 정지 상황이 곧 영화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테니스 게임이 바로 이렇게 정지 상황인 것처럼 목격하는 동체 시력에 의존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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