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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02. 2021

리월, 몬드, 이나즈마의 시간들

0.


1655년, 수학에서 무한의 정의는 부분과 전체의 합은 같다는 것이었다. 반면 불교에서 영원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시작지점을 탐구하는 것에 사용된다. 그러니까 무한이라는 말이 쇼트와 프레임의 합은 같다고 말하는 반면, 영원이라는 말은 이전과 이후를 봉합해 늘 이곳이 출발점이 되도록 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딱 잘라 말하는 건 썩 유쾌하지 않지만, 영화의 죽음이라는 말 이전에는 아마도 부분과 전체에 관한 탐구가 있었을 것이다. 들뢰즈의 운동 이미지가 프레임 안의 부분들을 보여주는 반면, 이러한 부분들을 통해 영화 전체의 시간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게 들뢰즈의 영화론이었다. 이른바 “뇌는 스크린이다.”라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는 이 탐구는 ‘영화의 우주, 혹은 우주로서의 영화’라는 말로 이어졌으며, 이것은 영화 속의 부분적 발견을 통해 영화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는 비평적 자신감으로까지 나아갔다. 


이에 적합한 사례는 역시 오즈 야스지로에 대해 서술하는 영화 비평이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오브제를 두고서 닫힌 세계와 열린 형식을 찾아내는 이 비평들은 오즈 영화에서 나타나는 불교적 색채(물론 일본식 신토에 더 가까운)를 영원에 엮는다. 일본 영화의 일본 감독이기에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건 바로, 오히려 동양의 평자들은 오즈의 영화를 두고서 서양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삼위일체라는 말로도 잘 알려진 서구 신학적 세계관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말로써 죽음의 순간을 집중적으로 조망하곤 한다. 그리고 이 관점은 오즈 영화를 평할 때, 이들 세계의 끝에는 가족의 종말이 있으며 이들의 처지는 그러한 것을 알고도 모른 척해야만 하는 슬픔과 비극의 교리로 나타난다. 


종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영화란 그 시작점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매체’라는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으며, 영화가 멸명할 날도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추론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죽음이라는 말과 폐허라는 단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짝처럼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 관계에 접근하고 있지만, 이 말에서 정말로 중요한 건 영화가 죽었다는 단언적인 사실이 과연 왜 나오게 되었는지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영화가 죽었음을 단정할 수 있는 것일까?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영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영화가 이루어 놓은 게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영화는 출발과 도착이 맞물리는 바로 그 반복의 지점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안에서 폐허라는 말은, 영화가 처한 존재론적 위기가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기원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말인즉슨, 영화란 언제나 폐허였으며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영화란 그 이전과 이후를 포괄하는 중심지대로서의 영원이라 할 수 있다. 


1.


최근에 [원신]이라는 게임을 하고 있다. 이 게임은 크게 볼 때 [젤다: 야생의 숨결]처럼 대륙을 탐사하는 오픈 월드 게임에 해당한다(물론 여기엔 불편한 진실이 존재한다).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루미네와 아이테르 남매 중 한 명을 택해 그/녀의 시점으로 모험을 떠난다. 여기서 핵심은 게임의 이야기가 일종의 미래 예지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게임의 프롤로그에서 플레이어는 천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남매를 목격하고, 다음 장면에서는 플레이어가 선택한 성별의 캐릭터가 티바트 대륙에서 눈을 뜨는 것으로 게임이 시작된다. 이때 게임상의 연출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운을 시작함으로써 천리와의 싸움을 과거의 한순간, 혹은 미래의 최종 도착 지점처럼 만든다. 이 연출에서 플레이어는 천리와의 싸움에서 패배했기에 여행을 하며 강해진 후, 그에게 다시 도전하는 게 전체적인 서사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연출은 용사가 마왕에게 패배한 후, 시간이 흘러 다시금 같은 구도로 재회한다는 용사물의 클리셰를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출발점을 갖는 것이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시작과 끝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세계를 구현한다. 시작과 끝을 맞물려 시간이 원형으로 봉합되고 나면 그 안의 공간을 우리가 모험하고 탐험할 수 있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자격을 얻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발전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영웅의 과업이나 성자의 순례와 같은 서사시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원신]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뉜다는 점이다. 게임의 표면적인 이야기는 전투에 휩쓸려 헤어졌던 다른 쪽의 성별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흘러가지만,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플레이어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성별쪽 캐릭터는 이후의 이야기에서 적대자로 등장한다. 일곱 명의 신과 한 명의 천리가 존재하는 티바트 대륙에서, 플레이어가 찾아 나서야 할 남매는 어떤 이유로 그들 모두와 적대하는 심연교단의 수장으로 있다. 


제작사에서 권장하는 이야기 흐름은 플레이어가 아이테르(남)를 선택해 루미네(여)가 심연교단의 수장으로 있게 된 선택지다. 아이테르는 교단의 왕이 된(이라 불리는) 루미네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인 “다시 만나게 될거야.”라는 말을 들으며 본격적인 의문을 품게 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세계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고 자신은 500년 전의 모험에서 그 사실을 발견했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줄곧 일을 진행해오는 중이다. 이때 심연교단의 목적이 천리와 그 밑의 일곱 신 모두에 복수하는 것임을 떠올려 본다면, 루미네는 프롤로그에서 겪은 일들을 토대로 천리에 복수할 것을 다짐했으나, 그 과정에서 일곱 신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티바트 대륙에 내려진 신적 체계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켄리아의 비극을 겪은 데인 슬레이프의 말도 들어보면, 심연 교단의 표면적인 논리는 켄리아 멸망에 일곱 신 또한 동조했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은 플레이어가 몬드를 지나 리월 지역의 이야기를 막 끝마쳤을 무렵이므로 플레이어로 하려금 여태까지 알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었다는 가정을 하게 한다.  


몬드 지역의 콘셉트는 자유인데, 자유가 없던 땅에 신이 찾아와 자유를 되찾아주었다는 특색이 있다. 이곳의 신 바르바토스는 자신이 관여하는 것조차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기며 몬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어떤 면에서 이는 자유라는 존재의 속박에서 풀려난 르네상스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 생각의 요지는 몬드 지역에 있는 바람 드래곤의 폐허가 자아내는 분위기처럼, 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리느냐는 실낙원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목가의 도시라는 말처럼 자유와 방종을 콘셉트로 한 몬드는, 겉보기에 신에 대한 믿음을 보내는 도시민들의 모습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심연교단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에는 이면이 있으며, 자유라는 것은 사실 개입하지 않는 만큼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말로써 비칠 수도 있다. 예컨대 몬드는 목가의 도시가 아니라 버림받은 땅일 수도 있으며, 심연교단이 말하는 무책임함이란 신의 이런 면을 의미한다. 


반면 리월 지역의 신인 모락스는 계약을 중시하는데, 이는 상호 간의 협의를 통해 정해진 만큼의 책임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몬드와는 상반된다. 몬드가 신이 사라진 도시로 불리는 반면 리월에서는 주기적으로 신탁을 받아 나라의 운영 방향을 결정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몬드에서 주로 보이는 게 성당의 수녀인 반면, 리월에서는 하늘에 뜻을 비는 제단이 주로 배치되어 있다. 물론 이는 몬드와 리월 지역의 각각 콘셉트, 네덜란드와(풍차를 본다면 그렇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특색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게임 서사의 측면에서는 영원과 무한 사이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모락스의 말처럼 “영원한 것은 없으며, 신도 닳는다”는 점은 인간들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시간의 흐름을 돌려주는 것이다. 바람 신이 지배하는 몬드 지역에서 시간은 흐름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바위 신이 지배하는 리월 지역에서 시간은 모라와 같은 교환가치로써만 존재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문화와 체제가 유지될 수 있으려면 무한의 개념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무한이라는 말은 프레임을 부분이자 전체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쇼트를 시퀀스에 빗댄다. 즉, 순간은 삶의 어딘가로 향하는 과정이며 이는 곧 무한한 세계로의 여정을 뜻한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면, 시작에서 끝으로 향해가는 바로 그 과정이 무한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오즈 야스지로의 사례에서 말했듯이, 프레임 안의 특정한 사물에 외화면의 가치를 응축하여 넣는 일을 일종의 교환가치에 빗댈 수 있다. 시작과 끝이 묶인 시간을 인간의 것으로 돌려주는 일은, 프레임 안에서도 즉 계약 안에서도 가능하다. 이 말대로 생각하면 모락스가 시도하는 건 바로 이 무한을 끝내는 것, 즉 신에 의해 시작된 것이 신에 의해 끝나게 된다는 세계에서 사람들을 탈출시키는 일이다. 예컨대 모락스의 리월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신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돌려놓는 것, 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계약을 스스로 마무리하는 일이다. 이야기상에서 자칫 이해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과묵함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신이라고 해서 인간을 위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을 사랑하려면 인간을 배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배반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전통이 깨어지는 곳이 현세대의 리월이다. 


2.


거대한 것이 죽고, 남겨진 이가 새 삶을 살아간다. 꽤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것들이다. 이별 후의 삶, 붕괴 이후의 사회, 어쩌면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는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꽤 쓸쓸해 보이니 그나마 희망차 보이는 후자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꿈이라 함은 밝고 희망찬 모습이기에 두둥실 떠오르는 가벼움으로 묘사되곤 하나, 반대로 보면 이는 그러한 꿈 아래에서 줄곧 영향받은 채 살아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꿈은 우리를 그들 안에서 살아가게 한다. 상징적으로 보면 죽음 같은 것도 이 부류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는 이 거대한 것이 어디에서 왔으며, 이를 넘어서는 방법이란 있는지다. 예컨대 죽음이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늘을 가린 구름 너머로 나아갈 방법은 있는가? 어떤 면에서 대전제라고도 볼 수 있을 이 거대한 것은 항상 재현의 문제와 연결되어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디까지나 남겨진 것이기에, 그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지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놓인다. 이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 플레이어는 이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짤막한 정보를 귀로만 들은 채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나무위키와 같은 곳에서 앞으로의 이야기 진행을 미리 알아두지 (Cheating) 않는 이상, 게임 속 세계는 알 수 없는 장소가 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은 자신이 오기 전, 이 세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탐사하는 일이 된다. 말하자면 플레이어는 게임을 시작하면서부터 이 세계에 홀로 남겨지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도를 위해서는 게임 안에 일정한 서사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하나의 이야기 다음에 벌어질 다른 이야기가 있어야만 비로소 다음 장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심지어 영화나 만화뿐만 아니라 회화나 사진처럼 정지된 이미지조차도, 프레임 안에 시선의 흐름을 만들어냄으로써 작품을 읽어내는 하나의 흐름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 흐름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서사, 즉 이야기들의 연속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흐름이란 장면이 고여있지 않음을 표현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제작자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자신들이 의도한 장소로 흐르도록 해야 하며, 그러나 이것이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동물이나 노파의 모습으로 영웅 앞에 나타났던 것처럼, 안내는 세계관의 일부로써 행해져야만 한다. 이 사실은 플레이어의 분신에 해당하는 그/녀가 작중에서 여행자(Traveller)라는 호칭으로 불린다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여행이라는 행위가 기본적으로 떠나온 곳과 찾아갈 곳이 일치함을 전제한다는 걸 고려해보아야 한다. 간편하게 진술하자면 집에서 출발해 집으로 돌아가는 게 대표적인 여행의 행위이다. 하지만 아이테르의 여행이 의미하는 건 단순히 남매와 손잡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만은 아닐 테다. 남매가 깨어난 시점 간에는 거진 500여 년의 간극이 있으므로 이 두 사람 간에 시작과 도착의 지점은 같지 않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이곳의 시간은 플레이어가 눈을 뜬 시점에서 무한히 연장되는 필드 위의 모험, 시작도 끝도 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영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리월의 다음 지역인 이나즈마에서 플레이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쇄국령을 내린 신 바알을 만나게 된다. 영원의 가치를 대변하는 이나즈마 지역에서 바알은, 신이 신의 눈을 내린 것이라면 그것을 다시금 회수할 권한도 있다고 생각한다. 리월의 사례와는 달리, 신에 의해 시작된 세계는 신의 손에 닫혀야만 한다고 말하는 바알은 신의 눈을 회수함으로써 자신의 나라를 한층 더 영원에 가깝게 만들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신의 눈 사용자에게 신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주어진다는 티바트 대륙의 법칙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게 보면 바알의 신의 눈 회수 정책은 르네상스 시기에서 다시금 이전의 중세로 돌아가자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관점에 대해 전공자는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저, 영원이 깨어지던 시기가 바로 르네상스라는 점뿐이다. 


다만 중세의 시간이 신의 이름으로 귀결되고 이에 따라 바알의 이나즈마도 프레임 안에 고립된다면, 이후의 진행은 영원이 아니라 무한으로 나아갈 공산이 커 보인다. 왜냐하면 바알 본인은 최초의 전기 신이 아니라 신의 심장을 물려받은 후대라는 설명이 있기 때문이다. 바알의 이 설정은 게임 안에서 풍문으로만 떠돌던 “모든 신의 눈 사용자는 신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점을 증명해준다. 그러니 어쩌면 티바트 대륙의 이야기는 켄리아의 멸망이라는 순간이 무한히 지속되는 현재를 지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켄리아의 멸망에서 모든 시간이 시작되었고, 그렇다면 이 시간은 다시금 켄리아의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야만 하니 말이다. 다른 시각으로 볼 때, 바알이 영원을 추구하는 일은 그러한 다카포(Da capo)를 막으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영원은 경계를 설정하지 않기에 늘 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이기도 하다. 이른바 대안은 없다는 것, 본래 시간의 밖에서 온 여행자가 아니라면 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두 번 시작된다. 첫 번째는 루미네의 비극으로, 두 번째는 아이테르의 희극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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