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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07. 2021

리듬의 몽타주: 흘러가는 시간의 문제


우리가 살아가며 보는 뉴스들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다. 기자 용어로 ‘꼭지’라 부르는 이것은 해당 주제를 하나의 지면 안에서 어떻게 배치하고, 발화하는지에 따라 그 뉘앙스가 달라질 수 있음을 전제한다. 가장 중요한 뉴스를 신문 기사의 1면에 배치하는 게 대표적이다. 티브이 뉴스나 디지털 뉴스에서도 이는 변함이 없어서, 코로나19 감염자 수와 같은 단순한 팩트조차도 기사의 논조나 글뭉치 사이의 배치 구도에 따라서 충분히 꼭지가 생성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뉴스는 영화의 제작 원리와 닮아있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이 배치와 충돌을 통해 특정한 꼭지를 만들어냈음을 떠올려보자(에이젠슈테인은 뉴스 영화를 만들었지만 타르코프스키는 그러지 않았다). 아기를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얼굴과 군화들의 행진, 계단의 가파른 경사가 연이어 등장할 때 이곳엔 꼭지가 생성된다. 아래쪽에 있는 수병들과 민간인이 무고한 희생자라면, 위에서 내려오는 진압부대는 부패한 국가권력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장면 묘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목격의 장소를 먼저 지정한 후 원인을 후술하는 전략을 취한다. 즉 꼭지라는 것은 전후에 결과와 원인으로 사용할 이미지를 배치한 후에, 그 중심부에 ‘인과’를 몽타주 해 넣는 이야기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가 『시간의 각인』(곰출판, 2021)에서 에이젠슈테인을 비판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p.156). 에이젠슈테인이 흐름을 지배하는 자가 곧 인과를 결정하게 되리라고 말했던 반면,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라는 하나의 [세계 The world]를 생성하는 게 자신의 목표라고 말한다(p.152). 즉 에이젠슈테인이 흐름에 의존한다면 타르코프스키는 그 자신이 밝히듯 리듬에 의존한다(p.155). 흐름과 리듬이라는 단어에 관해서는 처음 들었을 때 얼추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세계 The World]라는 단어의 용례를 떠올려보아야 한다. 그는 다음처럼 말한다: “시간은 영화 속에서 편집의 힘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편집에도 불구하고 흘러간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에 기록된 시간의 흐름이며 감독은 이것을 몽타주 테이블 위에 놓인 조각들 속에서 포착해내야만 한다.”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세계라는 단어는 엄밀히 말해 그 자신의 영화가 에이젠슈테인과는 반대되는 것, 즉 편집을 가하지 않은 하나의 말뭉치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영화는 처음에 단순히 이어진 하나의 실, 흐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는 ‘포착해내야만 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에이젠슈테인이 발견했던 하이쿠 시의 운율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온다. 흐름 안에서 발견이 연속되는 것, 이를 통해 흐름은 운율을 얻어 우리가 말하는 화성적 리듬(Harmony)이 된다. 어떠한 발견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리듬’은 ‘흐름’의 연장선에 있지만, 그와는 달리 특정한 꼭지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게 차이점이다. 정확히 말해, 리듬은 그 자체로 하나의 꼭지라 할 수 있다. 다만 끝이 있기에 시작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중간에 우리를 끼워 넣는 에이젠슈테인의 사례와는 달리, 타르코프스키는 그러한 흐름에서 끝을 제거하고서는 이곳엔 오직 시작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리듬은 반복 형성에 그 의미가 있기에, 끝은 없지만 운율의 시작점만큼은 선명하게 자리하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늘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언급되는 건 그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향수>). 에이젠슈테인에게 기억이 충돌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 즉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라면 타르코프스키에게 기억은 늘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한다. 말하자면 타르코프스키에게 기억은 시간을 계승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에겐 과거에서 현재로 연결된 흐름의 무게가 이따금 역전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이는 대개 중력의 문제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안드레이>에서의 도입부와 <거울>에서의 공중부양, <솔라리스>의 이상한 중력지대를 떠올려보라. 중력이 강해질수록 기억의 농도가 짙어지는 장소에서 인물들은 기억의 무게에 짓눌린다. 이와 동시에 짙어진 기억은 시간을 느리게 하며 끝내는 시간을 역전시키게 된다.


예컨대 타르코프스키에게 영화란 기원(Origin)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기원이라는 말은 늘 출발점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어로 풀이되기도 하지만, 원형(Original)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원에 대한 탐구는 원형에 대한 묘사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내가 참조하고 싶은 이는, 다름 아닌 벤야민이다. 벤야민이 『베를린에서의 유년 시절』을 회고하는 대목을 보면 (도서출판 길, 2007) 기원과 원형 사이의 관계는 수집가와 박물관의 관계로 설정되어있다. 벤야민에게 박물관이란 오직 기원만을 생각게 하는 사물들이 수집되어 전시된 장소이다. 즉, 이 유물들이 언제 어떤 맥락으로 사용되었을지를 생각하는 것 말고는 그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자신의 유년 시절 기억을 이런 박물관의 속성에 빗대었는데, 이는 그가 말하는 폐허의 의미와도 무관하지 않다. 벤야민은 단어의 의미는 발견하는 이를 통해 새롭게 발굴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맥락에서 언어란 폐허이며, 이때의 폐허는 우리 앞에 결론적으로 도달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한순간을 지시하는 목적성이 있다고 보았다. 폐허 안의 것들에서 불현듯 반짝이는 이미지, 그 원형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의 논조를 빌려 말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폐허는 일종의 섬광으로써, 결과와 원인 사이에 나타나는 현재적 풍경이라고 말이다. 이 현재적 풍경이 관객을 산책하게 하고 그 중심부의 언어를 새로 쓸 수 있게 한다. 언어는 운명처럼 주조되며, 이 운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게 「번역자의 과제」이다. 


그렇게 보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론이 상정하는 흐름이란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질서, 그로부터의 탈피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중력에서 벗어나는 법은 언어를 부딪히고, 정신을 파열시키는 일뿐이라고 말이다. 혹은 만약 신이 있다면, 그가 만들어가려는 세계의 ‘꼭지’를 미리 예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닥쳐올 파국을 근사하게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에이젠슈테인에게 몽타주 이론이란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가 자신이 소속된 시간에 변화를 주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그 시간에 소속된 이야기(Chronicle)도 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파국을 묘사하는 몽타주 이론에서, 영화관객은 촬영된 영화필름의 맨 끝자락인 표면에서만 자리하지만, 시간의 변증법을 통해 파국의 전선에서 벗어나 전열을 다듬을 수 있다. 이때의 충격은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니며, 생생한 악몽처럼 다가와 우리를 현실세계에서 다시금 깨어나게 해주는 경고의 성격을 지닌다. 


벤야민의 이러한 폐허에 대한 단상이 수집가를 거쳐 박물관이라는 장소에 대한 생각으로 나아갔음을 고려해볼 때, 박물관이라는 말은 흐름에서 리듬으로 나아가는 타르코프스키의 작업과 비교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타르코프스키의 생각은 “경고를 위한 시간은 없다(No time for caution)”는 것이다. 흐름을 지배하는 자가 시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말은 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는 하나의 흐름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며, 여러 운명이 얽힌 실타래를 뚫고 지나가는 것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바로 이 시간의 결절이야말로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할리우드의 스펙터클 장르 영화들은 조각난 장면들을 모아 본래의 모습을 상상하도록 했지만, 시간을 느리게 만들어 그 안을 이동하는 불릿 타임(Bullet time)은 우리 세계의 흐름이 단지 하나의 운명으로만 전개되지 않으며, 이들이 한곳에 모일 때 그것은 바로 역전의 리듬이 된다는 점을 말해주었다. 이 중력이 작용하는 장소에서 시간은 엿가락처럼 늘어지다가 끝내 펑퍼짐한 공간의 정경으로 탈바꿈하게 됨으로써 관찰자의 시각을 다변화한다. 


예컨대 우리는 박물관을 두고서 운명에 얽힌 시간을 풀어내는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물관이라는 장소는 유물의 기원을 탐색하게 함으로써 이것이 최초에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즉 원형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게 한다. 벤야민은 이 원형이라는 말을 프로이트적 꿈의 단상, 에고(Ego)에 빗대는 것으로 자신의 에세이를 서술했던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이 말하는 폐허와 박물관이라는 말 사이에는 확고한 간극이 자리한다. 벤야민에게 폐허와 파국은 하나의 선상에서 논해지는 역사적 인식이지만, 박물관은 이들 시간 밖에 자리한다. 폐허는 여행객의 이목을 부르지만, 그중에서도 수집가를 통해서만 비로소 원형은 박물관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기본적으로 박물관이라는 장소가 단순히 전시만이 아닌 보존의 역할도 겸하는 것에 그 이유가 있는바, 우리의 시간이 끝나더라도 이후의 후손들이 유물을 통해 현재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다. 말하자면 여기서 보존되는 건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그들의 시간이다. 박물관의 유물은 보는 이에게 그 해석의 권리를 제공한다. 


여기서 폐허와 파국이 하나의 선상에 자리한다는 말이 마치 영화란 시작과 끝으로 이루어진 러닝타임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처럼 들린다면, 우리는 타르코프스키 영화에 대한 생각을 재고해보게 된다(p.294). 왜냐하면 이는 마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흘러가는 시간(Running time)의 바깥에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세계 The world]는 편집에도 흘러가는 시간을 상정한다. 그 말인즉슨, 현실을 그럴듯하게 편집해놓은 영화 자체도 결과적으로는 우리 현실과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의 일부가 묘사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과정은 끝없이 연장되며 결과는 원인으로 늘어진다. 발이 푹 꺼지는 중력의 무법지대인 블랙홀처럼, 미래에 대한 예지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미래라고 그 운명은 말한다. 박물관이라는 말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시간의 밖에 자리한다는 말이 분리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법칙을 지녔다는 것으로 이해될 때, 비로소 리듬은 이해된다. 


그들의 시간은 다른 법칙을 지녔다(<솔라리스>). 우리는 리듬이라는 말이 흐름 안에서의 어떠한 발견을 의미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리듬은 음악의 흐름 안에서 듣는 이가 어떠한 구절들, 즉 결절을 발견할 때 비로소 인식된다. 예컨대 단순히 흐름이 이어지는 것만으로는 시간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절의 지점을 최대한 지우는 일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시간 안에 몰입시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영화의 연속성이란 이런 부분을 의미한다. 타르코스프키가 몽타주 이론을 두고서 사이비라 칭했던 것은, 관객들을 이러한 세계 안에 몰입시킨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못하는 바보로 만들어버린다는 점 때문이었다. 편집증(Paranoid)은 자신의 이야기가 이어진다고 느끼는 광적인 증세이다. 그리고 폴라로이드 카메라(Polaroid)는 자신의 시간을 염사하는 능력을 지녔다. 정지를 인화하는 영화는 마치 일상의 어떤 순간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처럼 보였고, 그러나 삶 안에서 영화는 발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화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건 사실 우리의 운명과 연결된 현실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시간이 정지된 상태를 두려워했다. 흐름을 이야기하면서 정지를 언급하는 건 확실히 모순되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흐름이 추구하는 게 바로 연속성이라는 점, 즉 시간의 구분을 없앰으로써 관객을 사로잡는 일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화는 관객의 시간을 빼앗는 것을 목표로 하며, 체감상으로 이는 시간을 삭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타르코프스키는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어쨌거나 영화 밖에서도 시간을 흘러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흘러가는 시간의 바깥에 있다는 말은 딱 잘라 구분되는 지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들뢰즈의 경계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 작가가 꼭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관객의 시간을 정지, 혹은 삭제시키는 게 아니라 그들 시간의 원형을 탐색하도록 시간의 치외법권, 바깥 지대를 보여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점점 더 원형에 집착하며, 그런 점에서 그의 영화는 (다소 고리타분해 보일 수도 있지만) 박물관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대목에서 박물관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어떠한 원형을 보존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나는 박물관을 두고서 영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려 한다. 영원이라는 단어의 뜻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불교에서 영원이라는 말을 생각해보고 싶다. 불교적 맥락에서 영원은 자신의 기원을 돌아보게 하는 단어다. 영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하는데, 그중에서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하나로 집약되는 소실뿐이다. 이는 즉, 우리가 살아가는 게 시간의 최전선이라는 뜻이다. 비슷한 단어로 무한이라는 말이 있지만, 무한은 에이젠슈테인의 사례처럼 시작과 끝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영원과는 다른 뜻을 지닌다. 무한이 창조주의 손에 의한 탄생과 멸망이라는 시작과 끝, 즉 작가 주체의 흘러가는 시간 만들기를 지칭한다면, 영원에서는 끝이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으며 오직 출발의 지점만이 모두에게 공평하다. 


그리고 이 출발의 지점은 위에서 우리가 에이젠슈테인과 타르코프스키를 흐름과 리듬이라는 말로 분류했을 때 공통된 것으로 지적했던 것이기도 하다. 분명 어떤 면에서 영원이라는 말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문턱을 제거하기에 리듬이라는 말과는 모순되는 지점에 있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이를 발견의 문제로 해결한다(p.103). 그러나 이 발견은 에이젠슈테인처럼 어떠한 목격담을 상정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타르코프스키는 결과에서 원인으로 후퇴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발견하게 한다. 우리 중 많은 이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클로즈업이 아닌 클로즈 아웃으로 기억한다면, 그 이유는 그러한 발견의 행위가 우리로 하여금 영화의 시간인 영원 안으로 개입할 수 있는 문턱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리라. 


“나의 모든 영화는 사람들이 텅 빈 세계에서 외롭지도 버려지지도 않고, 오히려 무수한 실로 과거와 현재에 연결되어 있으며, 각자 원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운명과 인류 전체의 운명을 결부할 수 있음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야기해주었다.”(p.260) 이처럼 관객은 자신의 삶에서 마주한 영화적 순간을 하나의 ‘결과’로 가져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발견한 이미지를 ‘원인’으로 조합하여 하나의 꼭지를 형성하게 된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하나의 말뭉치로 기능함과 동시에, 관객의 삶과 영화의 세계를 하나의 선율로 이어놓았던 것이다.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의 영화에서 특별히 강조하려는 이미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그의 영화는 신학적이지 않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관객은 영화에 유혹되는 게 아니라 세계의 균열에 나자빠진다. 중력이 강해지자 시간이 느려지면서 현재 안에서 과거를 발견하는 기묘한 현상을(<솔라리스>), 또는 열차의 떨림이 [세계 The World]의 과거에 파문으로 작동하는 낯선 풍경을 우리는 목격한다(<스토커>).


 물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다 보면, 그의 카메라가 결과에서 원인으로 후퇴하는 클로즈 아웃을 자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원형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세계의 그 어떤 것도 리듬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하나의 소실점에서 이탈하게 되는 순간을 그의 영화는 보여준다. 그래서 영원은 박물관이라는 단어의 뜻에 잘 어울리는데, 왜냐하면 박물관은 유물을 하나의 평면에 나란히 전시한다는 점에서 관객의 시간을, 영화의 시간을 현실의 시간 안에 유연하게 배치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감각의 재분배를 주장하는 자크 랑시에르는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없다」라는 대담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미학적 체제는 박물관, 박물관적 시선, 복제의 확산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술을 도처에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그곳이 어디든지 간에 아무 곳에서나 존재하게 하는 것입니다.”(『자크 랑시에르와의 대화』, 인간사랑, 2020, p.736)


랑시에르의 이러한 발언은 어떤 면에서 그가 말하는 감각의 재분배를 하나의 방법론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 생각이란 바로, 리듬의 몽타주는 시간을 도처에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어디든지 간에 존재하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즉 시간이 만연한 게 아니라, 시간은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수직 선상에 있던 시간이 오직 전진만을 허용하던 것이 비해, 평면상의 시간은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다.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박물관은 시간의 바깥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안쪽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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