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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20. 2021

리스트에 반대한다에 반대한다


*콜리그에 투고한 다섯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551696



개인적으로 리스트라는 걸 써본 적이 없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이라면 리스트에 관해 이야기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죽기 전에 보아야 할 영화 천편’과 같은 책은 영화 입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정보를 말해준다. 많은 영화광들이 그러한 리스트를 손에 쥐고서 한 줄씩 선을 그어나가던 경험을 고백하곤 한다. 이들의 말은 대개, 영화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을 영화 경험이 비교적 풍부한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본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리스트란 일종의 성취 목록으로써, 자신의 영화 경험을 단계별로 성장시킨다는 측면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리스트란 자신의 취향에 대한 고백이 되기도 하는데 이는 좀 전과는 다른 경우다. 이때의 리스트란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시절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모르던 것’을 알려줄 용도로 작성된다. 이는 타인에게 자신의 권위를 행사한다기보다, 잘 모르던 시절에 받은 도움을 이제는 갚아줄 수 있게 되었다는 성장의 증표에 방점이 있다. 여기서 핵심은 이러한 행위에는 호혜성이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지금의 자신이 이렇게 성장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받았던 도움을 이제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는 마음이 한가운데 자리한다. 그렇게 본다면, 리스트라는 건 일종의 롤링 페이퍼 같은 게 아닐까? 위에서 아래로 전해지며 내려오는, 폐쇄된 집단 내에서의 전언 말이다.



이러한 가정을 따르면, 리스트라는 건 호혜성을 기반으로 하는 집단 문화가 된다. 그래서 그로 인한 폐단도 얼추 비슷하다. 위에서 아래로의 전언이란 일방적 전달이기에 누군가에는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명령처럼 들릴 수 있다. 누군가는 꼰대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를 폐단으로 여기며 꼰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리스트라는 말에 대한 생각을 재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는 리스트는 기호일 뿐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리스트를 선별하는 기준이야 여러 개 있겠지만, 어쨌거나 결론은 하나다. 리스트는 어떠한 데이터를 토대로 선별되었고 작성되었다. 그렇다면 리스트란 어떤 데이터의 선별기준을 따른 것이므로 중요한 건 데이터 값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떤 잣대로 바라볼 것인지다. 이른바 빅데이터의 시대에 데이터는 자신은 그저 픽셀 상의 점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해석은 오직 큰 그림을 그려볼 때만 가능하다는 데이터 중립론을 펼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은 데이터 자체는 죄가 없고, 책임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일련의 책임회피론이다. 이것을 영화 비평론에서의 리스트 문화에 접목해보면 말은 다음처럼 된다: “이 목록의 영화들은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습니다.”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된다고 말한다면, 영화 권력의 중추는 리스트 자체에 있다. 왓챠나 IMDB와 같은 영화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을 산책하다 보면 유저들이 만들어놓은 영화 리스트를 보게 된다. 여기에는 단순히 연도별 최고 작품뿐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징후를 객관적인 형태의 증상으로 바꾸어 보려는 노력들이 포함된다. 따라서 이는 흩어진 것을 모아 가시적인 형태로 만들어보려는 빅데이터의 논리에 부합한다. 그 자체로는 특정 연대의 특정 장소에서만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이것을 리스트로 모아 묶으면 여성영화든, 포스트 모던 영화든, 개인이 체감하는 모든 형태의 증상이 될 수 있다. 심지어는 정형화되지 않은 것에 대한 묘사와 서술도 가능하다. “비 오는 날 침대에 누워 보기 좋은 영화”라던가 하는 다소 감각적인 제목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러한 감각적인 서술이 권위를 얻는다면, 아마 그건 리스트를 만드는 사람의 권위일 것이다. 리스트를 만드는 사람의 권위가 바로 리스트의 권위가 된다. 예컨대 우리가 리스트에 반대해야 한다면, 그것은 리스트가 아니라 리스트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반대가 되어야 한다. 리스트 자체가 무언가를 선별하는 권력이 있고 이에 따라 자제되어야 한다는 말은, 리스트 안의 개별 영화에 어떤 우위가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통해 쉽게 반박할 수 있다.



물론 영화를 빅데이터로 파악하자는 말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제안일지도 모른다. 영화 개인의 미학적 성취와 노력을 배제하자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불평등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불평등하다는 말은, 평등이 불허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리스트 안의 영화들이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일은 영화들끼리 통합될 수 없다는 최소한의 거리를 상정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인간은 타인과 거리를 둔 채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회의론처럼 보이기도, 또는 진정한 통합의 상태에서 모든 이야기는 자신에 대한 진술에 불과하므로 타자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제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평등해질 수 없다면 평등이라는 관념은 무색해질 것이다. 평등을 생각해볼 수 없는 세상에서 평등 이외의 것을 떠올리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평등을 말하는 세계에 평등 이외의 대안은 없다. 우리는, 불평등한 상황에서는 평등으로 나아가는 게 바로 원상태로의 복귀라고 여기지만 이 복귀는 무용하다. 미학적 논리를 따르는 세계관에서 영화는 감각의 일부로 여겨지고, 이러한 감각 속에서 영화는 세계의 증상이 된다. 말하자면 미학으로서의 영화는 우리 세계가 진정 아프고 병에 걸렸다는 점을 드러내는 고발의 매체였다.



고발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파열을 동반한다. 고발은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이루어지는 행위이므로 기존의 질서에 파열이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둔다. 성공이나 실패는 그다음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미학적 성취로서 영화를 바라보는 일은 늘 파열로 이어진다. 영화가 일구어내려는 건 승패를 가르는 일이 아니라 열병을 앓는 세계를 묘사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응급실에서는 누가 더 아픈지에 따라 의사 앞에 도착하는 시기가 줄어들므로 누구라도 자신에게 유효한 증상이 있음을 호소하는 것이다. 이때 미학적 성취를 가늠질 하는 리스트는 다른 이와 집단에 파열을 가하는 화살촉이 된다. 더 많은 증상이 있을수록 고도로 복합적인 질병이 되는데, 어쨌거나 이러한 뽐냄은 오히려 누가 더 아픈지를 자랑한다는 점에서 병자들의 잔치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전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아픔을 미학적 성취로 포장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모두 파멸하는 세계 안에 갇혀 있다는 종말론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예컨대 누구나 죽는다는 말이 평등이라면, 그러한 죽음의 자리를 두고서 쟁탈전을 벌이는 셈이다. 리스트가 권력을 지닌다는 말은 이러한 대목을 염두에 둔다.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은 세계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게 무너지는 상황에서 자신이 여태까지 보아 온 몇몇만이라도 부리나케 싸 들고 탈출하는 피난민의 모습이다.



다르게 말해 이들 사이에 오가는 화살촉은 세계의 권위자가 되려는 세력전이 아니라 무너지는 세계에서 탈출하려는 난민의 모습을 보여준다. 리스트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선별 인원이 아니라 누가 이곳을 탈출할 수 있겠냐는 여권에 더 가깝다. 혹자는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 자체가 이들을 선택하여 취합하는 행위이며, 선택받지 못한 것 이외의 것들을 떠올리기란 어려워지므로 언제나 바깥에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세력의 고착화를 우려하곤 한다. 탈출하지 못한 이들에겐 세계와 함께 멸망하는 미래만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의 호소를 징후를 감지하는 것으로 바꿈으로써 우리는 대안을 상상할 수 없는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대안을 상상할 수 없는 세계란, 영화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그것들을 미쳐 다 볼 수 없으며, 이에 따라 생존자를 손수 선별해주어야 한다는 구원의 손길을 요구한다. 여기서 구원자는 그만한 리더쉽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말하는 권력의 문제와 연결된다. 미학적 세계관에서는 권력자의 도움 없이 영화들은 손수 빠져나올 수 없으며, 행여나 자력으로 빠져나온다 한들 이들의 진정성은 쉽게 의심받는다. 이들이 아무리 아픔을 호소해도 우리는 그것을 꾀병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이제 이곳은 그저 ‘좋은 시절은 갔다’고 말하는 것 말고는 어찌 손 쓸 도리가 없게 된다.



영화를 증상이 아니라 징후로 읽을 수 있게 해주는 리스트는 미학으로서의 영화가 불가능해졌음을 전제하지 않는다. 미학으로서의 영화가 개인의 취향을 취합해 작성해 만든 감각의 리스트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것은 권력이 된다. 미학으로서의 영화를 리스트에 포함하는 순간 이들은 하나의 감각 되기를 강요하고 또 이에 동조하는 순간 그러한 증상 말고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픔에 정도와 등급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상황에 처했다는 점으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미학적 성취를 배제하자는 말은 아픔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정도가 없음을 지적한다. 상을 받은 영화만이 아픔을 표현할 수 있지는 않으며, 또한 모두의 슬픔을 대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어떤 영화가 상을 받았다면 그것은 시대의 흐름을 잘 읽었고 그걸 잘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단상 위에 올랐다는 점이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고통을 거칠게 말함으로써 모두가 자신의 슬픔만을 바라봐주길 바라는 무한이기주의의 늪에 빠지게만 될 뿐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리스트라는 말이 낙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슬픔이 아니라, 무너진 낙원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의 문제를 다루는 리더쉽의 문제로 이해되기를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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