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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22. 2021

타자인 우리들 사무라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일까?


피에르 레비는 물질적 리얼리티에서 후퇴하는 게 전 지구적 ‘집단지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반이 된다고 믿었다. 현실에서 후퇴해 인터넷이라는 막다른 공간에 다다른 이들이지만, 오히려 이 장소는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틀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눈에 들어온 이 문장은 어딘지 모를 매력이 있었다. 아마도 이는 근래 한국의 상황을 우리가 너무 잘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인터넷상에 넘쳐나는 혐오 발언과 저급한 슬랭들은 성악설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래 인간은 악한데, 단지 현실에 억눌려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인터넷은 오히려 현실에 기반을 뒀기에 더 현실적이지 않은 장소가 되어버린다. 또한 현실이 없다면 인터넷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인터넷상의 사람들이 결국 ‘어디에서’ 왔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인터넷이 우리 일상의 일부가 된 만큼, 현실에서는 그 사람의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세계는 현실을 넘어 인터넷으로까지 확장되었고 여기서 인터넷은 마치 신대륙처럼 기능한다. 내가 ‘신대륙’이라는 표현을 통해 말하려는 건, ‘신세계’라는 뉘앙스가 아니라 옛 미국의 서부극이다. 예를 들어 들뢰즈는 구로사와의 <7인의 사무라이>를 두고서 다음처럼 말했다. “사무라이란 무엇일까? 사무라이 일반이 아니라 바로 이 시대에 사무라이란 무엇일까?” 이 말은 영화 속 인물의 대사를 직접 인용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들뢰즈에게는 다른 속뜻이 있어 보인다. 이어서 들뢰즈는 다음처럼 말한다. “”타자인 우리들 사무라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일까?” 이 말은 전통적인 봉건 제도가 붕괴하고 사무라이들이 자취를 감출 무렵의 일본을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달하기엔 충분하다.


서부극이나 사무라이 영화들에서 주인공은 늘 자취를 감춘다. 등장도 그렇지만 퇴장도 그렇다. 이들이 스크린 안에 들어왔다 나가는 것은, 마치 심령사진 속의 형상들처럼 그 출몰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 황무지의 유령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런 황무지가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이라는 것이고 카메라는 그들 주인공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타자일 수밖에 없는데, <7인의 사무라이>의 결말은 이 지점을 정확히 지목한다(이 세계에서 우리는 늘 혼자다). 사무라이가 농민들에게 ‘싸우는 법’을 알려주었을 때, 이 마을에는 더는 사무라이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농민들이 싸우는 법을 알게 된 것처럼, 사무라이들도 농사짓는 법을 알게 된다. 이렇게 양측은 하나의 공동체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타자인 우리들 사무라이’의 정체성은 여기서 생겨난다.


한쪽에 ‘사무라이였던’ 농부가 있다면, 다른 한쪽엔 ‘농부였던’ 사무라이가 있다. 말하자면 이들은 그 자신에게 있어 타자다. 애초에 농부와 사무라이의 구분이 사라진 상황에서, 집단을 스스로 규정하는 건 오직 그들의 가치판단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누구나 혼자가 되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사람들은 공동체를 꾸려나갈 수 있을까? 혹자는 인터넷이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공간, 그러니까 ‘가상’이기에 이곳에서 진정으로 ‘사람’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7인의 사무라이>와 같은 사무라이 영화, 서부극에서는 마치 ‘가상’처럼 보이는 황무지가 나오곤 한다. 실제로 조지 루카스는 가상의 역사를 다루는 SF 영화 <스타워즈>를 황무지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모티브가 된 서부극이라는 장르가 아주 멋진 주인공, 즉 진정으로 ‘사람’인 자를 다루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사무라이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무라이는 왜 떠나야만 하는 걸까. 진정으로 사람인 자가 이곳에 남는다면 세상은 조금은 더 풍족해질 텐데. 들뢰즈는 이 시대에 사무라이가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사람’에 대한 갈망이 있다. 들뢰즈는 인터넷 시대를 예고하며 사무라이의 멸종을 점쳤지만 오히려 이 황무지엔 사무라이의 등장이 절실하다. 어쩌면 이 낭인들은 익명성에 기대어 우리에게 칼을 휘두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진짜로 참된 ‘사람’ 또한 있기 마련이다. 익명 커뮤니티의 긍정적인 면은 바로 그러한 의인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부정적인 면은 그러한 의인들이 발견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이 다시금 떠나가리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7인의 사무라이>가 한자리에 모이게 된 과정처럼 말이다.


어쩌면 공동체라는 말은 개인이 아닌 익명에 기대는 게 아닐까. 피에르 레비의 말처럼 인터넷 세계로의 후퇴가 지구적 집단지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황무지로 후퇴하는 사무라이들의 모습이란 일종의 집단지성을 추구하는 행위일 테다. 바꾸어 말해 자신을 사무라이로 여기는 이들의 심리란, 그렇게 없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농사는 생성의 논리를 따르지만 사무라이의 전투는 싸울 사람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면 사무라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를 그들은 잘라낼 수 없다. 이들에게 가능한 건 농부가 되어 새로운 시대의 싹을 심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황무지의 익명성이 추구하는 건, 기억에서 잊히는 게 아니라 영원히 기억되고자 함이다. 그들이 황무지로 후퇴하는 건, 숨은 요새에서 항쟁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더는 사무라이라는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어떤 사무라이들이 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건, 인터넷상에 신원미상의 야수들이 득실대고 있다고 보아서가 아니다. 현실에서는 얌전한 이가 인터넷에 가면 ‘사무라이’가 되는 일에 대해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고 싶다.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무라이란 무엇인가. 사무라이 일반이 아니라 인터넷 시대에 사무라이란 무엇인가.” 만약 인터넷이 현실 세계의 확장된 버전이라면, 이 사무라이들은 현실에서 인터넷으로 넘어오는 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터넷상의 사무라이들이 왜 유령처럼 느껴지는지가 설명된다. 황무지가 익명성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두 세계 모두를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터넷상의 사무라이들은 현실과 인터넷에서 태도 차이를 보이는 이가 아니다. 두 세계 모두에서 하나의 자신을 유지하는 이가 바로 사무라이다.


우리는 흔히 사무라이들을 두고서 가식적이라거나 음흉하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지만, 오히려 이들은 양쪽 모두에서 자신으로 살아간다. 혹자의 말처럼 인간은 본디 악할 뿐이고, 인터넷은 인간의 그런 본성을 드러낼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서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축복이다. 이는 즉 두 개의 세계를 하나로 이을 징검다리가 되어 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사무라이들은 타자인 우리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싸울 줄 아는 농부일 수도 있고, 농부가 된 싸움꾼일 수도 있는데,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사무라이가 사라진 게 아니라 사무라이를 딱히 구분할 필요가 없어진 것뿐이다. 현실이자 인터넷 세상인 이곳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바로 사무라이다. 현실과 인터넷을 구분해야 할 시기는 과거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그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버츄얼 유튜버나 메타버스와 같은 현상들을 보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인터넷이라는 말은 더는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게 된 듯하다. 이제 인터넷은 현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이 아니다. 사람들은 인터넷과 현실 사이를 이어주는 고리를 능수능란하게 찾을 줄 안다. 이런 현상의 긍정적인 면은 해결되지 않은 사건에 퍼즐 조각을 맞추어 주는 일이 꽤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은 하나의 거대한 광고판이 되었고 커뮤니티를 타고 퍼져나가는 몇몇 사건들에서 우리는 무시할 수 없는 파급력을 본다. 만약 KBS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젝트가 오늘날에 진행되었다면 더 많은 가족이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되고 그릇된 현실이 너무 많이 늘어났다. 이들은 고리의 첫수를 현실이 아닌 현실로 시작한다. 분명 인터넷이란 현실에 기반한 공간인데도 말이다.


물론 이들은 그러한 현실이 ‘진짜’라고 믿었기에 그런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사람들이 겪었던 일이 그러했다. 사무라이들이 없어도 세상이 잘 굴러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반면 농부들이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간다고 믿는다면, 이 또한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농부와 같은 하위 계급이 없다면 그들이 모시는 영주도 없을 테고 그들 영주에 귀속된 사무라이도 없다. 그러나 영주가 없는 상황에서 사무라이가 없다면 농부들을 지켜줄 수 있는 이 또한 없다. 사무라이들에겐 그런 고민이 있다. 무엇을 자신의 현실로 삼을 것인가. 확실한 건, 둘 중 어떤 현실을 택하더라도 이 모두가 변하지 않는 사실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우리들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실과 인터넷 모두를 이어줄 하나의 사실이 있다. 인터넷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 게 아니라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니 우리는 사무라이라는 인물상을 두고서 그러한 사실에 기반해 움직이는 이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두 세계 모두에서 하나의 자신으로 움직이는 그는 날카로운 칼을 휘두른다. 이 칼이 바로 사실에 기반해 휘두르는 하나의 굳건한 신념이다. 이를테면 요즘 한창 유행하는 ‘메타버스’라는 단어는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대학교 입학식이나 회사의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대통령과 국민의 만남까지 메타버스를 통해 시도하는 이 풍경은 이것이 정말로 우리의 현실인지를 되묻게 한다. 메타버스 안의 풍경도 현실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왔고, 캐릭터 또한 이름이나 학번과 같은 식별 장치를 명확히 하지만 그럼에도 메타버스는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왜 그런지를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마땅히 형성되어야 할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온라인상에서 맺는 관계는 분명 현실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기에, 그렇게 맺은 관계가 사실적(Realistic)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실적으로 느껴지지 않기에 좋지 않은 관계라는 게 아니라, 사실적이지 않은데도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마땅히 형성되어야 할 관계란 정말로 무엇인지를 스스로 자문해보아야 한다. 딱히 인터넷이 아니더라도 사실적이지 않은 관계는 우리 현실에서 정말로 많다. 어쩌면 이게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을 지경의 사건들도 있다. 물론 혹자는 우리의 현실 자체가 사실에 기반한 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직 단 하나의 진실만이 있으며,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건 그것이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을 숭상하는 게 오늘날의 사무라이가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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